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지벳의 이름이 담긴 제7구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어두운 역사도 간직한 곳이다. 헝가리를 점령한 독일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곳에 유대인을 가두는 게토가 설치했던 것이다. 북쪽으로 키랄리 웃차, 동쪽으로 나기야타지 사보 웃차, 남쪽으로 도하니 웃차, 서쪽으로 카로이 크룻 대로를 접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헝가리를 조국으로 생각하며 평화롭게 살던 유대인 12만 명 중에서 5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부다페스트의 유대인과 게토 그리고 학살을 상징하는 장소는 제7구의 오른쪽 끝부분인 도하니 거리에 있는 도하니 시나고그다. 일부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큰 시나고그라는 뜻에서 대시나고그라고 부르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상징성을 가진 도하니 시나고그를 설계한 사람이 바로 독일인이었다는 점이다.
부다페스트 유대인공동체는 150년 전 도하니 거리에 시나고그를 짓기로 하고 국제 공모전을 실시했다. 당시 동일 건축가이던 루드비히 푀스터가 무어 양식의 설계도를 제출해 1등을 차지했다. 그는 이전에 오스트리아 빈의 대시나고그를 설계한 경험이 있었다. 나중에 유대인을 탄압하게 되는 독일인이 유대인 시나고그를 설계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도하니 시나고그 건설 공사는 유대인 건축가 벡셀만 이낙이 맡았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 140만 크론을 ‘시각 장애 어린이’를 지원하는 ‘벡셀만재단’에, 200만 크론은 교사 재교육 활동에 기부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수십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공사는 5년 동안 진행됐고, 1859년 9월에 개장식이 거행됐다.
도하니 시나고그가 개장할 때만 해도 헝가리에서 유대인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해마다 3월 15일 헝가리 정부가 주최하는 국가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될 정도였다. 역사상 위대한 헝가리 정치인 추도식도 이곳에서 자주 열렸다. 특히 시나고그 개장 이듬해인 1860년 12월 20일에는 헝가리계, 유대계를 포함해 많은 정치인, 예술가, 과학자가 참가한 가운데 ‘유대인-헝가리인 형제’ 의식이 거행됐다. 이 의식에서 헝가리 역사상 처음 시나고그에서 기독교 설교가 진행되기도 했다. 넉 달 뒤인 1861년 4월 8일에는 세체니 다리를 건설한 정치인 세체니 이슈트반, 1894년에는 독립 영웅 코슈트 라요수 기념행사가 열렸다.
헝가리에서 반유대인 정서가 싹트게 된 것은 20세기 초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헝가리민주공화국의 카롤리 미할리 초대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도 채 안 돼 1918년 사임한 게 일의 시작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연정을 이뤄 집권했다. ‘옛 영토 회복’을 선언한 그들은 나라 이름을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으로 바꿨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유대인 정부’로 불렸다. 두 당의 지도자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공산당 당수였고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의 사실상 대통령이었던 쿤 벨라도 유대인이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반혁명 세력을 몰아낸다는 명분을 앞세워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그들은 5개월의 집권 기간 동안 370명을 처형했고 587명을 가두었다. 헝가리 야당과 일부 국민의 마음에는 반유대인 정서가 싹텄다.
공산당, 사회민주당은 지지 청년들을 모아 ‘적군’을 창설했다. 그들은 체코와의 전쟁에서 이겨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영토를 빼앗았다. 문제는 이때 발생했다. 공산당, 사회민주당은 새로 획득한 영토를 헝가리에 복속시키지 않고 슬로바키아소비에트공화국을 새로 만들어 독립시켰다. 젊은이들이 피를 흘린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헝가리 영토는 하나도 늘어나지 않은 셈이었다.
헝가리 야당과 대다수 국민은 공산당, 사회민주당의 행위에 크게 분개했다. 체코와의 전쟁에서 압승을 거뒀던 적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생겼다.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청년들과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청년들이 갈등을 빚었다. 두 당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지도부는 헝가리에 머물 수 없게 됐다. 쿤은 헝가리로 달아났고 다른 지도자들은 지하로 숨었다.
