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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y 10. 2024

보쉬보이와 프라하성



비셰흐라트의 여왕 리부셰가 프라하라는 도시가 창건될 것이라는 미래를 예언한 때로부터 200여 년이 흘렀다. 그녀가 언급한 땅인 블타바강 건너편 높은 언덕에 낯선 무리가 말을 몰고 나타났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먼 옛날에는 오피슈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언덕 아래 강 주변에는 작은 마을이 여러 곳 있었는데, 장사꾼과 수공업자가 모여 살던 곳이었다. 강가와는 달리 언덕에는 숲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밤이 되면 불빛 하나 없이 매우 어두웠다.


“우리가 달려온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은 높고 거친 절벽이군. 언덕 아래로는 도도한 강물이 흐르고…. 이곳에 교회를 짓고 그 주변에 성채를 만들면 방어 같은 측면에서 매우 유리하겠어.”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던 젊은이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리부셰와 프셰미슬의 8대 후손이면서 모라비아 왕국의 왕을 모시던 봉신인 보쉬보이(852~889년)였다. 체코어로 크니제, 우리말로는 공작인 그가 다스린 영지는 ‘보헤미아 공국’이었는데,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10㎞ 거리인 레비 흐라데츠가 영지의 중심지였다. 레비 흐라데츠에서 백성을 다스리던 보쉬보이가 오피슈로 달려간 것은 교회와 성을 짓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긴 사연이 숨어 있다.


용감한 데다 싸움을 잘했던 보쉬보이는 20세이던 872년 모라비아와 동프랑크의 전쟁에서 모라비아의 왕 스바토플루크를 지지해 승리할 수 있게 도왔다. 그는 전쟁에서 쌓은 공을 인정받아 보헤미아 공국을 영지로 하사받았고 공작의 자리에도 올랐다.


보쉬보이는 10년 뒤인 883년 스바토플루크가 주최한 연회에 초청을 받았다. 그는 9년 전에 결혼한 부인 루드밀라도 연회장에 데려갔다. 당시 모라비아는 오래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곳곳에 교회가 생겼고 많은 성직자가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보쉬보이 부부는 이교도였다. 슬라브족의 종교를 믿었고, 그들의 신을 모셨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보헤미아 공국 백성 전체가 이교도였다.


“보쉬보이 공, 부인과 함께 내 옆에 앉도록 하시오.”


스바토플루크는 군사적으로 큰 힘이 되는 보쉬보이를 늘 우대했다. 그가 도와주는 한 동프랑크는 물론 주변 나라들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장수들과 신하들은 왕과 뜻이 달랐다. 그들은 이방인이면서 왕의 호의를 독차지한 보쉬보이를 질투했다.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보쉬보이를 적대시할 수 없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종교였다.


“전하, 보쉬보이 공작은 이교도입니다. 기독교인이 이교도와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저희가 식당 바닥에 앉든지, 아니면 이교도가 식당 바닥에 앉아야 합니다.”


스바토플루크는 당혹스러웠다. 장수, 신하들의 말처럼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이교도와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을 수 없는 게 관습이었다. 이교도인 보쉬보이를 놔두고 같은 나라 사람인 장수, 신하들에게 식당 바닥에 내려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명령을 내리면 논리적으로 볼 때 그도 식당 바닥에 앉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뛰어난 장군인 보쉬보이에게 바닥에 내려가 식사를 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대모라비아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치욕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지시였다.


스바토플루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모습을 확인한 보쉬보이 부부는 눈치를 보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왕을 궁지에서 건져내려면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걸 눈치 챘다.


“전하, 저희가 바닥에 내려가겠습니다. 작은 테이블 하나만 주시면 음식을 거기에 놓고 먹도록 하겠습니다.”


스바토플루크는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감정을 가지며 두 사람에게 작은 테이블을 하나씩 주라고 명령했다. 부부는 결국 기독교인들과 나란히 식탁에 앉지 못하고 연회장 바닥에 앉아 밥을 먹어야 했다.


행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밖에서 누군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모라비아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제인 대주교 메토디우스였다. 그는 스바토플루크의 선왕인 라티슬라프의 요청에 따라 20년 전 열한 살 아래인 동생 키릴과 함께 모라비아에 가서 포교 활동을 벌였다. 이교도 국가였던 모라비아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것은 사실상 두 사람이었다.


