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과 음식이 예쁘기만 할 수 있나?
‘예쁘다‘
속초에 놀러간 김에 유명하다는 동네 책방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반겨주는 색색깔의 어린이 동화책들.
1층은 여느 대형서점과 다를 것 없이 소설책들과 학습지들이 섞여있었고 이 동네에 사는듯한 아이와 부모가 함께 책을 고르고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내가 원하던 독립서점의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저 책 하나만 집에 걸어놓아도 그림이겠다 싶은 책 표지들이 정갈하게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군데군데 서점 주인이 써놓은듯 한 감상 쪽지가 올려져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오랜만에 서점을 둘러보던 내가 새삼 놀랐던 건 책들이 하나같이 다 너무 예뻤다는 것이다.
울창한 숲 속 배경 위에 금테로 꾹꾹 제목을 정갈하게 눌러 쓴 책을 발견했을 때,
심플한 흰 배경에 이상의 시구절마냥 족히 서른자는 넘어보이는 긴 제목을 강렬한 파란색 손글씨로 줄줄 나열한 책을 봤을 때,
무언가를 기다리듯 창밖을 응시하는 여자의 모습을 파스텔로 그린 배경에 ‘다가오는 말들’ 이라고 쓰인 책제목을 봤을 때도
내가 내뱉은 말은
예쁘다-.
그렇게 한참을 예쁜 책…표지..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나왔다.
오 이건 사야돼! 하며 마음에 드는 책 표지 몇장을 찍은 사진과 함께.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문득 내가 찍어둔 사진 속 책들이 어떤 내용인지, 누가 쓴 책인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 눈을 사로잡은건 책 제목도, 서점주인이 빼곡히 써놓은 감상쪽지도, 작가도 아닌
오로지 책 표지였다는 사실과 함께
한 시간 가까이 서점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책을 ‘읽기‘보다는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서점을 나설땐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는 그 가벼운 마음이 웃겼다.
생각해보니
나는 서점을 다녀온 게 아니라 미술관을 다녀온 것 같았다.
그치만 책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들은 표지를 넘겨야만 도달할 수 있는 얇은 페이지들 사이사이에 담겨있는 것인데.
예쁜 표지를 보고 책을 고르는 행위는 책을 읽는 것에 속하는 것인지 책을 보는 것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시간만 낭비한 것은 아닌지.
나는 어느덧
책읽기의 본질을 잃어버린 듯 했다.
생각해보면 음식도 마찬가지다.
음식의 본질은 맛.
맛이있는 음식을 먹는것이야말로 음식의 본질을 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예쁜 음식을 찾아다니곤 했다.
인스타 속 많은 하트는 음식의 맛을 보장해주진 않았지만,
적어도 수 많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은 겉보기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렇게 내 사진첩에는 예쁜 음식 사진이 쌓여갔고
그 사진들과 똑같은 사진을 손수 찍고는
맛에 실망하는 그런 날들이 계속됐다.
그랬던 지난 날에 지쳐 백반만을 찾게 될 때 쯤
음식을 오로지 맛으로만 바라보겠다는 두 사람과
그들에게 음식을 평가받겠다는 이들이 나타났다.
오로지 맛으로만 평가받는
흑과 백의 요리 대결
고기를 간지나게 굽던 잘생긴 청년은
고기를 이븐하게 굽지 못해 탈락하고
누구에게나 익숙한 급식판, 그 속에 담긴 흔한 반찬들은
맛으로 심사위원을 사로잡다 못해 옛 추억을 불러와
‘오늘의 급식은 뭔가요?’ 라는 유행어를 만들기에 이른다.
특히 심사위원들이 눈을 가리고
요리 과정의 화려함도
음식의 예쁨도 보지 않고
오로지 혀의 감각에 의지해 음식의 ‘맛’을 평가했던 라운드는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로 무언가를 먹을 때,
이 채소의 익힘이 괜찮은지
맛의 완성도가 있는 테크닉을 사용했는지
어딘가 맛이 조금 비어있지는 않은지를
혀 끝에 집중하며 느끼려는 순간순간을 발견했다.
어느덧 밈으로 자리잡은 한 심사위원의 평가는
사실 전혀 우스운 표현들이 아니다.
어쩌면
자극적인 모양과 색깔
젓가락질 한번에 망가지고마는 형태에 눈길을 뺏겨
정작 음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맛을 우선순위에서 미뤄왔던 나에게
재료들이 어느 하나 자기주장 강하지 않게 조화로운 맛을 내는지,
그 맛들이 나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주는지,
이 음식을 먹는 지금 행복한지를
곱씹어보게 해준걸지도.
그래서 요즘
본질에 가까워지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슥 지나쳤던 책 표지도 다시 발걸음을 되감아
그 표지 이면에 담긴 작가의 첫마디에 귀기울이고
사진에 예쁘게 담고는 와구와구 먹었던 음식도
이젠 눈을 감고 ‘이게 뭐여? 오어억?‘ 하진 않지만
재료 하나하나가 전하는 맛과 향에 집중하려한다.
본질을 찾는 여정은 언제나
아차 싶을때 찾아오니까,
지금의 아차를 의미있는 찰나로 만들어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