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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Oct 11. 2024

아사히카와 1

일본선교편지 4(미우라 아야코 기념문학관)

삿포르역에는 유동인구가 굉장히 많다. 

선교사님이 계시는 아사히카와에 가기 위해 삿포르역에서 특별열차를 탔다. 성인 1인당 거의 6만 원 정도 하는 비싼 열차이다.

삿포르에서 아사히카와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티켓에는 자유석, 지정석이 있는데, 지정석이 좀 더 비싸다. 우리는 자유석을 끊어 빈자리에 앉았다. 한국의 기차와 달리 검표원이 다니면서 꼭 표검사를 한다. 

표검사를 마친 후 표는 의자등받이의 꽂이함에 꽂아놓는다. 일본사람의 생활 창의성이 빛나는 작품이다.

창밖의 풍경은 벌써 가을이다. 홋카이도는 남한 영토의 7/10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확 트인 넓은 평야가 차창 밖으로 획획 지나간다.

벌써 가을걷이가 끝난 곳도 있다.

아사히카와 역이다.

점심부터 먹고 일정을 시작한다. 메뉴는 메밀국수와 돈가스 덮밥이다.

돈가스 덮밥이 생각보다 양이 많아 조금 놀랐다. 일본인은 소식이라더니, 이 집은 밥의 인심이 아주 후하다. 


식당 입구의 서양란이 너무 탐스럽게 피어있어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이렇게 많은 꽃을 피우기가 쉽지 않은데, 좀 신기했다. 


미우라 아야코 기념문학관에 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문학관 바로 옆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오래된 외국수종 시범림이 있다.(총면적 18.42ha로 '빙점'의 무대이기도 하다)

문학관 입구에 들어서자 '아야코'와 남편 '미우라 미쓰요'씨의 사진이 걸려있다. 

나는 '빙점'을 정말 감명 깊게 읽었다. 남편 역시 '빙점'을 드라마 한 일본드라마와 한국드라마, 모두를 보았고, 인간의 원죄를 다룬 그 작품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아야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선교사님 부부가 이 지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남편은 굉장히 기뻐했다. 


미우라 아야코(미우라는 남편성이다. 일본도 시집가면 남편성을 따른다.) 

1922년에 태어나 1999년에 죽은 아야코는 요즈음 젊은이들은 잘 알지 못할는지도 모른다.(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아마 하루키가 인기인이 아닐까?)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지금도 일본 전역에 있는 '미우라 아야코 독서모임' 회원들이 이 기념관을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에도 꾸준히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작품만큼이나 아야코의 삶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16세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7년간 열과 성을 다해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자신이 가르친 교육이 잘못된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고 교원을 그만두게 된다. 그 후 폐결핵에 걸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할 때, 초등학교 2년 선배인 이웃오빠 마에카다 다다시(홋카이도대학 의대생)를 만나 인생의 참 의미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연인관계가 된 지 5년 만에, 두 번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다다시는 죽는다. 폐결핵에다가 뼈에 균이 들어가 가만히 누워있어야만 하는 척추 카리에스가 발병하여, 아야코는 13년간의 요양생활 중 많은 시간을 석고침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어야만 했다.  다다시가 죽은 후 2년이 지난 즈음,  문병 온 미쓰요 씨가 방 안으로 들어올 때, 다다시가 다시 살아온 것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다다시를 닮은 미쓰요를 만나게 된다. 미쓰요 씨는 아사히카와 영림국(산림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정말 신기한 경로로 아야코를 병문안하러 오게 된 것이다.  아야코 37세, 미쓰요 35세(둘 다 초혼) 일 때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아직도 아픈 아야코를 지극히 사랑하는 미쓰요! 이들의 삶은 정말 보기 드문 아름다운 삶, 그 자체이다. 미쓰요는 결혼 후 일평생 아내가 사랑한 다다시의 사진을 늘 품고 다녔다는 일화를 이번 방문기회에서 듣게 되었다. 아야코 말년에 병 때문에 도저히 집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아야코가 불러주는 이야기를 미쓰요가 대필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방문록을 보니 아야코 찐 팬들의 글이 놀랍다. 일본어로 쓰여있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방문후기가 A4 용지 한 면이 되거나, 정성스럽게 쓴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한국인이 쓴 방문후기가 있는 부분을 사진 찍었다.

 선교사님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 한국인 젊은 부부를 만나 나누게 된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떻게 알고 이곳을 찾게 되셨나요?"

젊은 남편이 한 말,

"청년 때 일본 여기저기를 여행 다니다가 우연히 이 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야코선생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 아야코선생님의 모든 작품을 거의 다 읽고 나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결혼 후 아내와 같이 다시 이곳을 꼭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아야코가 집필하던, 생전의 방모습이다.


지금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10월 말쯤 되면 부슬부슬 내리는 눈으로 변해, 밤새도록 내린 눈으로 온천지가 하얀 평원으로 바뀐다는 선교사님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아야코가 다녔던 교회를 방문했다. 

역사가 120년이 훨씬 넘은 아사히카와 로쿠죠교회이다. ('빙점'에도 등장하는 교회이다)  

선교사님과 함께

이 교회가 워낙 유명해서인지, 때때로 방문객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방문객을 안내하는 두 교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들은 우리를 교회 안으로 안내하여서, 이것저것을  상세히 설명해 주신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 아야코의 친필서명이 되어있는 책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작가의 서명이 담긴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다.(일본어를 몰라 대단히 유감이다. 읽어 볼 수가 없다.)

안내해 주신 두 분이 너무 감사해서, 우리가 밥을 사기로 했다. 두 분이 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어서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를 나누게 되었다. 두 분 중 좀 더 젊은 한 분의 이야기다.


"일본의 남편은 대부분 너무 권위적이었어요.(나의 생각:요즘 젊은 일본청년들은 잘 모르겠다) 도저히 남편과 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혼하고 고향인 아사히카와에 돌아왔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온천지가 눈이었죠. 아들 하나를 데리고 눈길을 걷는데, 그 길로 죽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날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어요. 아들과 로쿠죠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저희 모자를 붙잡고 교회 안으로 인도했어요. 그들의 너무나 따듯한 보살핌에, 힘들었던 저의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그리고 이 교회가 미우라 아야코 선생님이 다니신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길은 여기에"란 책을 읽게 되었어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어요. 우울증에, 인생의 살 의미를 갖지 못했던 저에게 큰 빛을 비춰준 책입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다 보니, 믿음의 남편과 재혼하게 되었고,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아야코 선생님을 알리는 이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 84세지만, 너무나 건강하게 이 활동을 하고 있는 다른 한 분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진즉 믿고, 교회에 오고 싶었는데, 완고한 남편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남편이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교회에 나오게 되었어요. 지금은 너무 평강하고, 기뻐요. 하루하루를 감사로 살아가고 있어요."

저녁 식사 후 함께 찍었어요~

일본 땅에서 이렇게 신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집집마다 불당이 있고, 신토라는 민족종교가 만연한 이 땅에, 수치를 당하고 멸시를 받을 수 있는 기독교인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그들을 볼 때, 일본이 절대  희망 없는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다가왔다. 


이 일본땅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하며!


https://www.youtube.com/watch?v=o4tZbOgVYPU (일본에서 만든 일본 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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