메토디우스는 식탁으로 걸음을 옮기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모든 사람이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데 유독 두 사람만 식당 바닥에 앉아 구차하게 밥을 먹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 그는 두 사람과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왕, 그리고 신하, 장수를 차례로 살펴보았다. 그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다 스바토플루크 옆으로 다가갔다.


“바닥에서 식사를 하는 저 두 사람은 누구입니까?”


스바토플루크는 얼굴이 벌게진 채 대답했다.


“보헤미아 공국의 보쉬보이 공작 부부입니다.”


메토디우스는 다시 보쉬보이 부부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저에게 그렇게 자주 자랑하시던, 그 보헤미아 공국의 군주 말씀이십니까?”

스바토플루크는 이번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메토디우스는 여전히 자리에 앉지 않고 선채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런데, 왜 저 두 사람만 식탁에 앉지 않고 바닥에서 식사를 하는 것입니까?”


스바토플루크는 이유를 설명하기 곤란한지 한참이나 주저하다 겨우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이교도입니다. 다른 장수, 신하들이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메토디우스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주 공손한 목소리로 스바토플루크에게 건의했다.


“전하, 제가 모라비아에 처음 왔을 때 라티슬라프 선왕은 물론 모든 사람이 이교도였습니다. 이곳에 기독교인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분들과 매일 같은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면서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저는 식탁에 앉으면서 다른 분들에게는 바닥에 앉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관습이나 법에 어긋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교도를 만나면 배척할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게 기독교인의 의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부부에게도 식탁에 앉으라고 하시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메토디우스의 설명을 들은 스바토플루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보쉬보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보쉬보이 공, 미안하오. 나를 끝까지 도와준 사람을 이렇게 홀대하다니 다 내 잘못이오.”


보쉬보이는 스바토플루크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부인 루드밀라도 남편을 따라 일어났다. 스바토플루크는 두 사람을 자신의 옆자리로 안내했다. 그곳에 앉았던 두 신하에게는 다른 자리로 가라고 눈짓을 했다.


보쉬보이 부부는 메토디우스가 베풀어 준 호의에 너무 감동해 어쩔 줄 몰랐다. 메토디우스는 빙긋 웃으면서 보쉬보이와 국왕 사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보쉬보이의 손을 꼭 잡으면서 오른쪽 눈을 찡긋거렸다.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주교 메토디우스라고 합니다. 국왕 전하께서 틈만 나면 공작 말씀을 하시더군요. 인품도 훌륭하고 싸움도 잘하는 대단한 인물이라고요. 아까 들어오면서 공작의 얼굴을 보니 전하의 말씀 중에서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공작처럼 뛰어난 분이 바닥에 앉아 계셔서는 안 되지요.”


보쉬보이는 메토디우스의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원래 말주변이 없는 데다 너무 가슴 깊이 감동한 탓에 입이 꽉 닫혀 버린 것이었다. 이때 메토디우스 오른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루드밀라가 질문을 던졌다.


“아까 대주교님께서 말씀하신 기독교라는 건 어떤 종교입니까? 저는 처음 들어보는 종교였습니다. 대주교님처럼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 믿는 종교라면 저도 한 번 믿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주교님처럼 선량하신 분이 믿는 하느님의 마음은 사랑으로 넘쳐 나겠군요. 그 사랑을 저희 부부는 물론 보헤미아 공국의 백성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메토디우스는 루드밀라의 맑은 두 눈을 들여다보다 속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 하느님을 배척하는 이교도가 아니라, 앞으로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꽃피울 성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애써 환하게 웃었다.


“기독교는 사람을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고, 내 원수까지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원하신다면 내일 두 분의 세례식을 거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세례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신도가 하느님의 사랑에 몸을 맡긴다는 뜻으로 물로 몸을 씻는 의식입니다. 세례식을 거행하면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 부부에게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메토디우스의 설명을 들은 루드밀라는 남편 보쉬보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보쉬보이는 평소 차분하고 논리적인 아내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아내가 해 주는 조언을 받아들여서 손해를 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보쉬보이와 루드밀라는 다음날 곧바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은 메토디우스가 직접 거행했다. 스바토플루크는 보쉬보이의 대부가 됐다. 식당 사건과 세례식 덕분에 둘의 사이는 왕과 공작의 사이를 넘어 오랜 친구처럼 더 돈독해졌다. 이렇게 해서 보쉬보이와 루드밀라는 보헤미아에서 세례를 받은 첫 지도자가 됐다.