공산당, 사회민주당 연정이 붕괴되자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두 당의 집권기에 피해를 봤던 야당과 일부 군인은 복수극을 시작했다. 2년 뒤인 1921년 새 정부가 들어서 질서를 잡을 때까지 1000여 명이 학살당했고, 1만 5000여 명이 수감됐다. 학살당한 사람 대다수는 유대인이었다.
도하니 시나고그는 이런 아픈 역사 때문에 헝가리 유대인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은 시나고그보다는 문화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클래식 연주회가 자주 열리고 다양한 축제도 진행된다. 도하니 거리 일대에는 아직도 많은 유대인이 산다. 그래서 주변에는 작은 시나고그는 물론 유대인 식당 등 관련 시설이 적지 않다.
도하니 시나고그에서 나와 키랄리 대로와 무제움 대로를 따라 가면 대형 박물관이 나타난다. 헝가리의 역사, 민족주의 독립을 상징하는 헝가리국립박물관이다. 18~19세기 유럽에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조가 몰아닥친 덕분에 유럽 각 나라에서 국립박물관을 짓는 바람이 불었다. 가장 먼저 생긴 것은 1759년 영국의 대영박물관이었다. 1802년 공식 개관한 헝가리국립박물관은 연대로만 보면 유럽에서 세 번째 국립박물관이었다.
헝가리국립박물관의 길을 연 사람은 세체니 페렝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세체니 다리를 건설한 세체니 이슈트반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었다. 세체니 이슈트반은 폭풍 때문에 도나우강을 건너지 못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걸 한탄하면서 강에 최초의 다리를 지었다. 아버지는 헝가리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아들은 부다페스트의 랜드마크를 각각 건설한 셈이다.
세체니 페렝은 1802년 오스트리아제국 황제 프란츠 1세에게 세체니 가문이 소장한 각종 수집품을 국가에 기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헝가리는 이 해를 헝가리국립박물관 창립의 해로 본다. 당시 세체니 가문이 보유한 수집품은 인쇄물 1만 1888점, 수기록물 1156점, 지도와 동판 142점, 금화 2019개 그리고 각종 유물과 미술품이었다. 이 수집품은 헝가리국립박물관 전시품의 첫 토대가 됐다.
세체니 페랭은 처음에는 기증한 수집품을 페스트의 팔로스 수도원에 보관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옛 부다페스트대학교로 옮겼다. 1807년 헝가리 국회는 세체니 페렝의 기증품을 국가재산으로 바꾸는 법을 제정하고 모든 국민에게 국립박물관에 소장할 수집품을 기증하라고 요청했다. 이 덕분에 1831년까지 231명이 많은 수집품을 기증했다.
헝가리 국회는 제대로 된 헝가리국립박물관을 짓기로 하고 예산을 배정했다. 설계는 당시 헝가리 클래식 건축의 대가라는 소리를 듣던 폴락 미하일리가 맡았다. 공사는 1837년에 시작됐고 10년이 지난 1847년에 완공됐다.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던 만큼 헝가리국립박물관은 1848~1849년 헝가리 혁명과 독립전쟁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48년 3월 15일 박물관 앞 광장에 모인 군중은 당시 최고의 시인이었던 페토피 산도르의 선창에 따라 헝가리 국가를 제창했다. 도나우강변에 헝가리 국회의사당이 생기기 전까지 헝가리 국회는 이곳에서 회의를 열었다.
헝가리국립박물관은 어린이를 동반한 여행객에게는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코스다.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처럼 소장품이 엄청나게 방대하고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헝가리 역사는 물론 문화, 사회, 지리 모두를 살펴볼 수 있다. 베토벤이 한때 소장했던 피아노도 이곳에 있다. 베토벤은 1803년 부다페스트를 방문해 연주회를 가졌다.
