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7일. 안데스의 마지막 날 아침. 해는 아직 안데스 동쪽 볼리비아의 산 아래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숨겨진 햇빛이 구름을 붉게 물들여 볼리비아의 마지막 새벽하늘을 불태우고 있었다.
숙소의 앞에는 무럭무럭 김이 올라오는 폴케스 온천이 있었고 온천수에는 사람뿐 아니라 새떼들도 따뜻한 물의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안데스에서의 마지막 아침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볼리비아에서 보는 마지막 아침놀
폴케스 온천에서 새떼들이 아침 목욕을 즐긴다.
숙소를 출발한 차가 안데스의 동쪽 사면을 느리게 올라갔다. 고도 4800에서 5000미터를 넘나드는 길가의 풍경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던 눈 쌓인 봉우리들이 바로 앞 언덕 뒤에 우뚝 솟아 있고 산 밑의 붉은 호수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안데스 능선 위로 오르면서 새로 보이기 시작한 모래 언덕들은 풀 한 포기 없이 누가 새벽에 일어나 비질이라도 한 듯 했다.
산 밑으로 여행자들을 실은 지프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아침 안개가 두텁게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안개는 차들이 일으킨 먼지와 뒤섞여 산의 아랫도리를 가려주었다.
살바도르 달리 사막을 가로질러 안데스를 넘는 차량들
완만한 산의 사면 위에 여기저기 돌덩이들이 마치 누가 일부러 가져다 놓은 설치 작품처럼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인공을 흉내낸 듯한 기묘한 풍경이었다.
이 모래밭은 흥미롭게도 살바도르 달리 사막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살바도르 달리는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인데 작가 자신은 이 사막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달리의 그림에는 그가 그리는 주제의 배경으로 이곳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사막 풍경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그런데에 연유하여 붙인 이름일 것이다.
후리케스 화산(뒤의 왼쪽) 기슭에 있는 라구나 베르테 호수. 뒤의 오른쪽은 리칸카부르 화산
해발 4574m를 지나간다.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생각나게 하는 사막의 아침 풍경. 아침 햇살에 물든 완만한 모래 능선은 누군가 곱게 비질을 해 놓은 듯 깨끗하다.
볼리비아의 길, 칠레의 길
마침내 안데스 고갯길 꼭대기에서 차를 내렸다. 스마트폰으로 확인한 고도는 해발 4523 미터였다. 출입국 관리 사무소는 작고 볼품이 없었다. 뒤로 세로 토코 화산(5604)이 마치 나지막한 동네 뒷산처럼 모래 언덕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보기 싫든 좋든 세로 토코 화산은 칠레의 영토에 있는 칠레의 산이다. 볼리비아 출입국 관리소에서 출국 수속을 하고 다시 좀 떨어진 칠레 출입국 관리소에서 입국 수속을 해야 한다. 볼리비아 직원들은 무뚝뚝했지만 쉽게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 맞은편에는 후리케스 화산이 있는데 그 산도 분화구는 몽땅 칠레 것이다. 안데스의 능선을 중심으로 만든 국경선이지만 볼리비아는 뭐 하나 제대로 차지한 게 없는 듯 보인다. 내가 꼭 볼리비아의 편을 들 이유는 없지만 볼리비아를 벗어나면서 국경선을 보는 마음이 불편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볼리비아 출입국 관리소에 출입국 수속을 하려는 여행자들을 태우고 온 차량들이 줄을 서 있다.
여기까지 우리를 태우고 온 볼리비아 관광회사 지프와는 작별을 하고 칠레 출입국 사무소에 줄을 섰다. 칠레의 출입국 사무소는 볼리비아에 비해 규모도 크고 깨끗했다. 직원들도 친절하고 웃는 낯이었다. 이건 순전히 나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짐 검사를 대충 하고는 다시 백팩을 메고 버스를 타기 위해 길 가로 나갔다.
