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아이들에게 고양이 가족 얘기를 비밀로 했던 건, 동물과 함께 사는 데 따르는 책임을 우리가 과연 다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앙상한 어미와 솜털 보송한 새끼들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우리 가족과 고양이 가족은 서로 모른척하고 살아갈 수 없는 사이가 될 터였다.
어릴 때 우리 집에는 동물이 많았다. 꿈꾸지 못한 이십 대를 보내고 서른 언저리에 겨우 꿈이란 걸 갖게 됐지만, 자식이 둘이 되자 결국 낙향을 택한 내 부모는 시골 작은 마을에서 여러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무수한 어미를 기르고 무수한 새끼를 받았다. 그들은 몸 푼 뒤 기력을 잃은 어미를 위해 뼛국을 끓였고, 손으로 어미의 가슴을 문질러가며 젖 길을 텄으며, 약하게 태어난 새끼의 체온을 올리느라 아랫목 이불 밑에 새끼의 잠자리를 마련했다. 우리 집에는 네 식구 외에도 숨 쉬는 생명이 너무 많아서 그중 하나가 다칠까, 아플까, 죽을까를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방바닥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못 보는 양반들이 그 시절엔 어떻게 동물을 길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들이 동물과 살았던 흔적은 동물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부담으로 남아 있다. 언제 아프고 죽을지 모르는 생명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을 버겁게 느낀다. '반려' 동물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예쁘고 귀여운 게 문제가 아니다. 같이 살면 책임질 사이가 되는 것이다.
가볍든 무겁든.
그러나 고양이.라는 말을 참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진으로 학교에 안 간 율들은 집에 있었고, 나는 어미한테 밥을 줘야 했으니까.
그리고 율들한테는 예쁘고 귀여운 것도 조금은 문제일 수 있으니까.
'책임'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장기적인 책임은 어차피 고양이 가족이 계속 우리 집에 있을 때의 얘기니 내 맘대로만 되는 게 아닐 터,
일단 우리 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다 같이 예뻐하고 귀여워하며 먹이자 싶었다.
지금은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