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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은성 Jan 22. 2022

고마워, 용기 내어주어서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널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그날은 내가 좋아하는, 유난히 평범한 주말 오후였다. 기분 좋은 바람이 창문을 타고 거실로 들어와 따스한 기운이 넘실거렸고, 커피 향이 집안 구석구석을 향긋한 내음으로 가득 채우는. 햇볕이 따사로워 이따금 창 밖을 쳐다보면,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무더운 여름을 상징하는 초록색으로부터 다채로운 가을을 상징하는 빨강, 주황, 노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풍경을 한참 즐기고 있을 때, 꽤 오랫동안 익숙하게 보던 핸드폰 번호 11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몰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내 마음과는 달리 한 번에 알아봤다. 네 번호였다.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너와 이별하자마자 너의 SNS 아이디, 핸드폰 번호, 우리의 대화창을 싹 지워버렸다. 이렇게 모질게 너를 차단하지 않으면 우리의 결말에 미련 있던 내가 술 김에 너에게 전화를 한다거나 혹은 하루 종일 너의 SNS 프로필을 바라보며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토록 너에게 미련 있었던 나지만,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알량한 자존심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우리에게 집착하며 더 이상 이 관계에 정체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홀로 술을 퍼마시며 울부짖을지언정 이 악물고 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 시간들이 너무 괴로웠다.

하루는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 로 괴로웠고, 하루는 우리는 대체 뭐였을까, 로 괴로웠고, 하루는 넌 왜 나를 만난 걸까, 로 괴로웠다. 그 하루들을 반복하다 보니 차츰 너를, 우리를 포기하게 되었다. 상처가 나고, 딱지가 앉고, 그 안에 새 살이 돋는 것처럼 그 괴로움의 시간들도 서서히 무뎌갔다. 아니, 익숙해졌다. 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렇게 포기하는 시간들이 무뎌지고 익숙해질 때쯤 너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


"안녕. 갑작스러운 전화, 미안해."


로 시작되었던 우리의 마지막 통화.


"잘 지냈어?"


대화의 첫 단추는 스몰 톡이었다. 안부 같은걸 왜 묻냐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나에게, 너는 예의 그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가 이런 것도 못 물어볼 사이는 아니잖아.라고 대답했다. 이런 식의 간단한 질문으로부터 우리 사이에 있었던 공백이 차츰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며 너와 통화하는 동안 그간 연락하지 않느라 몰랐던 너를 알아가며 나는 네가 또 익숙해져 갔다. 그 익숙함에 마음이 일렁이기도 하였다.


"나도 너처럼 헤어지자, 라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사이에 여지를 둔 거야. 사실 우리는 헤어지자, 하면 헤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잖아. 우리가 그렇게 돼버린 이후로 네가 그리웠을 때 네 SNS에 들어간 적 있었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연락하면 안 되겠다 싶었지. 근데 이 모든 말들이 변명으로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 생각을 말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어서 연락하지 않았어."


잠자코 네 말을 듣는데, 내 이름을 부를 때의 너의 목소리, 네 특유의 말버릇이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여전함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사실 우리는 헤어진 사이가 아니라 대판 싸운 후 토라져서 연락하지 않다가 서로를 향한 그리움에 결국 화해하는 커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착각이 들자 울컥하기도 했다.


말해봐, 우리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난 모르겠어.

사실 내가 너에게 원한 건 그리 큰 게 아니었어.

너, 네 사랑, 그리고 속도가 느린 너와 내가 천천히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것.

근데 이게 너에게 있어서 매우 큰 것이었니?


너는 한결같이 다정했지만 그 이상이 없었고, 꽤 오랜 시간 함께 했지만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거라곤 네 나이, 혈액형, 생일, 직업, 가족관계, 취미, 좋아하는 음식, 생활 루틴.

애석하게도 나는 이 것 만으로는 너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순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 너의 미래에 내가 있긴 한 건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가끔 우리가 무슨 사인지 헷갈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너를 그대로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리하여 너의 생각을 알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 희망사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여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는 증표로 네가 날 절박하게 원하길 간절히 바랬다. 그 바람과는 반대로 한 번씩 우리가 틀어질 때마다 너는 나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고, 매번 내가 너에게 손을 뻗어야만 했다.


그것이 상처가 되었다.


별 것 아니겠지, 하며 마음 한편에 밀어두었던 그 상처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칼 날이 되어 내 마음을 베었고, 결국 내 마음은 깨진 유리그릇처럼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널 잃고 싶진 않아서 유리그릇을 억지로 이어 붙이곤 했지만, 한번 깨져버린 그릇은 새 그릇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각난 유리그릇을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널 놨다. 그리하여 기어코 이별을 말하지 않은 헤어짐 앞에서 나는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헤어지는 중인 걸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단 한 번의 연락이었다.

그 연락을 너와 나, 둘 중 한 명이 먼저 했다면 우리의 로맨스가 허무하게 막이 내리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위태롭기 짝이 없었던 연극은 끝이 났고, 우리의 사랑은 결말이 새드엔딩이었다는 게 나는 조금 쓸쓸했다.


"우리의 결말이 그리 좋지 않았어서 네가 많이 힘들어했던 것 같아 연락했어. 연락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 관계에 해가 될 걸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이 모든 게 변명이 될까 봐 그간 연락하지 못했어. 미안해."


내가 참으로 좋아했던 너의 다정한 말투, 묵직한 목소리. 그리고 미안해, 라는 말.

너는 갑작스러운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 전화가 고마웠다.


사실 그간 너를 미워하며 진심으로 힘들었다.

1년 넘게 만난 연인인 나에게 헤어지자는 이별의 말조차 회피한, 비겁한 너의 뒷모습에 온갖 미움과 증오를 퍼부었으니까. 그러나 너의 전화에 나는 너에 대한 오해가 풀렸고 덕분에 더 이상 너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너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래, 그럼 잘 지내."


미련, 배신감, 분노, 미움, 증오와 같은 감정들을 말과 침묵에 꾹꾹 담아 모조리 흘려보냈다. 그러며 꽤 오랜 기간 함께 해준 너에게 고마움만을 남기기로 하였다.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너와 만나는 동안 나는 꽤 행복했어.

너의 다정함과 상냥함에 외로움을 치유받았고, 따뜻한 시선에 때로는 사랑을 충만하게 받고 있구나 느꼈다.

이걸 왜 해?라고 말을 하면서도 네가 좋아하니까, 라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해주는 게 좋았다.


고마워, 용기 내어주어서.

덕분에 나는 이토록 사랑했던 너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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