영어 설명이 부족하고 전시품도 기대에 못 미친다는 사람도 있다. 헝가리가 과거 다른 나라를 침략한 경력이 많은 나라가 아닌 데다 특히 16세기 이후에는 체코,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왜 이곳에 전시품이 부족한지 이해할 수 있다. 직원이 불친절하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지만 여기만 그런 게 아니다. 대체로 헝가리인은 외국인뿐 아니라 자국민에게도 불친절한 편이다.
하루 종일 세체니 다리에서 국회의사당을 거쳐 헝가리국립박물관까지 걷느라 지쳤다. 이제 시원한 음료수와 헝가리 전통음식을 맛보며 잠시 휴식할 시간이다. 박물관 바로 인근에는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나지 바사르차르녹, 즉 중앙대시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영어로는 그레이트 마켓홀이다.
기본적으로 철골 구조물인 중앙 대시장은 헝가리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돌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입구의 돌문은 신고딕 양식이며, 지붕에는 컬러 세라믹이 덮였다.
지하 1층과 지상 2개 층까지 총 3개 층으로 이뤄진 중앙 대시장은 그야말로 큰 시장이다. 대충 보면 기차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기차는 찾을 수 없다. 대시장 안에는 칸막이로 구분된 상점 수백 개가 영업한다. 식품, 의류, 잡화 등 판매하는 제품은 다양하다. 식품류를 파는 1층에는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현지식이 많아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사실 이곳에서 엄청난 헝가리 제품을 살 기대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다른 시장이나 현대식 매장에서도 판매하는 제품인 데다 또 의류, 잡화점에서는 품질 면에서 살 만한 것이 많지 않다. 헝가리 소시지, 헝가리 와인인 토카이 와인, 전통술 등을 사서 숙소에서 맛보는 게 최고다. 단 조심해야 할 것은 상인들이 대체로 불친절하거나 무뚝뚝하고, 가끔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중앙 대시장은 부다페스트의 초대 시장이었던 카로이 카메르마이어가 1873년에 만들었다. 카메르마이어는 시장이 된 직후부터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당시 푀밤 광장으로 불리던 곳에 중앙 대시장을 건설한 것이었다. 그는 또 도로 현대화에 힘을 쏟았고 상수도와 하수도 체계를 정비하는 데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도 알차게 하루 일정을 보냈으니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숙소로 가는 길은 부다페스트 최고 쇼핑 명소인 바치 거리다. 중앙 대시장이 있는 밤하즈 코룻에서 마르키우스 광장을 거쳐 뵈뢰스마르티 광장까지 이어지는 거리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품가게나 식당도 많고, 현지인이 찾아가는 식당이나 의류가게, 잡화점가게도 많다. 길을 따라 걷다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도나우강이 나오는데 그 주변에 고급 식당이 많아 현지인이 많이 찾는다.
혼자 바치 거리를 걷는데 한 여성이 말을 건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런 여성에 대한 정보를 미리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런 여성은 대부분 매매춘을 미끼로 남자를 유혹해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 기다리던 여러 남성에게 시켜 돈을 빼앗는 사기인 경우가 많다. 현지 신문에도 가끔 날 정도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
바치 거리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길이어서 유서 깊은 건물이 많다. 식당, 상점뿐 아니라 성당, 수도원도 여러 곳이다. 들어가 볼 수 있는 곳도 있고, 들어갈 수 없는 곳도 있다. 기회가 된다면 길만 걷지 말고 각 건물에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다.
중앙 대시장에서 가다보면 먼저 바치 거리 47번지에 젠트 미하이 템플롬, 즉 성미카엘교회가 나타난다. 300년 전인 18세기에 도미니카 수도회가 바로크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바로 옆에는 잉글리시 수녀회가 운영하는 수녀원이 있다. 수녀회의 이름은 2003년에 콩그레가티오 예수로 바뀌었다. 지금은 부다페스트 코르비누스대학교와 파논보물교육센터로 사용된다.
바치 거리 9번지 저택은 3층에 창문이 15개 달린 건물인데, ‘일곱 선거인의 집’으로 불린다. 1777~1823년에는 이곳에 호텔이 있었다. 헝가리가 자랑하는 세계적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헝가리 이름 리슈트 페랭)가 열한 살 때 이곳의 볼룸에서 연주회를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은 빅싱하즈라는 코미디 극장으로 사용된다.