국경에서 보는 볼리비아 쪽 풍경과 칠레 쪽 풍경은 정 반대였다. 볼리비아 쪽이 높은 산악지대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비해서 칠레 쪽은 완만한 모래의 구릉이 이리저리 겹쳐지고 그 사이로 검은색 도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검은색 도로, 그것은 포장도로를 의미한다. 안데스에 들어온 이후 나는 포장도로를 접한 일이 없다. 그것이 오히려 안데스의 자연을 만끽하는 재미를 주었다. 그런데 산 봉우리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모래의 스카이 라인과 파란 하늘 그리고 새카만 포장도로로 구성된 풍경은 같은 길에서 보는 풍경으로는 신비할 정도로 차이를 보여 주었다.
칠레와 볼리비아의 국경 풍경. 작은 철탑은 볼리비아 영토를 표시한 표지판이고 그 옆에 칠레 영토를 표시한 큼직한 표지판이 있다. 그 표지판부터 칠레의 도로이다.
칠레와 볼리비아의 국경선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칠레 공화국이라는 표지판이 있고 그 동쪽으로 바짝 붙어서 작은 철탑 위에 올려진 볼리비아의 표지판이 있다. 칠레 국가 표지판과 볼리비아 표지판의 규모와 그 이미지가 보여주는 느낌은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의 차이뿐 아니라 그러한 경제적인 배경이 자아내는 어떤 당당함과 왜소함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다.
칠레의 국가 표지판에는 칠레의 국장(國章)이 그려져 있었다. 국장의 중앙에는 방패가 있고 방패는 빨간색과 파란색을 아래 위로 나뉘어 칠했다. 방패 가운데는 큰 별 하나가 있는데 이 방패는 지금 칠레 국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아래쪽 공간 꽃무늬 덩굴 위로 칠레에서 국가적으로 내세우는 국가 표어가 쓰여 있다. "이성 혹은 힘으로"
이 말은 정의의 상징인 저울과 칼에서 온 것으로 보이지만 국가와 국가가 서로 맞닿아 있는 국경선에서 좀 더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듯 읽혔다. 지금 칼로 긋듯이 나누어진 안데스 산 능선 위에 칠레의 국가 영토로 선언된 푯말은 19세기의 끝무렵 볼리비아에게서 힘으로 빼앗은 결과라는 것을 웅변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칠레의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로 내려가는 도로에서 보는 리칸카부르 화산(왼쪽 4649m)과 후리케스 화산(5704m)
안데스의 동쪽 사면을 올라오면서 길 아닌 길, 포장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차가 가니까 길인, 그러한 길을 계속 달려왔다. 이제 저 작은 볼리비아 표지판을 지나면 반듯한 포장도로가 산 밑으로 이어진다. 이정표는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까지 47킬로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동차는 갑자기 흔들림을 멈추고 매끄러운 아스팔트를 달리는 슬라이딩 보드처럼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멕시코 시티에 들어온지 47일째이고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에서 입국수속을 한지 11일째 드디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나라 칠레로 들어왔다.
볼리비아에서 칠레로 넘어가는 안데스 고갯길 좌우는 모두 원뿔 모양의 성층 화산들이 도열해 있다. 버스 차창으로 보는 화산들은 마치 파란 병풍 앞에 누군가 깎아 진열한 조각품 같다. 도로를 내려가면서 오른쪽에는 리칸카부르 화산(5920m)과 후리케스 화산(5704m)이 나란히 서 있고 왼쪽으로는 세로 토코 화산(5604m)이 우뚝 솟았다. 두 화산은 볼리비아에서 보는 동쪽 사면에는 눈이 많이 보였으나 서쪽인 칠레 쪽 사면에는 산 전체가 하얀 눈으로 싸여 있었다.
