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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Jun 17. 2024

지식인이자 투사로, 에코의 마지막 이야기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 움베르트 에코  ●●●●●●○○○○


비밀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힘은 그것을 숨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밀이 있다고 우리가 믿게 하는데서 나온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to'와 'for'를 숫자 '2'와 '4'로 표기하고, 이탈리아에서는 'Ti sei perduto(길을 잃었니?)'를 'T 6 xduto?'라고 쓴다. 이런 것들을 보고 기성세대가 푸념한다면 그건 우리 선조들도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많은 단어를 보면 경악하리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gioja'를 'gioia'로 쓰고, 'io aveva'를 'io avevo'라고 쓴다. 중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만일 중세 신학자들이 'respondeo dicendum quod(이상의 것에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라고 쓴 것을 보면 키케로 같은 사람은 아마 기가 막혔을 것이다. 

                                                                                                                - p. 210. 아름다운 필체에 대한 단상




   . 움베르트 에코의 노년은 펜과 풍자라는 그가 가진 최대의 무기를 총동원해서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 대항하는데 오롯이 바쳐졌다. 케이블은 물론 지상파 방송국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언론 재벌 베를루스코니는 자기 소유의 방송과 신문을 총동원해 세 차례에 걸쳐 총리에 당선되었고, 그 결과 이탈리아는 그의 부정부패와 스캔들, 무솔리니 찬양, 경제정책의 실패 등으로 인해 다른 남유럽 국가들과 함께 'PIGS'의 일원으로 불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에코는 방송을 장악한 베를루스코니에 맞서 출판과 기고를 통해 그를 필사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했는데, 그래서 에코가 90-00년대에 쓴 에세이를 보면 정치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 다행히 2010년대에 들어 베를루스코니 정권은 경제 침체와 연달아 터진 스캔들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고, 베를루스코니 본인도 재임기간 중의 범죄로 재판을 받아야 될 정도로 몰락했다. 에코가 죽은 후 베를루스코니가 어느 정도 정치적 재기에 성공하긴 했지만 다시 정권을 잡지는 못했고, 더 다행히도(?) 에코는 그가 정치계에 복귀하기 전에 별세했기 때문에 숙원을 이루고 홀가분하게 눈을 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베르톨드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왜 불행할까? 그 나라에는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보통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 요즘엔 이런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프로 정신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보통 사람들이 없다면 그 나라는 필사적으로 영웅적 인물을 찾기 마련이고, 그렇게 찾은 사람에게 금메달을 나눠주기에 급급하다. 

                                                                                                        - p. 134. 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하다.





   . 그래서 이 책의 글들은 - 특히 2010년 이후에 쓰여진 에세이들은 그동안 국내정치에 집중하던 그 전의 에세이들과는 달리 휴대폰과 인터넷, 인종주의, 몇 년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은 샤를리 사태와 이슬람, 노령화 등 다양하고 전지구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특히 당시 유럽을 큰 충격에 휩싸이게 한 샤를리 사태에 대해 샤를리 측이 이슬람 교도들의 종교적 감정을 모욕한 것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선을 넘은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이를 비판이 아닌 끔찍한 테러로 맞대응한 극단주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기도 하는 등 그간의 풍자나 비웃음만으로 그치지 않는 것 역시도 인상적이다. 지식인이자 투사로 - 그게 에코의 마지막 모습이었던 것이다.




   바야르는 자신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때 책을 읽은 사람들도 잘못된 인용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책에 '장미의 이름'과 그레이엄 그린의 '제3의 사나이', 데이비드 로지의 '교환 교수'를 요약하면서 각각 잘못된 정보를 하나씩 집어넣었다고 막판에 고백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 요약된 내용을 읽으면서 그레이엄 그린의 대목에서는 바로 오류를 간파하고 데이비드 로지에 관한 글에서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지만, 정작 내 소설에 대해서는 오류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 p. 228. 읽지 않은 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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