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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초연 Oct 19. 2023

삶을 마감하길 원하는 이들에게

소개팅 20분 전에 양재역에서 엉엉 울어버리는 20대 여자는

당신이 갑자기 죽은 후, 그동안 전혀 의견 일치가 되지 않던 친구들이 당신의 사람됨에 대해 동의한다. 실내에 모인 가수들이 예행연습을 하듯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당신은 공정하고 친절했으며 운 좋은 삶을 살았다고. 박자나 화음은 맞지 않지만 그들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진실하다.


다행히 당신은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조문객들이 눈물을 닦으며 줄지어 나가기 시작하면, 왜냐하면 그런 날에는 전통의식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9월의 늦은 오후인데도 햇빛이 놀랍도록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그때 당신은 갑자기 고통스러울 만큼 격렬한 질투를 느낄 것이다.


살아있는 당신의 친구들은 서로 포옹하며 길에 서서 잠시 얘기를 주고받는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저녁 산들바람이 여인들의 스카프를 헝클어뜨린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운 좋은 삶'의 의미이므로.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므로.


애도, 루이스 글릭.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칠흑 같은 어둠이 낮이든 밤이든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어둠이 나의 정신까지 스며들어 나를 내려놓게 만든다. 지쳤다. 그게 뭐 어때서. 슬프다. 집안에서 혼자 퍼부어 우는 게 이상해? 마구 웃는 건 안 이상하잖아. 같은 거지, 뭐.


언제는 한 번, 시소 같은 삶에 혼자 균형을 맞추기 어려워 사랑하는 사람을 한 명, 구하고 싶은 마음에, 소개팅을 나갔다. 나를 차로 데리러 온다는 그의 말에 "네!"하고, 밝은 목소리로 음성을 내뱉었지만, 나는 지하철 출구 앞에서 털썩 앉아버리고 말았다. 두 달간 지속되는 야근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나의 기획안들. 여러 명의 결재자들이 나의 앞을 막아, 망망대해를 수영으로 건너고 있을 쯤이었다.


사람들의 시선? 그런 게 중요했던 건 이미 지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소개팅까지 20분이 남은 그 시점에 울어버려 얼굴과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다시 햅틱으로 울리는 애플워치의 진동에 한숨을 뱉으며 일어나는 나의 모순된 상황.


유월이었다.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나를 감쌌다. 방금까지 울었던 나의 좌초된 모습들이 느티나무의 흔들림과 저녁임에도 잎들 사이로 가로지르는 햇빛의 부서짐이 오분 전의 나의 무너짐을 잊게 했다. 소개팅남과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두 시간 전에 난 분명, 신분당선 양재역 앞에서 많은 인구이동이 있는 그곳에서 무너져 내렸지만, 다시금 모르는 사람과 밥을 먹으며 웃고 있었다.


나의 눈물이 거짓된 것인가? 아니, 그건 진실하고, 진지했다. 다행히 나는, 감정에 수긍했고, 직면해서, 웃음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음 상황으로 넘어가듯, 울음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달간의 상황으로 다음에 이어질 미세한 희망과 다른 이들이 누리는 삶의 행복을 끊어버릴 건가.


매일 웃을 수 있듯, 매일 울 수도 있다. 우는 만큼 웃 듯, 오래된 울음이 위선적인 웃음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게 되면서, 아니, 일생의 시작부터, 울고, 웃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아파하고, 다시 설레고, 무뎌지기를 반복하지만, 이 감정의 무한 굴레를 끊어버릴 수 없지만, 그 일생에서 누군가가 있다면, 그 인생에는 구원이 있다. 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 해도. 진심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부모건, 친구건, 연인이건, 직장동료이건, 자식이건, 모르는 연예인이건.


습기 없는 햇빛의 직사광선이 내 피부에 닿고, 서늘한 바람이 나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는 그날에 그 사람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건너갈 수 있는 행복을 놓치지 말자. 순간의 결심이 삶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 대한 무궁한 질투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웃는 만큼, 울어버리고, 울어버린 만큼, 웃어버리자. 바로 이것이, '복이 있는 주어진 삶'이므로. 즐거운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면서, 오늘이 시작되고 내 할 일을 시도하자.



청춘으로 우울이 강요받지 않기를,

도덕적인 잣대를 원초적인 감정에 밀어넣지 않기를,

울음이 공론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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