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 앤터니 비버(교양인) ●●●●●●●●○○
다시 한 번 정치적인, 그리고 선전상의 고려가 재난을 자초했던 것이다.
소련의 개입이 1936년 11월 공화 진영의 마드리드 수호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과 이탈리아 군대가 국민군이 승리하는 쪽으로 전쟁 기간을 크게 단축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랑코가 순전히 독일과 이탈리아 군대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일 것이다. 콘도르 군단은 무엇보다도 북부 지역 정복을 앞당겼고, 덕분에 국민군은 북부 지역 군대를 중부 지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콘도르 군단이 보여준 진정으로 파괴적인 효과는 1937년과 1938년에 공화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맞서 그것을 저지한 데 있었다. 이때 벌인 전투들이 공화군의 허리를 꺾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콘도르 군단이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완벽한 환경을 제공한 것은 공산주의자 군 지휘관들과 소련 군사 고문들의 형편없는 지도력이었다.
- p. 733. 무너진 대의명분.
. 흔히 1차대전이 종결된 1919년부터 2차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 20년의 평화가 있었다고 얘기되지만, 실제로는 그 20년 동안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국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만주를 넘어 중국으로 끊임없는 군사적인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 파시즘 정권을 수립한 무솔리니는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에디오피아를 쳐서 상처뿐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심지어 유럽대륙 내에서도 '2차대전의 전초전'이라고 할만한 전쟁이 있었다. 1936년부터 시작되어 2차대전을 6개월 남기고 종결된 스페인 내전이 그것이다.
. 공화진영과 국민진영이 스페인을 양분하고 타협과 절충없는 All or Nothing으로 선거에서 이긴 쪽이 일방적으로 독주하던 1930년대 초중반. 공화진영과 국민진영은 각각 한 번씩 정권을 잡았지만 그 결과 양쪽 진영은 상대에게 절대 정권을 내줘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각오를 품고 양분되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소선거구제는 이런 갈등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단 7만 표, 득표율로 보면 단 0.5%의 차이였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공화진영의 인민전선이 473석 중 절반을 훌쩍 넘는 285석을 석권하게 되자 둘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고, 더구나 이런 상태에서 정권을 잡은 공화정권은 갈등을 수습하기는 커녕 국민진영의 장군들을 카나리아 제도 등 스페인 본토 밖으로 내모는 숙정을 벌였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당시 최정예였던 아프리카 군단을 국민진영의 손아귀에 쥐어준 대실책이었다.
국민진영이 내세울 만한 군사적 장점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4만 명의 아프리카 주둔 군대였다. 국민진영은 또한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고 장비도 빈약한 본토 대도시 주둔 병력에서 5만 명 정도를 자기 편으로 확보했다. 여기에 17명의 장군과 1만 명 정도의 장교들이 반란 세력에 합세했다. 그들은 또한 케이포의 카라비네로(국경수비대) 중 3분의 2, 돌격대의 40퍼센트, 치안대의 60퍼센트 가량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세 개의 준군사 단체 병력 가운데 약 3만 명이 반란에 동조했음을 의미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13만 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반란군에 합류해 있었다. (중략)
전쟁이 오랫동안 진행될 것을 고려할 때 공화 정부의 상황이 유리해보였다. 공화 정부는 산업시설과 우수한 인적자원을 보유한 대도시, 광산지대, 함선과 상선 대부분, 본토 총 면적의 3분의 2, 국가 보유 금, 국가의 최대 외화 수입원인 감귤류 생산지 발렌시아를 수중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 진영은 불리한 상황을 외국으로부터 끌어낸 자원과 주요 농업지대 장악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 p. 156. 주도권 다툼.
. 결국 양측의 정치테러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선거가 끝난 지 5개월만에 국민진영은 대대적인 군사쿠데타를 시도했다. 공화정권의 숙정으로 인해 본토 밖으로 밀려나 있던 장군들은 모로코에 있던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 본토에 상륙해 주요 해안 거점과 원래 국민진영의 텃밭이었던 북동부 대부분을 점거했다. 이에 맞선 공화정부는 비록 초기대응에는 실패했지만 노동자들과 의용군의 분투에 힘입어 공화정부 지지세가 강했던 지역 대부분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렇게 스페인은 둘로 쪼개졌고, 내전이자 국제사회가 개입한 대리전이기도 했던 스페인 내전이 3년에 걸쳐 이어지게 된다.
장군들은 스페인령 모로코와 스페인 전역에 주둔한 수비대들의 봉기를 신호탄으로 삼아 쿠데타를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거사의 성공 여부는 병력의 규모보다는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이 주는 심리적 효과에 달려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이 쿠데타를 완전히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화정부 역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48시간 이내에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 48시간 동안에 모든 지역의 점유(공화정부 점령 지역과 반란군 점령 지역)가 결정되었다.
공화정부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는데, 이는 초기의 불확실성이 방어적 사고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총리인 키로가는 노동자총동맹과 전국노동연합의 무장을 두려워했다. 그는 국가가 자신의 자신의 '척추'(군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법치로부터 일탈하기를 거부했다. (의용군에게) 제때에 무기를 내주지 않음으로써 반란군을 선제공격하거나 신속하게 역공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 p. 115. 장군들의 반란.
