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단단한 내 안의 껍데기를 발견하고 부숴가는 아름다움에 관하여
방어적이라는 수식어는 단어 자체에서 풍기는 수동적인 어감 때문인지 몰라도 어딘가 무해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먼저 나서서 손톱을 세우고 남을 할퀴며 공격하는 것보다얀 예의도 좀 있는 것 같고 반대 성향의 사람들 대비해선 어딘가 착해 보이는 느낌마저 든다. 어른의 삶을 살다 보면, 특히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방어란 껍질 속에 웅크리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내 안에 깊게 똬리를 튼 방어기제는 사실 숨기고 지내기 꽤 용이한 편이다. 처음 누군가를 만났을 때나 적정한 관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선 학습화된 사회생활 스킬로 충분히 이를 가릴 수 있다. 초면에 도드라지는 기질들은 대개 밝거나 어둡다, 서글서글하거나 까칠하다 처럼 심플하고 단편적이다.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지도, 갈등을 함께 겪거나 감정의 낙폭을 공유해보기 전까지는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서로의 기질을 확인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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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넌 방어적이야'란 말을 들어본 건 이십 대 후반이 다 되어서다.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타인에게 받은 평가 중 난생처음 들어본 표현이었다. 당시의 나는 필요 이상의 솔직함과 충분히 직설적인 애티튜드로 꽤 존재감 있게 이십 대를 나던 중이었다. 한참이나 덜 다듬어진,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며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과 현실과의 괴리 속에 적당히 고통스러운 그런 이십 대. 나의 머릿속에 방어적인 사람들은 대개 자기표현이 스스로 편하지 않고 타인에게 리액션을 충분히 나눠주지 않는, 경계 많고 약간은 소심한 부류들이었다. 나름대로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이후로도 한참을 부정했던 것 같다. 내가 어딜 봐서 방어적이란 말인가. 이렇게 할 말 다 하고 내 감정에 솔직하고 겉과 속의 온습도가 정확히 일치하는데! 스스로 그런 성향임을 인정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글쎄 인간 심리 끝단에 숨어있는 방어기제의 학문적 정의나 분류. 진단이나 대처법 같은 건 잘 모르겠다. 그런 병리학적 진단은 유튜브를 운영하는 부지런하고 말솜씨 좋은 정신의학과 전문의의 클립을 참조하거나 관련 논문 혹은 전문 저서를 읽어보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그 환자 중의 한 명일지도 모를 나의 주관적인 자가진단은 이렇다.
상처 없는 무균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은 노력형 외향 기질의 합
난 밝기도 하고 무척 어둡기도 하다. 한없이 내향적인데 굉장히 사회적인 캐릭터기도 하다. 누구보다 이기적이지만 때때로 계산법을 아예 잊은 사람처럼 맹목적이고 헌신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양면성 정도가 아니라 내 안의 방어기제, 그러니까 내가 나를 열심히 보호하고 지키려는 그 노력들의 합이 실제 삶에 발현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순히 '상처 받기 싫은 사람'으로 표현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그 누구도 자기 몸과 마음에 나는 상처를 즐기고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모두가 자기 행복을 본능적으로 갈구하고 위험과 상처로부터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 싶어 한다. 단순히 상처가 나는 것에 대한 걱정과 반감이라기 보단 그 상처를 대면하는 상황이 너무도 낯설고 이를 해결해나가는 프로세스가 남들보다 예민하고 많이 피곤하기 때문에 그 빈도를 낮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다 보면 세상은 어느 순간 넌 참 방어적이란 평가를 돌려준다. 실은 굉장한 노력과 끝없는 성실성을 요하는 일이다. 굳이 싸움까지 가서 날 선 말과 표정으로 서로를 할퀴고 싶지 않기에 발현되는 어느 정도의 포용성, 꽁꽁 숨기고 가리다 마주하게 될 불편한 순간이 오지 않도록 적절한 수준으로 나를 먼저 보여주고 곁을 허락하는 일,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고 싶지 않기에 때론 희생도 불사하고 속마음을 꺼내 서로 매만지는 순간의 위대함을 위해 먼저 타인의 상처와 마음을 챙기고 공감하는 일. 뭐 이것도 역시 상처 받기 무서워서라고 눙친다면 딱히 할 말은 없겠지만 마냥 혼자 상처 받기 싫어 장마에 스웨이드 앞코 하나 젖지 않고 퇴근을 하겠다는 오만이 아닌, 그 무균 상태를 최대한 오래 조용히 유지하고 싶어 하는 노력들을 봐달라는 거다.
