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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오라기 Dec 29. 2020

넷플릭스 <1922> 지극히 스티븐 킹갓제너럴적인 영화

삼다수도 고인물이에요


*본문에 영화 줄거리 30% 가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넷플릭스의 작품 추천 방식은 철저히 사용자를 중심으로 한다. 우리가 매일 습관적으로 열어보는 화면 너머에서는 물밑에서 열심히 발장구를 치는 오리처럼 복잡한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중이다.

검색 서비스를 통해 그 노력을 구경할 수 있는데, 일례로 어떤 배우를 검색하면 그 배우의 출연작 혹은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연달아 보여준다. ‘송강호’를 검색하면 <변호인>은 물론이고 <신세계>나 <범죄와의 전쟁>같은 느와르 영화들도 함께 노출된다. 넷플릭스에 없는 작품을 검색했을 때는 최대한 관련 있거나 혹은 요청한 사람이 관심있을  같은 프로그램을  하나라도 찾아다 주려고 열심이다. ‘기생충’을 검색해 보면 <살아있다>나 <킹덤>, <범죄도시>등의 작품이 함께 나오고, <섹스앤더시티>를 검색하면 같은 제작자의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비롯해 <프렌즈>나 <가십걸>같은 류의 드라마를 같이 알려주는 식이다.

때문에 넷플릭스를 가장 잘 이용하는 방법은 결국  방식대로 넷플릭스를 많이 이용하는 이다. 넷플릭스는 여러분들에게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열심히 보고 찜하고 평가하다 보면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취향저격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필자의 경우는 어느 날 앱을 열자마자 넷플릭스로부터 느닷없이 영화 <1922> 추천을 받고 약간 운명 비슷한 것을 느꼈다.


<1922>는 공포소설의 대가인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잭 힐디치가 제작한 영화다. 스티븐 킹은 단편과 장편을 막론하고 상당한 수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대부분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대중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드라마와 영화 등 영상화를 거친 작품들에 대한 반응도 좋다. 그런 스티븐 킹의 영화 또한 넷플릭스에서는 이제 막 데뷔하는 신인 작가 혹은 감독의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평등하게 경쟁 중이다. 스티븐 킹의 팬을 자처하는 나조차 초반 얼마쯤을 보고 나서야 <1922>가 스티븐 킹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정도로 사전 정보가 없었으니 말이다.

스티븐 킹 작품의 매력은 견고한 건축에 있다. 글의 배경은 대부분 현실 세계, 특히 미국의 몇몇 주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등장 인물도 어디나 있을 법한 특징을 갖는다. 매일같은 일상과 평범한 주변 환경이 무언가를 계기로 조금씩 일그러져 가다 나중에는 완전한 비극의 퍼즐로서 공포를 완성한다. <1922>또한 이런 매력을 훌륭하게 연출해서, 공포영화지만 공포영화 특유의 점프 스케어(갑작시리 뭐가 확 튀어나와서 놀라게 하는 거) 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거의라기 보다, 점프 스케어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필자가 하는 말이지만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역시 스티븐 킹의 작품이 그렇듯이, 무섭다.



저 윌프레드 제임스는 죄를 자백합니다.

라는 주인공의 편지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는 네브래스카 주 헤밍포드 홈이라는 곳에서 아내 알렛, 아들 헨리 세 식구와 함께 살고 있는 농부다. 구글 얘기로는 네브래스카 헤밍포드를 검색하면 2010년 기준 인구가 800명이라니까 영화의 배경인 1922년에는 시골 of 시골 of 시골이었던 셈이다. 옆집 저녁 반찬까지 알 정도로 서로의 사정에 뻔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사실을 숨기고자 하면 또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폐쇄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1922년 어느 날, 윌프레드는 1시간 30분짜리 영화가 시작된 뒤 20분 만에 아들과 함께 아내를 잔인하게 죽여 우물에 던진다.

 윌프레드는 평생을 땅을 일구는 데 몸바쳐 살아온 인물이다. 아들까지 끌어들여 아내를 죽이게 된 이유도 땅 때문이다. 윌프레드와 달리 아내는 가진 땅을 모두 팔아 도시로 나가고 싶어했으며 시골 생활이 지긋지긋하다고 폄하한다. 그게 사람을 죽일 이유가 될까 싶지만 세상 물정 같은 것은 전혀 모른 채 농부로서 살며 ‘여기서 이대로 살다 죽는 것’을 누구보다 강렬하게 열망하는 윌프레드에게는 생명의 위협처럼 느껴졌던 셈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합심해서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사람을 죽인 뒤 시신을 감추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살해 현장을 밤을 새워 가며 온힘을 다해 열심히 청소하는 기괴한 모습이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데는 주인공 윌프레드의 역할이 크다. 아내를 죽인 뒤에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태연하게 자신도 아내의 행방을 모르겠다고 답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들에게도 끊임없이 합리화를 시도한다. 이미 아내의 죽음을 알고 있는 우리만큼 아들 또한 그런 윌프레드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고 결국 갈등을 일으키면서 간신히 이어 붙인 윌프레드의 삶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한다.



신은 선한 일을 보상하고, 사탄은 악한 일을 보상한다

는 말을 중얼거리며 윌프레드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우물 밑바닥에서 잠들어 있는 아내처럼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 있던 끈적끈적한 죄책감이 싹을 틔우며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불안한 예감들이 하나같이 현실이 되고 미처 알지 못했던 곳에서도 불행이 창틈을 파고드는 빗물처럼 스며들어 온다. 이 과정을 무리 없이 담담하게 묘사하는 연출에서 피와 살이 튀기고 소름끼치는 귀신이 얼굴을 들이미는 장면은 없다. 그보다는 윌프레드의 삶과 그 자신의 내면이 완전히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데에서 오는 비극이 매우 인상적이다. 더불어 왠지 내가 20세기 초 미국 남부 어딘가에서 오버올에 체크남방을 걸치고 파이프 담배를 뻐끔거리는 토마스 아무개 같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배경 묘사도 훌륭하다.

공포의 머리와 꼬리는 사실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일상을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비일상이 닥치고 비극적인 끝맺음이 예고된다. 문제는 몸통이다.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주인공들이야 당연히 무섭고 이게 뭔 일인가 싶겠지만 보는 우리가 그 감정에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많은 영화들이 앞서 말했던 점프 스케어 같은 반칙적 장치를 써서 우리에게 무섭지? 무섭다고 말해! 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하게 된다. <1922>에는 그런 돌팔이 약장수는 없다.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잘 짜여진 시나리오와 복선, 이를 완성해 주는 심리 묘사다. 영화 초반 갑작스런 살인 사건에 놀랐던 우리는 점차적으로 순진하리만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윌프레드를 알아가고, 그에게 닥치는 불행에 충격을 받으며 감상을 이어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윌프레드를 이해하고 동정해야 한다는 합리화를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영화의 장점이다.

<1922>는 스티븐 킹의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작품이다. 마음에 드는 의자에 앉아 햇볕을 받으며 정교하게 설계된 소설에  푹 빠지는 느낌을 1시간 30분 정도 즐기고 싶다면 추천한다. 평등한 공간을 차지하고 늘어서 있는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도 <1922>는 결국 스스로 역량을 입증한다. 고인물은 썩지만 고여 있는 1++급 청정수도 존재하는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스티븐 킹의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제럴드의 게임>과 <높은 풀 속에서> 또한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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