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빌딩숲에서 인류애를 발견하다

이경준 사진전 : 원 스텝 어웨이

by 서연

나는 평소 전시 관람과 같은 문화생활을 즐기는 편이다.

아무래도 출퇴근시간 포함 하루에 12시간 남짓을 회사에 바쳤던 직장인 시기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전시를 관람할까 말까였지만, 취준생(a.k.a 백수)인 지금은 내가 원하는 날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계속되는 탈락 소식에 힘이 빠질 때도 있지만, 언젠가는 취업을 할 것이니 내게 주어진 24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이 시기를 즐기기로 했다.

그래서 취업준비 하는 동안 바깥공기도 쐴 겸 문화생활을 자주 하기로 다짐했고 오늘 그 다짐의 시작으로 이경준 사진전에 다녀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시장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다 보면, 이렇게 큰 공원 사진이 반겨준다.


예매 티켓 확인을 마치면 이렇게 전시 리플릿과 사진을 프레임에 담을 수 있는 투명포토카드를 받을 수 있다.


전시장에 입장하면 가장 먼저 이번 전시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작가 이경준에 대한 소개글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총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된다.


빛을 머금은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PAUSED MOMENTS,

도시 속 기하학적 패턴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캐치한 MIND REWIND,

초록빛 가득한 일상 속 평온한 순간을 담은 REST STOP,

그리고 관람객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소통하는 PLAYBACK.


각 챕터의 아이덴티티가 명확하고 동선도 친절하게 가이드되어 있어서 전시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CHAPTER.1
PAUSED MOMENTS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머금고 탄생한 아름다운 도시 풍경을 선보이는 PAUSED MOMENTS 챕터.

각각의 챕터 안에서도 사진의 분위기에 따라 존이 나뉜다.




첫 번째로 만난 존은 바로 해 질 녘 뉴욕의 도시 풍경을 담은 GOLDEN HOUR.




전시장에 들어서면 해 질 녘 황금빛으로 물든 뉴욕의 빌딩숲을 마주하게 된다.

해는 매일 지지만 도시가 이렇게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순간을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은 드물다.

작가는 이러한 순간을 포착하여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점의 풍경임에도 찬란하고 희망찬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진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 이 존의 경우 가벽이 많이 설치되어 있고 벽 전체를 사용하는 크기의 작품이 많았다.

이러한 배치 덕분에 실제로 뉴욕의 빌딩숲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전시에 더욱 실감 나게 몰입할 수 있었다.

특히 각 가벽 사이로 전체 벽면을 사용한 작품이 보일 때는 더더욱 통창을 통해 뉴욕의 시티뷰를 조망하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빌딩숲은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삭막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경준의 작품에서는 빛을 머금은 건물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다음으로 만나볼 존은 어둠이 깔린 도시의 모습을 담은 존, WAY BACK HOME이다.




이 공간 또한 어두운 공간 속에서 도시의 화려한 야경을 담은 작품이 강조되면서 실제로 건물 안에서 창문을 통해 도시의 야경을 조망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야경을 좋아해서 해외여행을 가면 꼭 야경스폿을 찾아가는 나인지라, 이 공간에 처음 들어섰을 때 약간의 벅차오름도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두 사진을 공유해 본다.

왼쪽의 사진은 다채로운 색을 가진 빛이 어우러져 어둠이 깔린 도시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른쪽의 사진에서는 늦은 밤임에도 많은 사람이 깨어있다. 각각의 창문 너머엔 어떤 사람이 있을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며, 또는 어떤 생각을 하며 깨어있을지 궁금해졌다.




CHAPTER.2
MIND REWIND

단정한 평행과 직각이 두드러지는 도시.

사람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주요 무대인 건물과 그 사이 기하학적인 패턴을 조명하는 MIND REWIND 챕터.




그리고 이 챕터의 문을 여는 PATTERNS & DOTS 존이다.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기하학적 패턴을 담은 공간이다 보니 벽이나 바닥의 색을 단조롭게 하고, 연속적인 패턴이 강조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눈에 띈다.




높고 창문이 많은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는 뉴욕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각각의 창은 같은 모양, 같은 크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각기 다른 일상이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창문 너머 공간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특히나 더 마음에 들었다.

