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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21. 2024

부다페스트 셋째 날(2) 에르지벳의 도시


헝가리 국회의사당, 자유의 광장 같은 역사적 현장이 즐비한 곳은 리폿바로슈 지역이다. 알고 보니 이곳은 다양한 카페, 각종 고급 레스토랑은 물론 고급 바, 클럽이 즐비해 흥미로운 밤 생활을 즐기려는 현지 젊은이가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각 거리에는 신고딕이나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이 즐비하다. 



리폿바로슈라는 이름은 ‘레오폴트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18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였으며, 17990년 헝가리 국왕 대관식을 치른 레오폴트 2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도를 잘 보니 ‘카페 리스트’라는 이름이 보인다.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은 기분인데 헝가리 대표음악가 ‘리스트’의 이름을 붙인 카페라니! 


카페 리스트는 성이슈트반대성당 바로 앞에 있다. 대성당은 순위를 뒤로 돌려놓고 먼저 카페에서 커피부터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담한 카페라고 생각하면서 들어갔고,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카페는 보통 수준이 아니다. 카페 벽에 이상한 서명이나 사진이 붙어 있기에 살펴보니 유명한 배우, 음악가 이름이 즐비하다. ‘맨 인 블랙’에 나온 윌 스미스는 물론이고 세계적 성악가 플라치도 도밍고도 보인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여기에 왜 왔을까? 그 이유는 화장실에 다녀온 뒤 알게 됐다. 카페 주인에게 화장실 위치를 물었더니 카페가 붙은 건물, 즉 호텔 1층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했다. 이 건물은 5성급인 아리아호텔부다페스트였다. 화장실이 지금까지 본 곳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화장실 문을 열고 채 1~2초도 걸리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유명 배우, 음악가들은 이 호텔에서 묵으면서 틈틈이 커피를 마시러 왔던 것이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주인의 요청에 따라, 혹은 스스로 벽에 서명했던 것이다. 뜻하지 않게 유명한 호텔의 놀라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셈이었다.



윌 스미스가 다녀간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흐뭇한 기분을 가득 안고 카페를 나선다. 한참 쉰 데다 기분까지 좋으니 발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가볍다. 바로 옆의 성이슈트반대성당으로 걸어가는 걸음은 상쾌하기만 하다.


성 이슈트반은 11세기에 헝가리 왕국을 창시한 초대 국왕이었고 헝가리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한 성인이었다. 그는 1038년 세상을 떠나 부다페스트 남서쪽의 세케슈케헤르바르에 있는 성모마리아성당에 묻혔다. 교황청은 ‘헝가리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인’이라면서 1083년 8월 20일 성 이슈트반을 시성했다. 이때부터 성 이슈트반은 헝가리의 수호성인이 됐고, 해마다 8월 20일은 성 이슈트반의 날이 됐다.


성 이슈트반은 1천 년 전의 인물이지만 뜻밖에 성이슈트반대성당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에 완성했으니 이제 겨우 120여 년 정도 된 건물이다.



성이슈트반대성당이 있던 지역은 18세기 말부터 도시로 형성됐다. 건물이 생기고 사람이 모이자 성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성당을 지금의 자리에 세운 이유는 ‘기적’이었다. 


1838년 홍수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을 처지에 몰렸다. 이때 딱 한곳에 흙이 쌓여 물 위로 솟아올랐다. 물에 갇혀 갈 곳이 없던 수백 명이 그곳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거기서 며칠 동안 버틴 끝에 구조될 수 있었다.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신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흙이 솟구쳤던 자리에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성당 건축비로 내놓았다. 여기에 감동한 부다페스트시청은 결국 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헝가리 혁명과 독립전쟁 때문에 성당 건설 공사는 미뤄지다 1851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런데 완공을 눈앞에 둔 1867년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건축 자재가 불량품이라서 공사를 마치더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듬해 돔이 무너졌고, 성당 내부를 받친 기둥도 대부분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무너진 돔을 치우는 데에만 3년이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성당 공사는 1905년에야 끝났고, 축성식은 그해 11월 9일에 거행됐다. 처음에 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성당에는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인 성 루이트폴트의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르파드가 마자르족을 이끌고 헝가리에 정착한 지 1천 주년이 되던  1896년을 맞아 ‘헝가리 최초의 국왕이며 성인인 성 이슈트반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져 성당 이름을 바꾸게 됐다.