리칸카부르 화산이 보이는 아타카마 사막 풍경
담벼락 벽화로 남은 원주민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는 내게 그리 호감이 가는 곳은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안데스의 피로가 온몸을 덮쳐 왔다. 한잠 자고 일어났으나 아직도 해는 중천에 있었다. 골목으로 나왔으나 그리 흥미가 당기는 곳이 없었다. 옷 가게, 음식점, 카페, 기념품점, 호스텔 등이 골목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골목으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흘러 다녔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신기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볼리비아와 페루에서 흔히 보았던 원주민 여성들의 옷차림을 볼 수 없었다. 산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시내의 풍경으로 눈을 끄는 것으로는 마을 중심에 있는 성당 건물이 유일했다. 성당은 이번 여행에서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작고 아담했다. 이 번잡한 마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였다. 성당 마당만큼은 사람도 없이 한적했다. 내가 이 마을에서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성당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골목을 빠져나와 마을 밖의 사막으로 나왔다. 산책을 하면서 피로를 풀 요량이었다. 카페에 앉아 차를 한 잔 하면서 쉴 수도 있었으나 사람들에 치어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막은 황량하지만 오히려 나를 편하게 해주는 것들이 많았다. 작은 풀, 야생화들, 모래벌판에 홀로 선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나무 밑에서 땀을 식히다가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은 학교였는데 한창 수업 중이었다. 학교 담벼락에는 원주민 아타카마뇨스의 생활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에는 양치기처럼 보이는 목동, 식물의 싹을 들고 있는 여인, 좁은 주둥이에 사람 얼굴이 있는 토기, 나물 다듬는 여성, 발가벗은 채 뭔가 들은 주머니를 든 아기, 옷감 짜는 여인, 아기를 업고 있는 여인 등이 한 줄로 길게 배치되어 있었다. 여자들은 모두 긴 머리를 풀어 앞가슴 쪽으로 내렸거나 한쪽으로 길게 땋고 있으며 분홍이나 파란색 세로줄 무늬 또는 붉은색의 무늬 없는 옷들을 입고 있다. 식물의 새싹을 쥐고 있는 여인은 하늘색의 옥구슬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모든 여성들이 팔찌를 하고 있다. 붉은색 옷을 입은 목동으로 보이는 남자는 빨간 망토를 어깨에 덮었다. 사람들의 배경으로 그려진 집은 흙벽돌의 벽체에 아치형 출입구가 보인다. 이 그림의 내용을 이렇게라도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후 내가 칠레에서 원주민의 모습을 본 일도 또 그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그림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원주민 아타카마뇨스의 생활을 그린 중학교 담의 벽화
이 지역의 원주민은 아타카마뇨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의 오아시스에 의존해 살면서 수백 년간 이어온 바구니와 도자기 등을 만들어 왔다. 지금 골목 안에서 파는 기념품들은 대부분 그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안데스 저쪽에서처럼 전통의상을 입지 않아 구별이 잘 되지 않을뿐더러 워낙 인구도 적다. 칠레 정부는 이 아타카마 사막을 두고 태평양 전쟁에서 이긴 후 볼리비아의 끊임없는 영토 분쟁을 끝내는 방법의 일환으로 남쪽 칠레 주민을 북쪽으로 대거 이주시켰다고 한다. 결과 아타카마 사막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은 남쪽에서 이주해온 이주민으로 구성되었다.
칠레 전체의 원주민 비율이 5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하니 칠레 어느 지역에서도 원주민을 찾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는 안데스 산맥의 능선 위, 즉 국경선에서 70여 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그쪽과 이쪽의 분위기는 천양지차이다.
사막에서 보는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뭔가 크게 쓴 팻말을 들고 앉아 있는 젊은 남녀를 만났다. 그들은 브라질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팻말에 쓴 글씨의 뜻을 물어보니 대충 '버스를 놓쳤어요. 태워 주세요'라는 뜻으로 들렸다. 이곳에서 직접 브라질로 가는 차는 없으니 우선 아르헨티나까지라도 가야 한다고 했다.
아르헨티나도 안데스 산을 넘으면 된다. 이곳은 볼리비아와 칠레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세 나라 국경이 모인 곳이다. 젊은이들에게 행운을 빌어주고 골목 안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그날 밤은 침대에서 사흘간 쌓인 안데스의 피로를 풀었다.
브라질까지 가야 한다는 젊은 히치 하이커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서 보는 안데스 산맥의 풍경. 가운데 솟은 것이 리칸카부르와 후리케스 화산이다. 그 오른쪽 고개를 넘어 칠레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