그래, 방어적이었던 거다. 나의 명랑함은 남이 절대 들춰보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어둑한 구석을 최대한 단단하고 비밀스럽게 보호하기 위한 마감 좋은 울타리 재료 같은 거였다. 어떤 일은 쉽게 잊기도, 사람들의 감정 하나하나에 휘둘리지 않으며 때론 초연했지만 그 역시 정밀하게 계산된 적정 두께와 거리감 안에서 가능한 일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나의 깊은 감정까지 침범해오는 말과 감정과 사람이 없었으면 했고 최대한 그 빈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들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했던 것이다. 하여 적당한 거리, 평범한 관계에선 겉으로 보이는 외향성이나 명랑한 기질들이 도드라질 뿐, 쉽게 이 방어적인 기질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도 잘 모를 수 있다. 그저 낯을 좀 가리고 아무 데나 쾌활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고급 스킬들이 어린 나이부터 발현되긴 쉽지 않다. 내가 어떤 선까지 갈등을 견디고 분노 게이지를 조절할 수 있으며 스트레스를 컨트롤할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인생의 데이터베이스가 실경험 기반으로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관계와 상황 속에 실컷 상처 받아보고 황당해서 울어도 보고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들을 꽤 여럿 남겨보고 난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그런 기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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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적으로 사는 건 실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상시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노력들이 가볍고 가치 없다곤 볼 수 없지만 이는 결국 자기 자신만을 위한 개인적 에너지다. 좀 더 괜찮은 어른의 삶으로 향할 변화에 쓸 동력을 현재의 나를 감싸고 고착하는 데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꼭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도덕 교과서 논리를 대고 싶진 않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 자기 자신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향 에너지를 굳히는 것보다 바깥세상과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완전하지 못한 불안한 자아를 단지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급변하는 외부 자극과 환경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보다 그에 적응하며 나를 변형해 나가는 것이 훨씬 더 영리하고 경쟁력 있는 선택이다. 고유의 기질을 뿌리부터 바꾸란 이야기가 아니다. 확률상 편협하고 치우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자아를 보다 유연한 방향으로 가꿔나가는 노력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쩌면 이미 어른이 되어버려 더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다 컸고 고로 지금의 내가 나라는 생각을 굳히기 좋은 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적 성장은 끝이 없다고 봐야 한다. 원하던 자격증도 따고 공부도 마치고 경제적 자유도 얻고 이미 가정을 이뤘을 수도 있지만 그 과제들이 나를 규정해주진 않는다. 타이틀이 달라지고 새 명함을 팠다면 내 안에 덜 자란 나를 계속해서 키워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성장 없이 제자리인 방어기제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나의 내적 성장을 가로막는 요소가 되곤 한다. 익숙한 나를 그대로 지키는 현상유지에 그 큰 에너지를 소모하는 거다.
어떤 장면에서 방어적인 자아를 마주할 진, 글쎄 알 수 없다. 가까운 누군가의 한 마디에,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자각을 하게 될 수도, 누군가는 영원히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몰랐던 내 안에 단단한 내적 껍데기를 발견했다고 낙담할 필욘 없다. 방어적인 사람들에겐 역설적인 희망이 있다. 지금처럼 내가 나를 지키려 애쓰는 그 에너지면 충분하니까. 주변 그리고 사회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연습, 불편하고 어려워서 마주하고 싶지 않던 것들을 대면하는 노력, 나의 템포에 맞게 이 모든 시행착오에 임하는 각오 같은 데 써도 충분할 만큼의 에너지를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 생각의 방향 전환 그 하나만으로 세상 가장 초라했던 껍데기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이 된다. 모두가 나의 선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