만약 성당 공사 시기가 헝가리 1천 주년 무렵이 아니었다면 성당의 이름은 성루이트폴트대성당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랬다면 오늘날 부다페스트에서는 성 이슈트반에게 헌정한 성당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됐을 것이다.



성이슈트반대성당의 하이라이트는 두 가지다.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인 ‘젠트좁’, 즉 ‘성스러운 오른손’과 페스트 지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돔 전망대다.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은 글자 그대로 그의 오른손이다. 성 이슈트반이 죽은 뒤 그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신비주의가 동유럽에 만연했다. 사람들은 성 이슈트반의 유해를 갖고 있으면 모든 병에서 낫거나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이런 관념은 당시에는 동유럽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이 때문에 골치를 앓은 교황청은 이른바 ‘제2의 유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성인의 유해를 가져가지 않더라도 유해를 만지거나 유해에 접촉한 손수건 같은 물건에도 성스러운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성인의 유해를 가져가는 일은 줄고, 대신 유해를 만지거나 손수건으로 유해를 쓰다듬는 일이 늘어났다.


성 이슈트반의 관은 세케슈페헤르바르 성당에 보관됐는데 한 직원이 그의 오른손을 잘라 몰래 훔쳐가는 일이 일어났다. 오른손이 다시 발견된 것은 48년 뒤였다. 오른손은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곳곳을 돌아다니다 급기야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잘츠부르크로 옮겨져 비밀 동굴에 숨겨졌다.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이 헝가리로 돌아간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20일이었다. 처음에는 성모마리아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수도원에 보관됐지만, 나중에 성이슈트반대성당으로 이관됐다. 해마다 ‘성 이슈트반의 날인 8월 20일에는 성물의 귀환을 기념하는 미사가 이슈트반 대성당에서 진행된다. 미사를 마친 뒤에는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성물 행진이 이어진다.


성이슈트반대성당에 들어가면 주 제단 왼쪽 예배당의 화려한 보관함에 안치된 그의 오른손을 볼 수 있다. 운이 나쁘면 길게 늘어선 줄 맨 끝에 1시간 이상 서야 할지도 모른다. 신기한 사실은 1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오른손은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성이슈트반대성당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여러 대성당처럼 예술작품이 많다. 하느님과 예수를 다룬 작품도 있지만 성 이슈트반을 포함해 헝가리의 영웅, 성인을 다룬 작품도 많다. 가장 먼저 입구 로비에는 성 이슈트반을 담은 부조가 있다. 돔 천장에도 성 이슈트반의 일생을 다룬 청동 부조 연작이 달렸다. 지붕을 씌운 대 제단에도 성 이슈트반 조각상이 있다. 이 밖에 성당 곳곳에는 성 에르지벳, 성 겔레르트, 성 마르기트 같은 인물을 다룬 작품이 흩어져 있다. 



성이슈트반대성당에서 나와 다시 카페 리스트를 지나 한 블록만 더 가면 널찍한 공원 광장이 나타난다. ‘헝가리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후 엘리자베트의 헝가리식 이름을 붙인 ‘에르지벳 광장공원’이다. 이 공원의 이름이 에르지벳으로 정해진 이후 그녀의 이름을 붙인 광장, 공원, 숲이 헝가리 곳곳에 생겨났다.


에르지벳 공원 이름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는 에르지벳 광장이었지만 옛 소련이 주둔했던 1946년에는 스탈린 광장으로 개명됐다. 1953년에는 엥겔스 광장으로 바뀌었다가 공산정권이 붕괴한 이후인 1990년에 다시 에르지벳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갔다.


