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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Nov 24. 2023

나를 깨운 긴긴밤

루리작가의 『 긴긴밤』 을 읽고


바다는 너무나 거대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긴긴밤과는 결이 달라도 한참 다른  『평범한 결혼생활과 이 책을 같은 시기에 읽었다. 나는 긴긴밤으로 삽시간에 푹 꺼졌다, 다시 평범한 결혼생활에 녹아났고 한동안 긴긴밤을 잊었다. 그러다 몇 번을 읽어도 보석 같은 이 책의 바닷속으로 다시왔다. 결코 잊고 싶지 않아서다.  

그림이 많으니까 그림책, 동물들이 주인공이니 동화, 동화라고 하기엔 또 길기도 하니 청소년소설에 속하려나. 조금 긴 동화라고 치자. 나는 이런 '동화'도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긴긴밤의 문장들은 한결같이 쉽고 간결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았다.  


책을 추천해 주신 분의 설명을 덧들으니, 수컷 펭귄 치쿠와 윔보의 나날들이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반영한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애초에 상처받거나, 태생이 동물원인 동물들이 주인공이라 그들을 보는 따뜻한 사람의 시선이 담겼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것 말고도 더 큰 그림을 보며 이 책을 쓰신 게 아닐까 싶었다. 다양한 삶을 조영이랄까. 그중에서 가장 큰 건 어떤 삶 속이든 어려움안에서 근본적인 희망만큼은 그리고 싶은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었다.


신기한 건, 일종의 상처받은 동물들의 이야기고, 현실일 수 있는 그들의 이야기인데 모든 게 그들만의 세계로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족을 붙이면 나는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고3 때까지 동물학자 또는 동물해방운동가가 될 거라는 꿈을 품었다. 지지받지 못했거니와, 현실과 타협해 그 길은 가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하더라도 자원활동가로 동물보호운동은 할 수 있다는 타협안마저도 대충 하다 흐지부지 되긴 했지만. 한때 윤리학을 공부하며 인간과 동물권에 관한 논쟁에 마땅한 결론을 차지 못하자 결국 그냥 동물을 잊은 사람으로 살아다. 개고기는 안 먹지만 생선, 돼지, 소, 닭고기는 '잘'먹는 그런 사람말이다.


사족이 길었는데, 그 사족을 붙인 이유는 이젠 추억의 느낌이지만 여전히 동물에 대해 애틋함을 갖고 있는 나는, 결혼한 사람이 옛사랑을 만난 듯 복잡 미묘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단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동물권에 관심없는 사람도 충분한 몰입감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 거란 말도 붙인다.  


'동물원은 절대가선 안돼, 인간을 위한 동물원은 없어져야만 해'라고 감정에만 호소하며 진리인양 외치던 어린 나는, 성인이 돼서 논리를 찾았지만 실패했다. 세간의 끊임없는 논쟁이 보여주듯 일개 학부생에 불과한 내가 납득할만한 논리를 얻었을까. 하고많은 고기들 중에 개고기만 먹지 말자는 주장도 모순이 있지만, 거기에 소, 돼지 닭은 왜 먹냐는 뻔한지적도 지겨웠다. 꼭 더나가서 식물들은 꺾으면 안 아프냐는 것도 그다. 처음에 나는 채식을 할 생각도 없고, 동물원이나 동물로 돈을 버는 곳들에 아예 안 가지도 않을 수 없어서 발언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묵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니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귀찮아졌다. 생원지가 아닌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들이 얼마나 불쌍하며, 저 갇혀있는 소와 돼지와 닭과 말이 불쌍한지를 말하는 것이 매사에 딴지만 거는 사람 같았다. 리고 그들을 불쌍으로 보는 내 시선도 잘못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는 나를 불편해하는 타인의 의식이 불편해서 안 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니 소를 키워서 자식 뒷바라지를 다 하시고, 지금도 현재진행중인 시부모님 같은 분들 앞에서 저 갇혀있는 소들이 불쌍하고 어머님 아버님 저는 실은 동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동물해방운동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소들을 더 가까이 보면서 더욱 채식이 하고 싶어 졌다며 비건생활을 시작한 작가 같은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나는 소키워 팔아 돈 버는 집에서, 비싼 소고기 먹으라며 성의껏 구워주시는 어른들 앞에서 그저 뜨겁게 구워진 소고기에 쌈장을 얹고 밥을 얹어서. 먹으라면 먹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고기를 더 잘근잘근 가위로 쓸어 주었다. 그렇게 시아버지가 소들에게 사료 주실 때 옆에서 건초더미나 가끔 주면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세상이 점점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커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우리보다도 털이 수북한 길고양이가 겨울에 얼마나 추울까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오히려 불편해지기도 했다. 그냥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이 많아지니, 모든 그런 류의 동물에 온갖 시선만 모아지는 것 같았다. 정도를 모르는 나는 과연 어떤 노선에 있는 걸까 싶은데 요즘엔 뭐든 좀 적당히 하자는, 편하고도 귀찮으며 안일한 태도로 나와 우리 집 그 이외의 것들을 대한다.  


