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창조된 이유,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에 대해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 인간의 가죽옷인 육신에 갇혀 '한계점을 직시하는 눈'을 지니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영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많은 한계를 갖는다. 환경에 부딪히는 육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달을 때, 창조주 앞에 겸손함을 지니게 된다. 루시퍼의 가장 취약점이 교만임을 기억하자. 장차 올 영의 세계인 천국에서 '겸손함'은 너무나 중요한 덕목이다.
둘째, 환경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믿음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을 갖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마음은 보이는 것에 늘 흔들리고 좌우된다.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실체는 시각적 대상이 아니다. 눈은 마음을 속인다. 우리에게는 환경에 좌우되는 육신의 눈을 초월하여 오직 그 위에 존재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는 마음의 눈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믿음의 눈을 갖기 위해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눈의 비늘이 벗겨져야만 한다. 장차 올 영의 세계인 천국에서, '믿음의 눈'은 너무나 중요한 덕목이다.
셋째, 인간 내면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세상 영의 진을 뚫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이 땅에서 자기 나이만큼 배우고 경험한 세상 영에 잘 길들여있다. 그 세상 영은 마귀의 방법으로 잘 길들여진 영이며, 우리가 한시라도 빨리 벗어버리고 탈출해야 하는 영이다. 영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소유한 이 땅의 지식이나 경험이 쓸모없다. 오히려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거침돌이 될 뿐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영의 세계에 속한 속사람이 새로이 빚어지길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영이 장악하고 있는 인간적인 견고한 지식과 경험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 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재창조되는 역사가 우리의 영 안에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세상 영의 진을 뚫는 전투를 훈련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자아파쇄'이다. 장차 올 영의 세계인 천국에서, 자아파쇄는 너무나 중요한 덕목이다.
넷째, '영혼육 각각의 방해물을 극복하는 힘과 능력'을 훈련하기 위해서이다. 마귀는 오랫동안 인간의 영혼육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과정을 교묘하게 속이고 방해해 왔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으로 있을 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여 이리 같은 마귀의 궤계를 타파하고 극복하길 원하신다. 마귀는 사악하고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인간의 연수는 70이요 강건하면 80이다. 그러나 100년이 못 되는 수명 안에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인간은 창세전부터 존재해 온 마귀와 전투 상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주신 십자가 보혈의 공로가 아니고는 마귀를 결코 이길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을 통해서만 마귀의 방해를 극복할 힘과 능력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육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방해물을 이기고 전진하는 훈련을 이 땅에서 해야 한다. 현재도 그렇지만 장차 신속하게 올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될 기간에 천국 백성으로 생존하려면 '악한 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덕목이다.
다섯째, 완전함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역동하며 움직이는 '영의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신부들이 마땅히 해야 할 피조물의 본분 중 하나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덕이 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로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가 되기를 원하신다.
사람의 영혼을 낚는 일은 전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그리스도의 영을 전이시키는 작업이다. 이 과정은 상대의 영혼을 주님 안에서 사랑할 때만 가능하다. 즉 인간에게 영의 전이는 영혼의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부의 영을 포기하면 결코 얻지 못한다. 영의 세계에서는 완전함을 추구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순간, 고인 물처럼 썩기 시작한다.
우리가 회개하여 마음의 처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난 후에,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들일 수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은 더러운 곳에 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모셔들이는 그때를 다시 태어나는 '중생'이라 부르고, 그 과정을 '성결'이라고 칭한다. 우리의 영이 중생했다고 해서, 자고 깨어나면, 돌연 성격이나 성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의 영으로 탄생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영적 생명을 잉태한 알이 품어진다. 그러니 중생을 경험한 자는 속사람 안에 살아있는 생명의 알이 숨 쉬고, 속사람은 성결을 향해 자라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중생한 사람은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이 영적인 알은 세상이 주는 환란과 고통을 통해 조금씩 튼튼한 누에고치로 싸인다. 그러나 이 고치 속 안전지대에만 거하다가 삶을 종결하는 자들이 부지기 수이다. 이 고치 안에 너무 오래 머문 자는 자신의 종교적 의에 싸여 있기 십상이다. 고치가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안전지대가 편하면 편할수록 우리는 나오길 싫어한다. 그러나 우리 주인님은 우리가 고치 안에 머물러있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뚫는 힘을 키우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생명을 잉태하고 있기에, 고치를 뚫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알과 고치를 찢고 나올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결의 삶을 위한 준비자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목적에 맞게 빚어져서 옳은 길을 택하여 목적지인 거룩한 거주지에 잘 도착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심정을 깨닫고 영적 전진을 위한 임무에 착수하기만 하면, 그분은 전진할 힘과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 단단한 땅을 뚫고 나온 우량종자는 충분한 공기와 햇빛을 공급하기에 아깝지 않은 거목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장단점을 잘 알고 계신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은 극대화할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소유하고 계신다.
삶의 영적 전투에서 마귀는 간교함으로 우리를 겁주고 교활함으로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그 어떤 치열한 영적 전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마귀가 하나님의 군사를 해칠 수 없다. 영적 전투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만 의지하는 건 패배하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대장 되신 예수님, 예수님만이 오직 우리의 힘이시요, 반석이시요, 요새시며, 우리를 건지시는 분임을 알고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
사람은 각자의 그릇이 소유한 믿음의 크기에 따라 인생의 가시의 크기와 고통이 다르다.
영의 세계에서는 다음 단계로 진급하기 위해 반드시 시험을 치러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외에 모든 피조물은 자신을 늘 정결하게 지켜야 한다. 천사도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루시퍼를 통해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사람이 아무리 생각 없는 말을 입으로 뱉을지라도, 또는 자기 마음에 그 어떤 작고 하잘 것 없는 선택을 하더라도, 그에 대해 반드시 주님 앞에서 질문을 받을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를 아는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치를 문답에 준비된 삶을 산다.
"각자의 영에는 다른 재질과 색깔이 있다. 마치 각인된 지문이 다르듯이 말이다.
지도자의 자리는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자리란다.
믿음의 사람은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섬기고 마음껏 내 안에서 즐기며 살다가 정한 때가 차면 내게로 다시 돌아오면 된다.
내 아버지를 공경하는 신부에게는 선행이 마땅히 취해야 할 단장이다. 오직 선행으로 단장하기를 원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