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드로잉 원데이 클래스
대학생의 로망으로 불리는 유럽 한 달 여행을 다녀온 게 벌써 3년 전이다. 대학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로 꼬박 모은 천만 원을 들고 갔던 첫 유럽. 전체 35일 일정이었던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배낭을 메고 3일마다 나라를 옮겨 다녔으니, 참으로 부지런한 여행자였다.
아시아가 아닌 대륙은 처음이었고, 왜인지 가는 곳마다 한국인 여행자도 많지 않았다. 걷는 발걸음마다 새롭고 신기한,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미술관, 박물관, 성당, 온갖 명소를 많이 다녔는데 수많은 작품보다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여유롭게 앉아 눈앞에 보이는 여행의 순간을 그림으로 담는 장면이다.
‘언젠가는 나도 꼭. 사진 말고 그림으로 내가 본 걸 기억하고 싶다!’하는 동경이 일었고, 펜 드로잉 클래스를 신청한 것도 순전히 그 이유다. 팬데믹이 끝나고 다시 해외여행 길이 열리면 그때는 꼭 그림으로 여행지를 담아보고 싶어서.
자녀의 의견을 전폭 지지하고 원한다면 무엇이든 도전하게 하는 부모님 덕분에 어려서부터 다양하게 배웠다. 국어, 수학, 영어 따위를 가르치는 학원에 다닌 기간은 다 합쳐봐야 일 년이 겨우 되려나. 학교 공부와 관련되지 않은 피아노, 영어, 컴퓨터, 댄스 등을 배우는 데 방과후를 보냈고, 미술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배웠던 것 중에 가장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던 게 미술이었다. 미술은 아무리 배워도 자타공인 ‘똥손’ 타이틀을 벗어날 수가 없어 그만뒀다. 하지만 하고 싶은 건 다 가르쳐줬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고 싶은 사람이 됐다. 성인이 되어서 그린 그림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있었다.
사진을 보고 규격을 나누고, 보이는 큰 윤곽부터 스케치를 시작했다. 연필을 쥔 쪽의 손날이 연필 흑심의 색을 닮아가면서 스케치를 마쳤다. 건물과 하늘이 구분되는 실루엣부터 기와지붕의 기왓장 결을 하나하나 살려 그리고, 자잘한 정원의 풀까지 스케치했다.
연필 스케치 다음은 펜으로 라인을 딸 차례였다. 펜 드로잉이라고 해서 바로 펜으로 그리는 건 아니었다 역시. 스케치를 마쳤으니 바른 자세로 앉아서 라인만 따라 그리면 될 일인데, 라인 드로잉이 끝나고 고개를 드니 등허리가 저릿했다. 집중한 탓인지 곧장 도화지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그린 탓이었다.
라인 드로잉까지 마치고는 가볍게 채색을 했다. ‘펜 드로잉’이 중점인 작품이기 때문에 도화지 전체를 채색하진 않는다. 포인트가 되는 부분에만 물감으로, 색연필로 색을 입혀 생동감을 더했다.
결과물은 120% 만족스러웠다. 허리 통증과 맞바꾼 그림은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들었다. 초보가 그리기에 적합한 사진을 고르느라 사진 속 여행지는 그렇게 좋아한 곳은 아니었는데, 손끝에서 재현된 여행지 풍경이 아주 좋았던 여행으로 기억 일부를 미화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마루에서 풍경을 바라봤던 그곳에 다시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잘 그리진 못해도 작은 그림 하나에 3시간을 쉬지 않고 몰두한 스스로가 대견했다. 곧 다시 떠날 수 있는 해외여행에서 작은 그림 하나를 남겨 올 수 있을까, 그만큼의 여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이런 상상으로 행복하게 클래스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