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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y 12. 2024

카를 4세와 프라하 성


1.


엘리쉬카는 겨우 세 살에 불과한 어린 아들 바츨라프의 손을 잡고 로켓 성의 성루에 올라갔다. 살을 에는 것 같은 찬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가파른 절벽 아래에서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이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멀리 하얀 구름 조각이 흘러 다니는 걸 제외하면 흠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엘리쉬카는 바츨라프를 꼭 껴안았다. 작은 아이의 몸뚱이는 어머니의 품에 그대로 들어갔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계속 불었지만 바츨라프는 어머니 품에 안긴 덕분에 춥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엘리쉬카는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바츨라프, 내가 믿는 것은 오직 너뿐이란다. 그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평범한 아이라면 세상일을 분간하기 어려운 나이지만 바츨라프는 어느 누구보다 영민했다. 그는 어머니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부셰 여왕의 9대 후손이신 보쉬보이 선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후 프셰미슬 왕조는 수백 년 동안 보헤미아를 다스려 왔어. 하지만 너의 할아버지이신 바츨라프 2세와 너의 외삼촌 바츨라프 3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프셰미슬 왕조는 대가 끊길 위기에 몰렸지. 너의 아버지는 보헤미아의 왕이기는 하지만 프셰미슬 왕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이야. 프셰미슬 왕조의 피가 흐르는 남자는 너뿐이란다. 네가 어서 자라 아버지에게서 왕 자리를 물려받아 룩셈부르크 왕조가 아니라 프셰미슬 왕조를 부활시켜야 해. 보헤미아를 유럽에서 가장 빛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니?”


바츨라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말귀를 알아듣게 됐을 때부터 어머니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프셰미슬 왕조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보헤미아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머니의 당부가 얼마나 깊이 각인됐던지 이제 겨우 세 살에 불과한 꼬마의 머리에는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사명감이 피어났다.


“쾅!”


엘리쉬카와 바츨라프가 성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성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엘리쉬카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말을 탄 남편 ‘룩셈부르크의 얀’이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왔구나.’


엘리쉬카는 남편이 여기에 왜 왔는지 잘 알았다. 그녀는 최근 남편을 몰아내고 어린 아들을 보헤미아의 왕 자리에 앉히기 위해 일부 귀족과 손잡고 반란을 준비했다. 그런데 한 귀족이 남편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반란 계획은 들통나고 말았다. 반란에 가담하기로 한 귀족들은 모두 붙잡혔다는 긴급한 전갈이 간밤에 엘리쉬카에게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그녀는 하루 이틀 사이에 남편이 로켓 성에 달려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도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달아날 곳은 물론 도와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었다.


“막아라!”

“앞을 가로막는 자는 모두 죽여라.”


로켓 성의 정원에서는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성을 지키는 병사 수십 명이 왕이 데리고 온 수백 명에 맞서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병력에서 절대 열세이다 보니 도무지 당해낼 수 없었다. 혼란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엘리쉬카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성루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남편은 바닥 층의 대형 홀에서 모자를 기다렸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내가 그렇게 경고했건만 결국 당신은 나를 몰아낼 반란을 꾸미고 말았어.”


엘리쉬카는 인사하기는커녕 그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보헤미아는 당신의 것이 아니야. 수백 년 전부터 프셰미슬 왕조의 것이었어. 우리 집안이 소유했던 물건을 되찾으려는 게 무엇이 잘못됐다는 것이지?”


아내가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빌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대드는 모습을 본 얀은 터져 나오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아. 당신을 지금 당장 멜니크 성에 가두겠어. 평생 그 성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만들 거야. 왕후를 당장 멜니크 성으로 압송하라.” 


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홀을 에워쌌던 병사들은 왕후에게 다가가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해졌다 해도 왕후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왕후는 병사들의 손짓에는 아랑곳없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얀은 왕후에게서 바츨라프를 떼어내고 왕후의 어깨를 와락 잡아 문을 향해 집어던졌다.


“당신의 걱정을 덜어 주지. 바츨라프는 물론이고 당신이 낳은 세 아이는 당신과 함께 멜니크 성에 가지 않을 거야. 부모 없이 이 성에서 아이들끼리만 살게 할 거야.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아끼고 기대하는 바츨라프가 왕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기대하지 마.”


얀은 바츨라프의 목덜미를 붙잡고 다른 방으로 끌고 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분했던 엘리쉬카의 얼굴은 붉어졌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바츨라프! 내가 한 말을 절대 잊지 말거라. 이 어미도 잊으면 안 돼. 나에게는 너뿐이란다.”


바츨라프는 아버지에게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었다. 이 모습은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이었다.



2.


카를 4세(체코 이름 카렐 4세)는 프셰미슬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바츨라프 2세(재임 1278~1305년)의 외손자였다. 원래 이름은 외할아버지와 같은 바츨라프였다. 프셰미슬 왕조의 대를 이으라는 뜻에서 어머니가 지어준 것이었다. 카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일곱 살 때 프랑스 파리의 성당에서 열린 견진성사에서였다. 그는 여러 이름 중에서 가장 사랑하며 따랐던 삼촌이자 대부였으며 프랑스의 왕이었던 샤를 4세의 이름을 골랐다. 프랑스어로 샤를이 독일어로는 카를, 체코어로는 카렐이었다.


