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양원과 손양원목사님 기념관
여수에 가기 위해 출발하려고 자동차 시동을 거는데 "드드득"하면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일이람?'
서비스차량을 불렀다. 오래된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수까지 먼 길이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기 때문에, 아직 문을 연 자동차 수리점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가기로 했다.
"주님, 이 차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임시방편으로 배터리를 충전하고 길을 나섰다. 이 폭염 속, 땡빛의 아스팔트 위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이른 시간에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는 도중, 잘 아는 분이 전라도 광주에 계셔서, 지금 우리는 여수로 가고 있다고 남편이 전화를 했다.
"광주로 먼저 와! 점심 살 테니까 점심 먹고 가!"
그 분과의 친밀함 때문에, 다시 차 방향을 광주로 돌렸다. 배터리 충전하느라 30분 정도 허비하고, 8시 30분에 출발하여 12시 30분 정도에 광주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휴가온 둘째 딸과 두 손자 때문에 휴게소를 들리는 것도 또 하나의 여행 일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너무 예쁘다.
광주의 지인은 아주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음식점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그런데 닭백숙 한 마리에 8만 원이라니! 맛은 있는데, 음식값이 너무 세다.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도 사람들이 꾸역 꾸역 이 음식점에 온다고 하니,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남편이 학수고대하며 가보고 싶었던 곳에 도착했다.
여수 애양원!
먼저 애양원의 역사박물관에 들려 애양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1909년, 미국인 의료 선교사 포사이트가 목포에서 광주로 향하던 길에서 한센병 환자를 만났다. 환자는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선교부까지 왔다고 한다. 애양병원은 포사이트 의사와 윌슨의사가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센 병원이다. 1926년 광주에서 옮겨와 '비더울프 나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35년 새 이름을 공모하여 채택된 이름이 '애양원'이라고 한다. 이 역사관 건물은 광주에서 옮길 때에(1926년) 지은 것으로 계속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1972년부터 양로원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2000년부터 애양원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내부구조가 전시 공간을 위해 다소 변형되기는 하였으나, 외관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서양인으로, 여수에서는 희귀한 건물이라고 한다.
한국 한센병 의료 선교 기관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의료기구와 사진자료들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역사박물관 맞은편에는 애양원 예배당이 서 있었다.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다.
예배당 안에 들어가니, 내부는 넓고 정갈하다. 흐르는 잔잔한 찬송가는 방문객의 마음을 도닥거려 준다.
교회 예배당 마당에 또 하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사모하는 손양원 목사님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였다.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손양원목사님의 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애양원의 하늘과 예배당의 모습을 다시금 마음에 담는다.
기념관 앞 광장에는 손양원목사상이 세워져 있다.
손양원목사님은 1938년 신학교 졸업 후, 부산지방 선교사 대리로 지방 순회 전도를 하신다. 동시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치던 중, 1939년 7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하셨다. 신앙 때문에 1940년 9월 25일 일본군에 검거된 후 1년 넘게 취조를 받으며 수감생활을 하시다가, 1943년 5월 17일, 만기출소일이 가까워 오자 '전향'하면 출소를 시켜주겠다고 강요했지만, 신앙이 중요하므로 전향할 수 없다고 거부함으로 , 해방될 때까지 감옥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감옥에서는 남이 가기 싫어하는 화장실 옆에 항상 자리했고, 주는 주먹밥을 수감자에게 나눠줌으로, 목사님은 영양실조로 한쪽 눈마저 실명하게 되셨다. 옥중생활 동안 사랑을 실천함으로 '옥중성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셨다.
1948년 4월 3일 제주사건 후, 제주 치안을 위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집결했던 육군 14 연대 병력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무수한 사람이 죽었는데, 1948년 10월 21일, 반란군에 의해 손목사의 큰 아들 동인과 작은 아들 동신이 동시에 순교하게 된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은 사형형을 선도받았으나, 목사님이 경찰에 청원하여 그를 양아들로 삼고, 훌륭한 목회자로 길러내게 된다. 그래서 얻은 목사님의 또 다른 호칭이 '사랑의 원자탄'이다.
두 아들의 장례예배에서 목사님은 아홉 가지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첫 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오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나에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손목사님 기념관의 외부 모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향한 손목사님의 사랑의 깊이를 나타내 듯,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높다. 손목사님을 기리는 '고은 목사님'의 시비의 말처럼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란 구절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한센인을 내 가족같이 돌본 외국 선교사님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성경말씀대로 원수까지 사랑한 손양원목사님의 사랑에는, 앞서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신 예수님의 사랑의 발자취가 있었기에,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런 분들에 비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한 일서 2장 16절)으로 가득 찬 나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기념관을 벗어나 도로를 달리니, 여수 바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