마르키우스 광장 앞에는 아주 유서 깊은 성당이 있다. 줄여서 벨바로시성당이라고 불리는 ‘부다페스트-벨바로시 나기볼도가조니 성당’이다.
벨바로시성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1046년이었다고 하니 역사만 해도 1천 년을 넘었다. 성 이슈트반 국왕의 초청을 받아 헝가리에서 포교 활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 겔레르트가 이곳에 묻혔다. 부다 지구의 유명한 명소인 겔레르트 언덕에 이름을 준 바로 그 겔레르트다. 이렇게 유명한 성인이 묻힐 정도이니 성당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벨바로시성당은 14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크문트와 16세기 마차슈 국왕 시절에 증축됐다. 헝가리가 오스만투르크에 점령당했을 때에는 모스크로 바뀌었다. 오늘날에도 남쪽 벽 쪽에 모스크의 기도실이던 미흐랍 흔적이 남았다.
2010년 벨바로시성당 벽을 수리하던 도중 벽 안에서 성모 마리아 벽화가 발견됐다. 손상된 흔적이 전혀 없이 매우 깨끗한 상태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슬람이 성당을 모스크로 바꿀 때 벽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벽으로 에워싼 덕분에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벨바로시성당 바로 앞에는 하얀색 다리가 보인다. 황후 엘리자베트의 이름을 붙인 에르지벳 히드, 즉 엘리자베트 다리다. 사실 처음부터 엘리자베트에게 바치기 위해서 다리를 지은 것은 아니었고, 다리를 지은 다음에 이름만 붙인 것에 불과하다.
에르제벳 다리를 짓게 된 것은 멀리 보면 세체니 다리에서 시작한다. 헝가리 정부는 세체니 이슈트반의 제안에 따라 1849년 세체니 다리를 지었는데 뜻밖에 엄청난 통행료 수입을 챙기게 됐다. 다리를 더 지으면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생각한 헝가리 정부는 1872~1876년 마르깃 다리를 추가로 지었다.
기대한 대로 마르깃 다리를 개통한 이후 다리 통행료 수입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연간 금화 65만 개를 넘을 정도였다. 헝가리 정부는 내친김에 다리를 두 개 더 짓기로 했다. 하나는 중앙 대시장 앞의 세관 광장에서, 다른 하나는 맹세의 광장, 즉 오늘날 마르키우스 광장에서 강을 건너가는 형태로 짓기로 했다. 헝가리 정부는 두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설계 국제공모전을 열었다. 응모작은 세관 광장 다리 21개, 맹세의 광장 다리 53개였다.
먼저 완성한 것은 세관 광장 다리였다. 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돼 개통식은 1896년에 거행됐다. 원래는 세관 광장 다리라는 이름을 붙일 예정이었지만 개통식에 참가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다리 이름을 프란츠 요제프 다리로 바꿨다. 나중에 다시 이름이 바뀌어 지금은 자유의 다리로 불린다.
원래는 맹세의 광장 앞 다리도 세관 광장 다리와 함께 1894년에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부다페스트 국제박람회 때문에 공사는 1897년에야 시작됐다. 1896년 헝가리 건국 1천 주년 기념 부다페스트 국제박람회를 준비하는 바람에 다리 두 개를 동시에 짓기에는 공사 자재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맹세의 광장 다리 공사는 1898년에 시작돼 1903년에야 끝났다. 다리 개통식은 1903년 10월 10일에 열렸다. 다리 이름이 결정된 것은 이날 개통식을 앞두고서였다. 개통 5년 전 암살당한 황후 엘리자베트를 기념하기 위해 다리 이름을 에르지벳 다리로 바꾸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다리를 다 지은 뒤 강 건너편 부다 지구 쪽에는 엘리자베트 동상을 세웠다.
