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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헬 Jul 13. 2022

산들 버들 봄들

산들이는 과묵했다. 새끼들을 떠나보내고 앞으로 제 생에 자식은 없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때 되면 밥 먹고 낮잠 자고 동네 담장과 지붕 위로 산책을 다니고 나름의 리듬대로 조용한 생활을 이어갔다. 으레 고양이가 낼 법한 야옹, 아웅, 미야우, 소리는 웬만하면 내지 않았다. 정말로 있는 듯 없는 듯한 고양이였다. 길고양이 생활로 단련된, 산전수전 다 겪은 고양이의 어떤 무게 같은 게 산들이한테는 있었다.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한 동물 친구가 생기자 고양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만들기도 하고 사 오기도 했지만 정작 산들이는 눈앞에서 공을 굴리고 낚싯대를 흔들어 대도 끔벅끔벅 쳐다만 볼 뿐 관심이 없었다. 


산들이가 버들이와 봄들이를 들인 건 그래서였을지 모른다. 

물론 밥이 좀 남기도 했고 손바닥 만한 마당이지만 혼자 접수하긴 좀 아깝기도 했을 터다. 그러나 흥분한 초보 집사들을 홀로 감당하긴 버거웠던 모양이라고, 같은 아줌마인 나는 생각한다. 

둘은 한 달 간격으로 산들이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왔다. 둘 다 보자마자 이름이 떠올라서 이번엔 보자마자 이름으로 불러 주었다(녀석들은 4년이 지난 지금도 자기들 이름을 모르지만). 


버들이는 산들이의 무능한 (전) 남편, 봄들이는 산들이가 낳았던 새끼 중 제일 넉살 좋던 '그놈'일 거라고, 우리는 추측했다. 버들이는 스트릿 출신 답지 않게 사냥엔 젬병인 데다 산들이 앞에서 유난히 주눅 든 모습이었다. 캣초딩 사이즈의 봄들이는 냉랭한 산들이와 눈치만 보는 버들이 사이에서 마냥 해맑게 이쪽저쪽 장난질을 멈추지 않았다. 실제로 봄들이는 산들이 새끼들 중 마당에 혼자 나와 노는 시간이 유난히 길던 그 녀석을 영락없이 닮았다.


추측만 하던 세 녀석의 관계가 빼도 박도 못하게 확실해진 건 버들이와 봄들이가 TNR을 하던 날이었다. 산들이는 한 번 겪은 일이라 포획틀 근처는 가지도 않았지만, 버들이와 봄들이는 설치한 지 십 분도 되지 않아서 각각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닭고기 통조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챙, 챙, 포획틀 문이 닫히자 버들이와 봄들이보다 놀란 건 산들이었다. 산들이는 먼저 갇힌 버들이한테 가서 좀 우는 듯하다가 봄들이 앞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울음의 크기와 정도가 달랐다. 버들이한테 가서는 아웅, 하고 몇 번 울더니 등을 돌렸다. 어쩌겠어, 좀 있음 나올 거야 알아서 참아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봄들이한테는 아니었다. 아웅과 아웅의 간격이 매우 짧고 애처로웠다.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파르르 떨며 포획틀 주변을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렸다. 어떡해, 거기 들어가면 정말 아픈데 네가 그걸 겪어야 하다니 어쩌면 좋아, 이런 얼굴이었다.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들이는 삼식(三食)이 남편, 봄들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 산들이는 그 둘을 거느린 억척 어멈.


영역 동물이라는 고양이가 왜 둘도 아니고 셋씩이나 같이 다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셋은 TNR 이후 아픔을 공유하고 살짝, 아주 살짝 더 돈독해진 것 같았다. 


산들이는 그날 이후로 밥 먹는 버들이를 조금 더 측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가끔 자기 밥을 남겨 주기도 했다. 새라도 잡아 오는 날이면 일단 자기가 먹은 뒤 버들이한테 먼저 남은 부분을 먹게 한다. 아들내미 데리고 큰일 치르고 왔으니 대접은 하마, 하는 눈으로. 버들이는 사냥은 못하지만 내 식구 밥은 내가 챙긴다는 사명감을 장착했는지 밥때가 되면 염치 불문하고 거실 문 앞에서 니야옹, 앙칼진 울음을 운다. 줄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노라는 집념이 느껴지는 소리로. 봄들이는 더 둥글둥글해졌다. 과묵한 엄마와 무능한 아빠 사이에서 나라도 밥값 해야지 싶은 건지 메인 집사 작은율이 보이면 배를 보이며 벌러덩 드러눕기 시작했다. 봄들이가 배도 내어 주는 개냥이 소리를 들으며 게으른 재롱을 부리면, 산들이와 버들이는 오늘도 이렇게 밥은 먹었구나 하는 얼굴로 데면데면 각자 낮잠을 청한다. 둘은 추우면 어쩔 수 없이 붙어 눕기도 하지만 주로 떨어져 잔다. 재롱이 끝난 봄들이는 둘 중 산들이한테 붙는 편이다. 집안의 실세를 안다.


고양이 셋은 그렇게 가족이 됐다. 사람 넷 집사를 거느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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