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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Jun 06. 2024

언젠간 곰팡이 핀 딱딱한 수도원 빵을 먹어볼 수 있을까

우천염천 - 무라카미 하루키(명상)  ●●●●●●●◐○○


그곳의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조용하고, 농밀한 확신을 갖고 살고 있었다.
고양이조차 곰팡이가 핀 빵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저녁식사 또한 지독했다. 우선 빵, 정말 말도 안되는 빵이다. 언제 만들었지는 모르겠지만 돌처럼 딱딱한데다가 한쪽에는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그것을 세면대에 넣고 수돗물로 불린다. 그 다음에 그것을 체에 받쳐 물기를 빼고 주는 것이다. 물에 불려주는 것이 친절하지 않느냐고 한다면 대꾸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그것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리고 차갑게 식은 콩 수프. 거기에 식초를 듬뿍 쳐서 내놓는다. "식초 넣으면 힘이 난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맛은 엉망진창이 된다. 그리고 황토벽처럼 바스러지는 페타 치즈. 내가 태어나서 먹어 본 페타 치즈 중에서 제일 짰다. 보기만 해도 얼굴이 돌아갈 정도로 짜다. 고혈압 환자에게 이것을 먹인다면 그 자리에서 경련을 일으키다 죽을지도 모른다. 

                                                                                                                                    - p. 109. 캅소카리비아




   . '팔월에 아내를 남겨두고 나는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로마에서 발칸 반도, 소아시아로 향한다. 신초샤의 잡지를 위하여, 아토스 산과 터키 취재 기사를 쓰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부 한달 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나와 카메라 담당 마쓰무라 군과, 편집자 O군과 아토스 반도의 험준한 산 사이를 비를 맞으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돌고, 그 다음은 마쓰무라 군과 둘이서 미쓰비시 파젤로를 타고 한 달을 터키의 깊은 산골까지 돌아다녔다. 실로 많은 일을 경험하였고, 육체적으로는 몹시 터프한 여행이었지만, 덕분에 몸을 한계점까지 소모할 수 있어서 기분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 먼 북소리, p. 306.   


   . 1986년 가을부터 1989년 여름까지의 유럽생활을 다룬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다보면 1988년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루키는 이 시기에 대해 88년 초반에는 '댄스댄스댄스'를 쓰느라 온 힘을 기울였고, 완성하고 난 뒤 한동안 멍한 허탈감에 빠져 있다가, 그 상태로 출간 작업을 위해 일본으로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노르웨이의 숲'이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어서 혼란에 빠졌다고 이야기한다(참고로 노르웨이의 숲은 1987년, 댄스댄스댄스는 1988년에 쓰여졌다. 두 책에 대해서는 기존에 리뷰가 되어있으니 참고를^^;)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준히 번역을 하던 가운데 잡지의 의뢰를 받아 아토스와 터키 여행을 떠난 게 1988년의 일이고, 이때의 여행 이야기를 잡지에 연재했다가 책으로 묶어낸 게 이 '우천염천'이다. 하지만 장기체류를 다룬 먼 북소리와, 한 달 여의 짤막한(?) 여행을 다룬 우천염천은 그 느낌에 있어서 상당히 다르다. 


   . 우선 우천염천은 잡지에 연재한 글답게 상당히 행적에 충실하다. 아토스 반도를 걸어서 일주하자 - 그것도 3박 4일 안에. 터키의 외곽을 차로 여행하자 - 유럽에서 출발해서 아나톨리아를 돌아 흑해까지 같은 여행 목적이 뚜렷하고, 카메라맨은 물론 아토스 반도에서는 편집자까지 동행한다. 특히나 아토스 반도 여행기에는 3박 4일 동안 들른 수도원의 이름이 하나하나 나와있는 건 물론이고, 계속 바뀌는 날씨에 수도원에서 먹은 음식까지 이런저런 정보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챕터 하나에 한 달이 후딱 흘러가고 챕터와 챕터 사이에서 몇 달이 훌쩍 지나가버리던 먼북소리와는 달리 농밀하고 상세하다. 이 책을 그대로 가서 여행책자로 써도 될 정도다. 


