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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루 김신영 Feb 08. 2024

사십 대, 무릎이 오그라들다

대학강의를 시작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가 났다. 천안 호서대에서 서울 신림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 내비게이션도 없어 우물쭈물 신림동의 입구를 찾다가 그만 길을 잘못 들었다.


지방대에서 강의하고 돌아오는 길, 국도는 자주 멈추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서울로 가고 있었다. 서울 근교 안양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유턴을 하여 다시 길을 바로 잡아야 하였다. 안양의 경인 제2순환도로 아래에서 신호를 대기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좌회전 신호가 들어와 있어 좌회전을 했다. 왕복 8차선 도로였다. 그때 고속도로에서 내리 쏘면서 내려오던 그랜져가 옆면을 세게 부딪쳐 차가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차와 함께 돌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되는 거지? 혹시 내가 많이 다치나? 죽는 건가. 그러면서도 핸들은 놓지 않았고 브레이크를 꼭 밟고 있었다. 바퀴에서 연기가 나고 고무 타는 냄새가 났다.


큰 사고가 나면 기억은 흔히 왜곡된다. 아니 기억이 왜곡을 부른다. 분명 나는 신호를 지켰는데 이건 상대가 잘못한 것이라 확신하면서 유리를 내리고 있었다. 내 차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나저나 상대는 누구지 이렇게 사거리 8차선 도로에서 80킬로로 달려오다니.. 내 짐작에 그는 80킬로로 내리쏘고 있었다.


이윽고 완전히 차가 멈추고 사람이 뛰어왔다. 그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자기차로 돌아갔다. 자기차를 보면서 뜨악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차는 범퍼가 찌그러져 있었고, 이윽고 나도 내려서 내 차의 상태를 살폈다. 차의 왼쪽 옆구리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었다. 저것이 오른쪽이었다면 나는...


나는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시간이 정지했다.  차가 완전히 박살난 상태였다. 잠시 후 나도 보험회사에 전화를 했다. 그곳이 신호위반 교통사고가 많이 나고 분쟁이 잦은 지역이라고 했다. 정부의 모처에서 근무하던 상대 차량의 보험회사에서 먼저 나와 상황을 접수했다. 내 보험회사는 늦게 나타나 수동적으로 사건을 접수했다.


경찰도 왔다. 택시기사가 지나가면서 저 양반이 신호위반이네 하고 그를 지목하면서 지나갔다. 이런 교통사고가 처음이라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택시기사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목격자다. 그때 나는 당연히 내가 잘못이 없다고 여겨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점은 내내 나를 힘들게 하였다. 내심 내가 잘못했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과속으로 고속도로에서 내려온 그놈은 자기는 신호를 지켰다고 약아빠지고 교활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 순간 교통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상황을 예측하고 내려 쏜 것이었으리라. 8차선 도로에서 황색 신호는 무용지물인 경우라 하겠다. 내가 신호를 받아 좌회전을 하는 동안 신호가 녹색에서 황색으로 그리고 적색으로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이른바 막신호를 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목격자는 많았을 테지만 증인이 되어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현수막을 붙였다

00 사거리에서 000년 0월 0일 0시에 00차와 00차의 사고를  목격하신 분은 경찰서로 제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격했다던 택시기사도 연락이 없었다.


교통사고 과학연구소에서 실험을 했다. 나와 상대편 둘 다 신호를 지켰다고 하니 시뮬레이션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그곳에서 그런 사고가 여러 번 일어나 내 사건 이후 신호체계를 바꾸었다고 한다. 사실 그 점도 내가 반박할 요소였으나 나는 그때 너무 연약했다. 내가 당연히 잘못이 없다고 여기며 설사 둘 다 신호를 지켰다면 내가 우선권이 있다고 믿었다. 먼저 진입한 자가 우선이니까 상대는 천천히 살피면서 속도를 줄여 진입해야 한다.


그 사고로 병원에 가야 했다. 갑자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차츰 다리가 계단 오르내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계단을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이 무릎이 오그라들었다. 강단에 항상 서 있어야 하니 무릎에 상처가 가장 먼저 생긴 것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학원에서부터 대학강단에 이르기까지 그때 벌써 20여 년을 서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종로학원, 대성학원에서 강의했다. 대성학원은 선생님은 그야말로 신적 존재다. 숙제를 내줬는데 안 해온 학생이 벌벌 떨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었다. 수학 숙제가 많아 그랬다고 했다. 그 학생은 내 눈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까지 흘릴 기세였다. 나는 신처럼 그 학생에게 잘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용서해 주었다.


홍익대에서는 반장이 스승의 날에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복도 저 끝에서 교수님! 하면서 달려왔다. 다른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는 내게 꽃을 바치면서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강의가 재미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라는 것은 의미와 가치를 말한다. 내가 수업 시간에 가치와 의미를 주려고 노력했던 탓이다.


삼육대에서는 학생들이 내게 팔짱을 끼기도 했다. '교수님 내 거!' 하면서 학생들은 깔깔거렸다. 그해 강의평가에도 똑같은 말이 올라와 나를 웃게 했다. 건방진 놈이.. 다른 학생들의 평가도 좋았다. 최고의 강의였다고 하기도 하고 다시 꼭 들을 거라고도 하고 그렇게 인기 있는 대학강사였으나 다음 해 나는 잘렸다. 학교 방침인지 뭔지 특별한 잘못도 없이 다시 그 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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