카를 4세의 외할아버지인 바츨라프 2세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외동아들인 바츨라프 3세(재임 1305~1306년)는 암살로 목숨을 잃었다. 뜻하지 않게 두 사람이 연이어 죽는 바람에 수백 년간 이어 온 프셰미슬 왕조의 대는 끊어져 버렸다. 


귀족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에게 달려갔다. 그의 장남인 ‘룩셈부르크의 얀’을 바츨라프 2세의 딸인 엘리쉬카와 결혼시켜 왕 자리에 오르게 하자고 제안했다. 하인리히 7세는 굴러들어 온 호박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결혼식을 거행한 뒤 군대를 동원해 겨우 열 네 살인 아들을 왕 자리에 앉혔다. 


하인리히 7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들보다 네 살 많은 며느리 엘리쉬카가 아버지 바츨라프 2세를 닮아 포부가 큰 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결혼 6년 만에 아들을 낳자 남편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갓난아기를 왕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프셰미슬 왕조가 수백 년 동안 지켜온 보헤미아를 엉뚱한 외국인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게 그녀의 뜻이었다. 


가까스로 반란을 적발해 아내를 쫓아낸 얀은 아들 카를 4세마저 애증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그는 아들을 프라하에서 파리로 쫓아내 버렸다. 다행히 카를 4세는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어서 생전 처음 본 삼촌인 샤를 4세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스승 역할을 맡은 파리 대학교 교수이자 사제였던 피에르 드 로이지에르와도 사이좋게 지냈다. 로이지에르는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6세(재임 1342~1352년)가 되는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때 두 사람의 조우는 서로에게 평생 도움이 되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카를 4세는 프라하를 떠난 지 10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인 1333년에야 보헤미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보헤미아에 아무런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파리로 쫓겨 가는 바람에 프라하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프라하를 떠난 지 오래돼 체코어마저 잊어버렸다. 


카를 4세는 호의를 사기 위해서는 언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필사적으로 체코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원래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잘 했던 그는 엄청난 노력을 쏟은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체코인처럼 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의 탁월한 사교술과 보헤미아에 적응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은 귀족은 물론 백성의 호의를 사기에 충분했다. 


카를 4세가 귀국했을 때 프라하는 도시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황폐해진 상태였다. 외할아버지 바츨라프 2세 시대에 불이 나는 바람에 무너진 프라하성은 아무도 수리하지 않아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머무를 곳이 없어 구시가지에 있는 귀족의 집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현실을 개탄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화려한 파리의 궁전에서 사는 데 익숙해졌어. 그곳과 비교하면 프라하의 현실은 너무 초라해. 게다가 파리에서 결혼한 아내 블랑카를 프라하로 데려오기로 했는데 궁전 하나 없는 상황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너무 민망하군.’ 


카를 4세는 어머니의 채취가 흐르는 프라하를 정말 좋아했다. 아무리 현실이 딱하더라도 이곳을 버리고 떠날 생각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성과 궁전을 재건하기로 했다. 성을 복구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에게는 “불편하더라도 참고 평범한 저택에서 잠시 지내자”고 양해를 구한 다음 프라하에 오라고 했다. 다행히 아내는 남편의 뜻을 이해했고, 힘든 현실에서도 보헤미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카를 4세가 성과 궁전 건축을 서둘러야 할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새 부인, 그로서는 새 어머니였다. 얀은 첫 아내인 엘리슈카가 죽은 뒤에도 4년 동안 부인 없이 혼자 살았다. 이때 프랑스 왕가가 중매쟁이로 나섰다. 그들이 소개한 신부는 겨우 열네 살이었던 부르봉 자작의 막내딸 베아트리체였다. 얀과는 스물네 살 차이였고 카를 4세보다도 네 살 아래였다.


프라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베아트리체는 결혼 직후부터 향수병에 시달렸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가 파리는 물론이거니와 부르봉과 비교해도 시골이나 마찬가지였던 프라하에서 사는 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얀은 아들에게 성과 궁전 재건을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평민이 사는 오두막이나 그저 그런 귀족이 거주하는 평범한 저택도 아니고, 왕 부부가 살아야 할 궁전을 짓는 일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었다. 궁전도 없는 프라하 생활을 도저히 참지 못하게 된 베아트리체는 결혼 3년 뒤인 1337년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여왕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어린 아들조차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카를 4세는 프라하성과 궁전을 적당히 재정비한 뒤 들어가 살았다. 왕족이 살기에 완벽한 궁전은 아니었지만 참고 지낼 만한 정도는 될 수 있었다. 구왕궁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이후의 여러 왕이 끊임없이 손을 댄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인 1346년 국왕 자리에 오른 카를 4세는 어머니가 생전에 당부하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영혼이나 마찬가지인 보헤미아를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 군사, 문화의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즉위하고 첫 10년 동안 보헤미아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다양한 건설 작업을 진행했다. 프라하성과 궁전은 첫 작품이었다. 여기에 카를 다리 건설 사업도 시작했다. 나중에는 성 비투스 대성당, 신시가지, 카를 대학교, 카를슈타인 성 등 체코에서 내로라하는 많은 건축물을 새로 만들거나 보수했다. 


카를 4세 덕분에 프라하는 유럽 최고 도시로, 보헤미아는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카를 4세가 1378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성 비타 대성당에 묻힐 때까지 보헤미아와 프라하는 40년 동안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체코인은 오늘날까지도 그를 ‘체코의 아버지’라고, 그가 통치했던 시기를 ‘보헤미아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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