. 이전에 읽었던 앤터니 비버의 '아르덴 대공세 1944'가 2차대전 서부전선의 승패를 사실상 결정지었던 아르덴 대공세의 보름간을 장면 하나하나에 포커스를 맞춰 상세하게 묘사했던 데 비해, 이 '스페인 내전'은 3년 간에 걸친 전쟁과 정치상황을 고루고루 조망하고 있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의 전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투와 전선의 움직임만큼이나 당시의 정치상황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프랑코를 앞세워 빠른 시점에 체제를 일원화한 국민진영과 달리 공화진영은 소련의 지시를 받는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들 간의 내분과 쿠데타로 전쟁기간 내내 몸살을 앓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앤터니 비버는 전쟁을 서술하는 중간중간 공화진영의 내분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독자는 이를 읽으며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조지 오웰이 겪었던 1937년 5월의 바르셀로나 봉기와 탄압이 단순히 바르셀로나 한 지역의 사건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스페인 내전의 방향과 끝을 결정해버린 중대한 사건이라는 걸 알게 된다.
국제여단 병사들의 태도에 가장 심각한 동요를 불러일으킨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통합노동자당 박해였다. 통합노동자당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호령은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중략)
여러 사건에 대한 당의 설명은 사실과 너무나 달라서 오직 진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만 그것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대부분의 국제여단 병사들은 공산당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지성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페인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군수사국의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기 고국에 도착해서도 대체로 공화군의 명분을 훼손하기보다는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지 오웰처럼 그것을 입 밖에 내려고 한 사람들은 자신의 책을 출판해 줄 좌파 쪽 출판사를 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p. 545. 공화주의 이상의 붕괴.
네그린 정부는 출범 첫날 통합노동자들의 기관지 '라바타야' 폐간에 동의했다. 소련과 코민테른의 고문들은 신속하게 결과물을 얻어내라는 심한 압박을 받았다. 공산당 소속 신임 치안국장 안토니오 오르테가 중령은 내무장관 수가사고이티아가 아니라 오를로프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6월 16일 통합노동자당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은 바르셀로나 소재 통합노동자당 본부를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바꾸었다. 제29사단 사단장 로비라 대령은 육군본부에 불려와 체포되었다. 안드레스 닌을 포함하여 소재가 파악된 통합노동자당 지도자들도 전원 체포되었다. (중략)
모스크바의 여론 조작용 공개 재판과, 1937년 스페인의 분위기로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통합노동자들에게 뒤집어씌운 파시스트 집단이라는 혐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었는지, 또한 안드레스 닌과 그의 추종자들이 납치되어 고문을 받고 나서 '실종되었는데' 정부는 왜 스탈린주의자들이 수행한 '더러운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훈련된 기계'는 민중의 지지를 인수하기는 했으나 민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지켜야 할 이상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얀은 "네그린이 공산주의자 무리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 인들과 독일인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 없다." 고 말했다.
- p. 484. 전선의 분열.
. 또한 이 책은 그동안 스페인 내전을 다루는 글들이 으레 선택하던 '국민진영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길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공화진영은 눈물겹게 싸웠다'는 식의 구도에 함몰되지 않는다. 국민진영에 아프리카 군단이 있었고 독일, 이탈리아의 지원이 더해졌던 건 사실이지만 반대로 공화진영 역시도 막대한 자금을 보유하고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2차대전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공화진영이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방어 위주의 전술을 통해 군사력을 보존하면서 상대의 소모를 강요하고, 이를 통해 전쟁을 장기전으로 몰고 갔다면 그 결말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쿠데타로 통합노동자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공산주의 세력은 정치논리를 앞세워 성급한 공세를 반복함으로써 공화진영을 패배의 수렁에 빠뜨리고 만다.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아무런 정당성도 없었으며, 특히 공화군이 당시 매우 허약한 상태에다 원래 공세 목적을 달성할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공화정부 지도부는 훗날을 기약하며 최정예 부대를 질서정연하게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는 쪽을 택했다. 모든 것은 유럽인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 네그린의 판단 때문에, 그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행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정치적인, 그리고 선전상의 고려가 재난을 자초했던 것이다.
- p. 617. 에브로 강 전투.
. 이렇듯 앤터니 비버는 기존의 도식적인 선악구도에서 벗어나, 국민진영이 자행한 전후 처단이나 '게르니카'로 알려진 무차별 공습에 대해 꼼꼼하게 서술하면서도, 공화진영이 벌인 테러나 전술적 실책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점 하나만을 봐도 스페인 내전에 대해 이 이상의 책이 소개되기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저자의 책이 으레 그렇듯(^^;) 둔기로 쓰기에 딱 좋은 묵직한 분량이기까지 하니 더 이상 뭘 바랄 게 있을까. :)
5시 15분 경, 둔탁한 비행기 엔진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즉각 그것이 육중한 융커 52기의 별명인 '전차'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르고스에서 출발한 3개 비행대대가 두 시간 반에 걸쳐서 20분 간격으로 게르니카 시에 매우 체계적으로 융단폭격을 가했다. 융커 52기들이 투하한 폭탄은 소형과 중형 폭탄, 250킬로그램 폭탄, 대인용 20파운드 폭탄, 소이탄이었다. 소이탄은 2파운드의 알루미늄 튜브 모양이었고 융커 52기들에서 마치 금속 색종이처럼 뿌려졌다. 목격자들은 폭격 때문에 도시에 펼쳐진 참상을 '지옥' 혹은 '세상 종말' 같은 말로 묘사했다.
- p. 413. 바스크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