많은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많은 꽃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든 덕에 에르지벳 광장은 19세기 말에는 부다페스트 최고의 산책로로 인기를 얻었다. 나중에는 극장과 각종 당과류를 파는 키오스크가 들어서 산책 나온 사람들을 유혹했다. 극장은 나중에 전시장으로 바뀌었다가 공산정권 시절인 1960년에는 아예 허물어져 사라졌다.



에르지벳 광장 북동쪽 끝에서는 부다페스트의 중심거리인 안드라시 대로가 출발한다. 에르지벳 광장에 이름을 준 엘리자베트와 안드라시 대로에 이름을 준 19세기 총리 안드라시 귤라는 당시 정신적 연인이었다. 살아생전에는 깊은 인연을 잇지 못했던 두 사람이 죽어서 부다페스트 중심지의 지명으로 만났다는 게 이색적이지 아닐 수 없다.


에르지벳 거리는 안드라시 대로에 접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 부다페스트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았다. 지하철 데악 페렝 역도 인근에 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차량 통행량은 물론 유동인구도 많다. 차와 사람이 많이 다니다 보니 늘 복잡하지만 에르지벳 광장은 뜻밖에 한가하고 편안하다. 어린이놀이터도 있고 농구장과 미니축구장도 있다. 그래서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이곳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 ‘마이클 잭슨 나무’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이 1996년 부다페스트를 방문했을 때 공원 인근의 켐핀스키 호텔에 묵은 것을 기념해 여기에 나무를 심은 것이다. 에르지벳 공원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설은 ‘부다페스트 관람차’다. 이곳에 올라가면 부다페스트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헝가리인이 엘리자베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에르지벳 광장 인근 마닥 임레 거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에르지벳 광장의 남서쪽 출구로 나가면 엘리자베트가 평생 존경했던 헝가리 정치인 데악 페랭의 이름을 딴 지하철 데악 페렝 역과 데악 페렝 광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카로이 크룻 대로를 따라 가다보면 바로사쟈(시청) 공원이 나타난다. 공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검은색 옷을 입고 우산을 쓴 여성 동상이 보인다. 이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황후 엘리자베트, 즉 시씨다. 


엘리자베트 동상이 세워진 것은 불과 11년 전이다. 황후 탄생 175주년을 맞아 2012년 부다페스트 제7구 구청이 1867년에 촬영된 그녀의 사진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었다. 흔히 시씨 동상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워낙 인기가 많아 위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일부러 찾아가 기념사진을 찍는다. 동상 주변에 맛집도 많고 벤치도 많아 만남의 장소로 제격이다.


놀랍게도 제7구의 이름조차 ‘에르지벳의 땅’이라는 에르제베타로스다. 제7구는 1881년 12월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엘리자베트를 기념하는 뜻에서 지명에 에르제벳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이듬해 1월 17일 그들의 요청을 승인했고, 2월 7일 공식적으로 제7구의 이름은 에르제베타로스로 바뀌었다. 



제7구의 중심도로에도 엘리자베트의 이름이 붙어 에르지벳 코룻 대로가 됐다. 헝가리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인 뉴욕 카페가 자리를 잡은 도로다. 흥미로운 사실은 에르지벳 대로는 길게 뻗어 맨 끝에서 안드라시 대로 쪽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아쉽게도 에르지벳 대로가 곧바로 안드라시 대로와 만나는 것은 아니고, 제7구가 끝난 지점부터는 도로 이름이 테레즈 대로로 바뀌어 안드라시 대로를 만난다. 


에르지벳 대로는 19세기에는 부다페스트 문화 활동과 나이트 라이프의 중심지였다. 뉴욕 카페 외에 많은 카페가 들어서 예술인 등 신지식인이 몰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정권이 들어선 게 에르지벳 대로의 정체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곳은 오늘날에는 현지인이 즐겨 찾는 쇼핑거리다. 무려 2천여 개에 이르는 상점이 거리에 늘어섰다. 가로수도 예쁘게 단장돼 있어 산책하기에 무척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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