에르지벳 다리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이던 1945년 1월 18일 독일군 폭격으로 무너져 버렸다. 지금 다리는 196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에르지벳 다리는 걸어서 건너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다리 중간 지점에서 도나우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정말 멋지게 나온다. 밤에는 야간조명이 켜지기 때문에 더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갈 때는 다리 위쪽 인도로, 돌아올 때는 아래쪽 인도로 걷는 재미도 있다. 놀랍게도 다리 위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는 사람도 있고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키스하는 연인도 있다. 한마디로 많은 사람이 로망을 즐기는 장소다.
하얀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바치 거리로 들어간다. 바치 거리에도 황후 엘리자베트의 흔적이 있다는 걸 알기에 그걸 보러 가는 것이다.
바치 거리는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가 부다페스트에 가면 즐겨 찾던 곳이었다. 그녀는 바치 거리 13번지에 있는 안탈 알테르에서 쇼핑을 즐겼다. 원래 오스트리아 빈에서 창업한 안탈 알테르는 당시 동유럽에서 패션의 중심지였다. 합스부르크 왕족은 물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귀족 등 상류층 인사는 이곳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안탈 알테르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19세기 작가 리처드 라도는 이 가게를 소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부유층은 물론 중상류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안탈 알테르를 방문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부인인 황후 엘리자베트는 물론이거니와 프로이센 국왕과 왕세자도 이 가게에 자주 들렀다.’
바치 거리 13번지 건물은 현대식으로 고치기는 했지만 아직 남아 있다. 바치 거리와 레기포스타 거리가 만나는 지점의 모퉁이에 선 하얀색 건물이다. 당시 부다페스트에 주거용으로 지은 집 중에서는 최초의 3층 저택이었다.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이지만 수시로 수리하고 리모델링한 덕분에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바치 거리가 끝나는 뵈뢰스마르티 광장에는 황후 엘리자베트가 자주 갔던 카페가 있다. 굳이 황후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유명한 카페 제르보가 바로 그곳이다.
카페 제르보의 역사는 140년에 이른다. 건물은 1858년에 아르누보 양식으로 건설했고 카페가 들어선 것은 1884년이었다.
카페 제르보를 창립한 사람은 스위스 출신의 제과제빵사 에밀 제르보였다. 특히 초콜릿을 만드는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188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사해 카페를 차렸다. 우연히 만난 헝가리 궁정 제과제빵사인 헨릭 쿠글러의 제안을 받아 제과 사업을 동업했다. 쿠글러가 죽은 뒤에는 사업을 모두 물려받았다. 그는 제르보 하우스를 사들인 뒤 ‘제르보-쿠글러의 후계자’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업을 새롭게 시작했다.
제르보 제과점은 공산당이 집권한 1948년 국유화됐다. 제르보라는 이름이 부활한 것은 1984년이었다. 제르보는 1919년 세상을 떠났지만 부다페스트의 유명한 제과제빵 기술자들이 그에게서 배운 기술을 대대로 이어온 덕분에 제르보 카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바치 거리에 쇼핑하러 갈 때마다 꼭 제르보 카페에 들렀다. 시녀가 받쳐준 양산을 쓴 엘리자베트가 제르보 카페에 들어가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 남을 정도였다.
카페 제르보 건물 정면 쪽으로 들어가면 카페가 나온다. 왼쪽 문으로 들어가면 식당이다. 어디로 들어가든 커피와 과자, 케이크를 맛볼 수 있다. 식당에서는 음식을 파는데 맛이 상당하다.
제르보에 혼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한다. 헝가리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나 마실 수 있는 커피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커피를 먼저 받아들인 헝가리에 갔으니 헝가리 커피를 마셔보는 게 좋다.
전통적인 헝가리 커피는 검다는 뜻인 ‘케페테’라고 불린다. ‘카베’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색적인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베치 카베’를 주문하면 된다. 아이스크림, 초콜릿, 거품우유, 거품크림 등을 함께 넣어 주는 커피다. 고전적인 비엔나커피의 헝가리판인 헝가리 멜랑즈도 있다. 독특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보름 가까이 이어진 동유럽 여행은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