보쉬보이는 메토디우스가 뽑아 준 신부를 데리고 귀국하자마자 레비 흐라데츠에 보헤미아 역사상 최초의 교회를 지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뭔지도 잘 모르던 신하들은 난데없이 개종했다는 보쉬보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쉬보이 공작은 미친 모양이야. 슬라브의 신을 버리고 낯선 이방인의 신을 받아들이는 게 말이 돼. 저런 사람을 어떻게 우리 지도자로 계속 모실 수 있겠어?”


여전히 슬라브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던 강경파 신하들은 보쉬보이를 몰아내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성 클레멘스에게 교회를 바치는 봉헌식이 성대하게 열리던 날 반란을 일으켜 보쉬보이 부부를 레비 흐라데츠에서 쫓아냈다.


보쉬보이는 목숨만 겨우 건진 채 궁전에서 달아나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갈 곳이 없던 그는 할 수 없이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를 찾아갔다. 그에게서 군사력을 빌려 반란군을 몰아낸 뒤에야 겨우 공작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보쉬보이는 여전히 반란의 기운이 넘치는 레비 흐라데츠에서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그때 마침 200년 전 선조인 리부셰가 했다는 예언이 생각났다.


‘블타바강의 비셰흐라트 언덕 맞은편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면 영원히 번성한다고 그러셨다지. 그곳으로 가 볼까?’


보쉬보이가블타바 강을 내려다보는 오피슈 언덕을 찾아간 것은 리부셰의 예언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언덕의 위치나 형태가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을 간파한 그는 이곳으로 천천히 궁전을 옮기기로 작정했다. 그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 무엇보다 먼저 오피슈 언덕에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작은 교회를 만들었다. 교회 봉헌식이 열리던 날 그는 아내와 함께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성모님, 저와 제 가족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보헤미아에 주님의 뜻이 퍼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보쉬보이는 성모 마리아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 주변에 해자를 파고 성채를 건설했다. 이것이 프라하성의 시작이었고, 프라하의 시작이었다. 아쉽게도 그가 지은 성모 마리아 교회는 13세기에 연거푸 벌어진 전쟁, 화재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사라졌다. 지금은 성 비타(비투스) 대성당 앞의 프라하성 매표소 건물 지하에 흔적만 남았다.


보쉬보이가 처음 만든 것은 성채는 오늘날처럼 웅장한 곳이 아니었다.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방어용 시설에 불과했다. 프라하성을 단순한 나무 성채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주지로 개발한 사람은 보쉬보이의 아들인 스피티니에프 1세였다. 그는 나무 대신 돌로 성을 쌓고 왕궁도 건설했다. 프라하성의 실질적 기초는 이때 만들어졌다.


오피슈 언덕 아래 블타바강 주변에는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장사꾼들과 수공업자들이 살던 곳이었다. 오피슈 언덕에 성이 생기자 흩어져 살던 상인, 수공업자들이 모여들었다. 마침내 새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었 다. 원래 프라하는 프라하성만을 일컫는 지명이었다. 도시 전체를 프라하라고 부르게 된 것은 1784년부터였다. 구시가지, 신시가지, 레서 타운, 헤라드차니, 요제포프, 비셰헤라트, 홀레소비체가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됐기 때문이었다.


프라하 성은 전망이 좋은 데다 외부의 침략을 막기 좋은 위치였기 때문에 옛날부터 최고 권력자들은 언제나 프라하 성에서 거주했다. 보헤미아 왕은 물론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1918년부터는 체코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이 됐다. 대통령 취임식도 이곳에서 열린다.


체코 사람들은 프라하를 ‘체코의 왕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프라하 성은 ‘왕관의 보석’이라고 부른다. 체코인들이 이렇게까지 프라하 성을 아끼는 것은 보쉬보이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프라하와 체코의 역사, 그리고 체코 기독교의 역사가 이곳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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