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에 녹아든 따스함에 대하여
차가워진 공기와 함께 여념 없는 독서의 계절을 나고 있다. 최근엔 심리학 책에 빠진지라 궁금한 분야 위주로 탐독했다. 와중에도 평소처럼 에세이도 섞어 읽고 소설도 보던 중 인상 깊던 책이 한 권 있었다.
허지웅이란 사람을 뭐라 정의해야 할까. 작가이자 평론가이자 연예인, 이젠 암 투병 이력을 가진 현재 진행형 환우라고 봐야 할까. 처음 그가 마녀사냥에 나와 필터 없이 솔직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뱉어낼 때의 매력적인 순간을 기억한다. 분명 신선한 등장이었다. 이후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비되면서 타협 없는 강렬한 의견 피력에 피곤함을 느낀 적도, 애초에 광팬도 아니었으니 무심한 적도 많았다. 그가 암 투병을 한다는 기사가 연일 쏟아졌을 때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SNS 채널에 달려가 근황을 살피고 응원 디엠을 보내는 류의 사람이 나는 아니므로 또 하나의 지나가는 남의 일 같았다가 솔직한 심정이다.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겠다만 그가 투병 후 낸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을 최근 읽었다. 사실 제목부터 어느 정도 바이아스가 생겼다. 큰 병을 앓은 뒤 삶에 대한 그의 자세가 많이도 달라졌단 건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타이틀부터 생에 대한 의지가 너무도 꼿꼿하게 느껴져서였을까. 병치레로 가득한 인생에 대한 고통과 회의, 과정 속에 다시금 깨달은 생의 긍정을 특유의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강권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하여 큰 기대 없이 출근길 가방에 넣고 오고 가며 읽어 내려갔다.
그의 글은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다. 허지웅은 능력 있는 작가란 사실을 새삼스레 통감했다. 꽤 빽빽한 모든 페이지에 작가의 정확한 주관과 메시지가 녹아있고 이를 거침없이 솔직하게 펼쳐나간 에너지가 부러웠을 정도였으니까. 흔히들 큰 병이나 인생 질곡을 겪고 나면 삶에 대한 앵글을 달리하게 된다. 이를 전달하는 무드나 감정은 눈물을 동반하기도 하고 몰입하기에 꽤 고통스럽기도 하며 희망차면 희망찬 대로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그의 글은 달랐다. 말 그대로 태세 전환 급으로 살아있는 동안 젊은 영혼들의 안식을 위한 알고 있는 모든 방법들을 전하고야 말겠다는 의지 같았다. 사이사이 떠올리기 고통스러웠을 투병 장면도 그려지고 그의 젊은 시절과 비참했던 인생의 어떤 순간들이 그려지지만 그 어떤 장면도 신파나 동정 유발, 눈물 짜기나 질곡은 딛은 자의 훈계 혹은 비참함을 견딘 보상을 바라는 여분의 감정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날카롭지만 전하려는 바가 명확했고 중심을 잃지 않아 읽는데 거북함이 없었다. 어쩌면 순수한 독자의 감상보단 달라진 화자의 애티튜드와 글 재능에 감화를 얻은 것 같기도 한데 뭐 둘 다 독서의 목적 아니겠는가. 꽉꽉 들어찬 그의 이야기를 하여 즐겁게 탐독하며 간만에 잘 지어진 글을 꼭꼭 씹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인간적 평가나 개인적 취향을 다 떠나 변화할 줄 아는 어른으로서의 허지웅이 좋다. 상당히 똑똑한 데다 저 정도 굴곡을 딛고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으면 저렇게까지 치열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더 나은 어른 그리고 인간이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그의 겸손함과 당당함이 좋다.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이 읽기 편한 글을 잘 짓는 것도 부럽지만 세상 누구보다 꼿꼿할 것 같은 꼴통도, 따스한 어른도 모두 다 아우를 수 있는 그의 다면적인 매력이 좋다.
알 수 없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에세이를 다 읽은 후엔 허지웅답기라는 그의 영상 컨텐츠도 접하게 되었다. 활자로만 위안이네 조언이네 그치지 않고 실제 젊은이들의 사연에 때론 진지하게 때론 감정을 다해 때론 냉철하게 그가 가진 모든 솔루션을 그의 문체처럼 아주 정확하고 단호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의 에세이와 유튜브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지만 같은 메세지를 전하고 있었다. 잘 살아내 보자고. 힘들고 뭣 같아도 그건 젊음 너의 잘못과 오롯한 책임이 아니니 깨부수고 버티며 함께 살아내 보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