   . 행적 뿐만 아니라 3박 4일 동안 하루키가 느낀 것과 생각한 것들 역시 하나도 남김없이 짜내어져 꽉꽉 눌러담아져 있다. 수도원마다 나오는 지독히도 달콤한 그리스 커피에 어마어마하게 센 독주라는 우조, '이가 빠지고 턱이 근질근질해질 정도로' 달다는 젤리과자 루크미를 먹으면서 진저리를 치다가도 험한 산길을 걷느라 녹초가 되어 어서 다음 수도원으로 가서 루크미를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수도원에서 바로 수확한 토마토와 올리브를 먹으며 감탄하기도 한다. 반대로 곰팡이가 핀 돌 같은 빵을 물에 불려서 간신히 먹고 식초를 잔뜩 친 콩수프에 진저리를 치다가도 여행의 끝에서는 그 빵과 식초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수도원에 도착하자 우선 담당 수도승이 그리스 커피와 물로 희석한 우조, 그리고 루크미라는 달콤한 젤리과자로 맞이해주었다. 어느 수도원에 가더라도 이 루크미라는 과자가 반드시 나온다. 이 과자는 정말 이가 빠지고 턱이 근질근질해질 정도로 달다. 물론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기 때문에 각 수도원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지독하게 달다는 사실만은 공통점이다. 

                                                                                                             - p. 35. 카리에에서 스타브로니키타로 


   카라칼르에서는 커피와 바닐라 물이 나온다. 바닐라 물은 물을 담은 컵에 바닐라 덩어리를 풍덩 집어넣은 것이다. 바닐라가 물에 녹아 달콤해진다. 우선 물을 마시고 난 뒤 스푼으로 바닐라를 떠먹는다. 정말이지 터무니없이 달아 나로서는 도저히 손이 가지 않는다. 벌이 냄새를 맡고 날아와 잔의 주변에 달라붙어 물을 핥고 있다. 그 정도로 단 것이다. 

                                                                                                                                  - p. 56. 카라칼르 수도원


   식사가 끝날 무렵 수박을 올려놓은 접시가 나왔다.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를 먹나보다, 라며 O씨가 수박을 한 입 입에 넣었을 때 기도가 끝났다. 그리고 O씨가 다시 수박을 먹으려고 하자 순례자 아저씨가 그를 노려보면서 "안 돼!"라고 말했다. 그렇게 O씨는 자신의 생일임에도 수박을 한입밖에 먹을 수 없었다. "맛있었는데 말이죠." 라며 그는 분하듯이 말했다. 기도가 끝나는 타이밍과 디저트가 나오는 타이밍이 너무 가까웠던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수도승들에게 익숙한 모양인지 그 간격을 틈타 모두 차분하게 수박을 다 먹고 있었다. 과연 프로들이다. 감동스러웠다. 

                                                                                                                                      - p. 77. 라브레 수도원




   . 이러니 올레길조차 거의 걸어보지 않은 나조차도 읽고 나서는 아토스 일주를 한 번 해볼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물론 도보여행이라면 역시 산티아고겠지만 어차피 산티아고는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두어달을 들여 완주할 기회가 없을테고, 지금도 이런 몹쓸 몸(^^;)인데 은퇴하고 노인이 되어 산티아고로 떠나봐야 완주할 가능성도 그닥. 대신 3박 4일의 아토스 일주라면 해볼만하지 않을까. 사람을 솔깃하게 만드는 책이다. 



   p.s. 아. 뒤에 실려 있는 터키편은 A에서 B, B에서 C, 그리고 D, E, F 하는 식으로 계속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는 고생담인데, 그 사이사이에 변방 수비대에게 가라데를 가르치거나 쿠르드 반군을 만난 이야기들이 재미있긴 했지만, 나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았다. :)




   나는 처음에 쓴 것처럼 종교적인 관심이라고는 거의 없는 인간이고 그렇게 쉽사리 뭔가에 감동을 하지 않는, 굳이 말하자면 회의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아토스의 길에서 만난 야생동물처럼 지저분한 수도승으로부터 "마음을 바꿔서 정교로 개종을 한 뒤에 오시게." 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상황을 이상하게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마 그것은 종교 운운하기보다 인간이 사는 방법에 대한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믿음이라는 점에서 전세계를 뒤져봐도 아토스처럼 농밀한 확신에 가득 찬 땅은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의심할 구석이 없는 확신에 가득 찬 진짜 세상 그 자체인 것이다. 캅소카리비아의 그 고양이에게 곰팡이가 핀 빵은 세상에서 제일 현실적인 것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p. 109. 캅소카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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