어찌 보면 사족이지만, 이 책으로 인해 한때 내가 오랫동안 가졌던 의식들이 떠올랐음을 고백한다. 어쩐지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아 따라갔다. 내가 마땅한 논리를 해결하지 못해 입을 다문 것도 있지만, 당장 내 앞의 문제만 해결하거나, 살아가기 급급하면서 동물권이나 환경보호나 같은 거시적인 문제들을 무시하면서 살게 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 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자면, 학교를 졸업하고 하루종일 일을 하거나 육아를 시작하면서 몸이 고단해지니 그전보다 더 편리를 추구다. 오염이 될 걸 알면서도 일회용품 사용을 무시하고, 천기저귀 쓸 생각은 아예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뿐더러 내 아이 불편제거 더 우선이니 아이가 오줌을 싸기 무섭게 기저귀를 갈아재꼈다. 코로나지만 놀러 가는 사람들은 다 놀러 가고, 나만 집에서 있는데 그것조차도 일부에서는 내 새끼만 중요한 예민한 엄마 취급을 받아 짜증지대로니까 집에서는 정작 없던 배달앱을 깔고 배달음식섭취의 반경을 넓혔다.

 

날 울림했던 <긴긴밤>이 <평범한 결혼생활>에 묻혔던 것처럼, 나는 눈앞의 시급한 것들에 온갖 시선을 고정하고 내가 편한 것에 익숙해졌다.


살다가 불현듯 가끔씩 느끼겠지만, 육아와 가족생활을 대하는 내 태도에 정기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아주지 않으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을 가고 있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긴긴밤은 책 그 자체로 울림 가득했지만, 울림 너머로 나를 지그시 밟아주는 묵직함이 좀 버거웠다. 그래서 이런 긴 생각들을 오랫동안 바라보느라 이 글을 몇 주간이나 붙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긴긴밤은 나의 자만을 알렸다. 이렇게 간다면 나를 위한다던, 내 아이를 위한다던 길도 결코 우리의 길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다. 긴긴밤은 나의 침묵을 깨 주었다. 당장 침묵을 외침으로 바꾸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내가 침묵하고 무시하며 그저 편하게 며 잊고 있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책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시작했던 노든이나, 자연으로 돌아가 거기서 가족을 만든 노든이나, 다시 동물원안으로 들어온 노든, 동물원에서 나고 끝낸 코뿔소 가부, 그리고 펭귄 치쿠와 윔보, 그들이 낳지 않았지만 품어가는 알, 그 알에서 나온 나(화자) 모두의 이야기다. 결코 그 이야기가 곧 '나의 일, 우리 사회의 일'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야다. 자연스러운 게 자연스러우니 온전히 자연적인 이치와 원리로 마땅한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상식 이하의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그 모두가 살아가는 사회는 처음부터 모두에게 결코 안전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탄생이 온전했어도, 어떤 사람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여자란 이유로, 어린이란 이유로, 국가를 잘못 타고나서, 가난해서, 아파서, 수만 가지의 이유로 약자가 된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 중에 정신 신체 경제적으로 모든 게 강자인 사람은 몇이나 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 앞에서 우리는 모두 약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약자의 목소리를 다 사회에 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동물권을 앞세워 육식을 금하자는 사람들 앞에 그럼 풀은 뜯을 때 안 아프냐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의 느낌대로 '모든 약자'의 논리가 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품고 실현하며 살아가는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거의 유토피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내가 약자임을 자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마땅한' 약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 편한 대로만 살아가는 사회는 전쟁만 없을 뿐, 더 가식적인 제국주의이자 무력사회 그 자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는 더불어 사는 사회. 내 안위와 편리만이 최고이며, 그 이상의 허황되거나 잘못된 집단적이며 맹목적인 가치지향은 '지양'해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나는 긴긴밤을 읽으며 잊고 있던 동물권을 떠올렸지만, 작가가 인간으로부터 동물을 해방하자! 며 극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동물권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나만 생각하며 편하게 살다가 놓쳤던 지대한 가치들을 떠올렸던 것과 같이 내가 차마 알지 못하는 지향점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보통날 앞에 수많은 존재의 역사와 희생을 기억하면 좋겠다. 끝내는 불편함 또한 '애쓰지 않고', 안위롭게 안고 가면서도 여유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긴긴밤을 짧은 밤동안 읽었지만, 긴긴밤의 여운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책갈피를 떼며.


p.62 쿠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걷고 있으면, 이 모든 하루하루가 평범한 날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p.67 아빠가 되는 건, 어렵지? / 쉬우면서 어렵지. 


p.74 노든은 숨을 쉬는 것을 까먹고 있다가 방금 깨달은 것처럼 크게 심호흡을 했다. 치는 노든에게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 이렇게 한다고 알이 무사할까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노든은 그저 알의 온기가 식거나 알이 깨질까 봐 걱정이 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p. 83 그래서 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본 적도 없는 치쿠와 보의 몫까지 살기 위해 살아냈다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냈다.


p.94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 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이제와 보니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마주한 '수영'이라는 것이 그나마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었다. 펭귄이 수영을 하는 데에 기적이 필요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p. 107 사막은 모래 속에 숨은 생명들로 가득했다. 살아남은 기적은 우리에게만 특별하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p. 110 나는 혼자 살겠다고 바위 뒤에 숨었다. 너무 무서웠지만 노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끝까지 지켜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p. 124  축축한 모래를 밟으며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내 앞의 바다는 수도 없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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