나 역시도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인 서울에 살고 있다 보니 거리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타인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의 일상이 궁금하기보다는 인파에 치여 찌푸릴 때가 많은데, 신기하게 이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에는 도시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다른 공간에서는 이렇게 버드아이뷰로 본 루프탑과 그 루프탑에서 휴식을 즐기는 이들을 담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루프탑 선베드에 누워, 소파에 앉아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엿보는 듯한 구도가 재미있었다.

작품을 쭉 관람하다 이 사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는데, 대가족처럼 보이는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활기를 띠고 있는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미국의 TV 프로그램 '모던패밀리'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눕혀서 전시된 작품도 있었는데, 실제로 위에서 루프탑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어 재밌는 요소 중 하나였다.

이번 전시는 이렇게 관람객이 작품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공간 구성에도 세세하게 신경을 쓴 점이 좋았다.




거리, 그리고 횡단보도, 그리고 그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사체로 삼은 작품들로 구성된 ESCAPING AVENUE 존이다.




벽의 색깔도 횡단보도의 회색으로 칠해져 작품과의 일체감을 준다.




벽면에 부착된 작품 외에도,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의 영상이 바닥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고정된 구도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해리포터의 움직이는 사진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존에서는 작가가 서울에서 작업한 작품들도 전시가 되어있다.

운전할 때는 참 복잡해서 머리 아픈 도로인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이 도로를 달려 각자의 목적지로 바쁘게 향하는 수많은 차들이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했다.




CHAPTER.3
REST STOP

내리쬐는 햇빛과 살랑이는 바람이 가득한 공원에 머무는 순간의 평온함, 그리고 하얀 눈 위에 쌓인 고요하고 포근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REST STOP 챕터.




이 존에서는 전시의 메인 작품을 비롯하여 공원 속 녹음과 청량함을 가득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존을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을 것 같다.

'REST STOP'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센트럴파크에서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잔디에 누워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느끼는 포근함과 평온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한쪽 벽면에서는 센트럴파크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 다양한 구도와 비율로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는데, 의자에 앉아 탁 트인 화면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뉴욕의 센트럴파크 어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원 잔디밭에 자리 잡고 앉아 사랑하는 이와 소중하고도 평화로운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다른 날, 다른 장소임에도 하루종일 공원을 거닐며 낮부터 저녁까지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 같아서 좋았던 작품 배치.




이 날 서울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함박눈이 내렸다.

그래서 이 존에서 본 작품들이 유독 전시장을 나와서까지도 아른거리며 여운이 깊게 남았다.




겨울, 눈이 소복이 쌓인 뉴욕에서의 순간들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이다.

하얀 벽면이 눈밭을 연상시키고, 한쪽 벽을 덮은 눈밭 위 두 사람의 사진은 영화 '이터널선샤인'을 떠오르게 한다.




무표정의 사람들이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고, 높은 회색건물들로 다소 삭막하게 느껴지는 도시일지라도 눈이 소복이 쌓인 날만큼은 다르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눈사람을 만들고, 어른들은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꽃을 보며 눈을 반짝인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을 보면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른들이 상기된 목소리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CHAPTER. 4
PLAYBACK

시기와 상황, 순간의 감정에 따라 나와 도시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카메라의 하이앵글 속에서 사람들이 작은 점에 불과하듯이, 우리의 고민 역시 멀리서 바라보면 그 무게가 한결 가벼워질 수 있다.

전시의 마지막 챕터는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며 관람객이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만큼은 가벼운 마음으로 나갈 수 있도록 위로한다.




아마도 모두에게 각자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의 경중은 다를지라도 마음 한편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비슷할 텐데, 작가는 개개인이 가진 고민을 한 걸음 멀리서 바라보며 무게를 덜어낼 수 있도록 메시지를 던진다.

도시와 사람들을 멀리서 보는 앵글로 아름답게 담아낸 이 전시와 잘 어우러지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뜯어서 쓸 수 있는 종이 뭉치가 여럿 붙어있다.




관람객은 이 종이 위에 각자의 고민을 적고,




전시공간의 중앙에 있는 파쇄기에 이 고민을 넣어 갈아버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내 마음을 내내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고민이 어쩌면 종이 한 장에 담기고 쉽게 갈릴만큼 별 거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해방감이 들었다.




이번 전시는 작품뿐만 아니라 각각의 전시공간의 구성과 동선까지 관람객의 입장에서 세세하게 신경 쓴 것이 잘 느껴져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전시였다.

언젠간 나도 이경준 작가가 담은 뉴욕의 황혼과 센트럴파크에서 즐기는 평온한 순간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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