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거쳐 인류를 관통하는 기질과 관계 그리고 사랑에 관하여
나는 교정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편이다. 반려견도 없는 내가 세나개를 밤새 달리고 내 어릴 적 프로그램인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유튜브로 종종 찾아보기도 했다. 잘 모르겠다. 난 왜 그렇게 이 프로그램들을 좋아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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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인 강아지와 어린아이 사이엔 무섭도록 큰 공통점이 있다. 처음 들여다보면 분통 터지고 짜증이 오를 만큼 무례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보호자를 향해 짖고 입질을 하질 않나 사랑으로 키워준 엄마 아빠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동네 망나니 어린이 타이틀에 손색없을 만큼 제멋대로 행동한다. 진짜 왜 저럴까 싶은 발암의 구간을 지나고 나면 그것이 강형욱이든 오은영 박사든 이에 정통한 전문가의 진단과 개입이 시작된다.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나 강아지는 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보호자나 부모의 일방적인 보살핌에 의지하며 생존과 성장을 해야 하는 존재들이란 그렇다. 그들이 보여주는 세상이 이들의 전부가 되며 그 방향성에 따라 시야가 정해지고 뱉는 말과 행동이 결정되니까. 초반 편집은 대개 이들이 벌이는 좌충우돌 사건사고에 집중하지만 중반부를 지날수록 그 원인을 파헤치며 이런 행동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여러 회차를 거듭하다 보면 이 모든 짜증 나는 장면들이 결국 부모와 보호자의 잘못으로 귀결된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볼 때마다 새롭다. 대체 얘는 왜 이래? 했던 이유가 결국엔 이들이 받았던 보살핌과 잘못된 훈육, 때론 과도한 애정과 무지 그리고 경험 부족에 기인한 결과치다. 단 1%의 어긋남이 없는 너무도 명확하고 당연한 흐름으로 말이다. 되바라지고 나이나 또래에 맞지 않는 과행동을 하는 경우는 대개 부모가 보여주는 모습을 그대로 닮아버린 경우가 많다. 규율과 적절한 훈육 없이 과도한 사랑만을 주면 곱고 사랑 많은 아이나 행복한 반려견이 아닌, 정도가 뭔지 모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개념 없는 문제아로 자라 버린다. 입력과 산출 값 사이에 약간의 공식이 있달까. 쨌든 이런 류의 교정 프로그램은 결국 그 회차 안에서 만큼은 해피엔딩을 맞는다. 아이나 강아지는 머리 커버린 어른이 아니기에 교정 여지가 충분하다는 희망이 있다. 전문가의 개입으로 훈육의 시간과 약간의 눈물 타임을 거치면 놀랍도록 다른 존재가 되어있다. 어제의 이상한 행동일랑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바르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말이다. 사이엔 어린아이와 반려견이 가진 맹목적인 사랑과 순수함을 볼 수 있어 더 중독적인 것 같다. 지나가는 강아지와 아이만 봐도 행복해지는 그런 류의 인간은 아니다만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의 어린 존재의 진심을 보는 것 만으로 힐링이 된다. 제 아무리 말을 안 듣고 사고를 치던 이들이라도 기저에는 부모와 보호자밖에 모르고 그들의 사랑을 끝없이 갈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 큰 어른의 세계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감동의 씬들이다. 누가 봐도 혀를 끌끌 찰 만한 이상 행동이 전문가의 솔루션으로 바로잡혀가고 결국 온 가족의 일상에 행복이 깃드는 기승전결이 그 한 에피소드에 꼭 맞춰 담긴다. 뭐 백 프로 완벽하게 문제 행동들이 교정될 리 없고 쨌든 방송을 위한 설정과 편집의 과정들이 있겠지만 일단 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후련함과 인류애가 솟아나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견종과 가족의 성향마다 매번 다른 문제 상황과 이에 매칭 되는 솔루션이 내려지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다. 세상엔 문제 많은 아이와 강아지를 키우는, 아니 이들이 괴물이 될 때까지 열심히 키우거나 혹은 방치한 부모와 가정이 이리도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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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인간 세계의 강형욱이라고 믿는 사람이 바로 오은영 박사님인데 최근엔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에서 활약하고 있다. 처음엔 우아달 2020년 버전인가 했는데 프로그램을 보면 볼수록 뭐랄까, 느낌이 약간 다르다. 프로그램의 패턴 자체는 비슷하다. 사연을 의뢰한 부모님이 나오고 아이의 문제 행동을 비디오로 살펴본다. 뭔가 감이 왔다는 오박사 님의 표정 후에 이어지는 솔루션들은 놀랍도록 정확하고 아동인권이나 사회적 인식의 수준들이 높아져서인지 중간중간 아이의 속마음에 집중하기도 한다. 다양한 캐릭터의 패널들이 이래저래 공감과 경험, 놀람을 주고받고 엄마가 눈물을 몇 리터쯤 흘린 후엔 박사님의 솔루션에 따라 훈육하는 연습의 시간을 거치고 결국 아이는 변화한다. 주의가 산만한 아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 아이, 과잉행동을 하는 아이, 특정한 음식이나 어떤 것을 맹렬히 거부하는 아이 등 참으로 다양한 문제 아동들이 나온다. 때론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 미칠듯한 울음소리에 지고 말아 채널을 돌려버릴 때도 있지만 어쩌다 재방송을 보게 되면 대부분 매우 집중하며 이 프로그램에 빠져든다. 왜일까. 나는 아이도 없고 심지어 결혼 생각은 있어도 되도록 딩크로 생을 마감하려는 인간인데 이상하게 이 프로그램에 눈을 뗄 수 없다. 처음엔 그저 오은영 박사의 매직이 많이 신기한가 싶었다. 아니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사 전체를, 그 속에 읽어볼 수 있는 나의 유년시절 그리고 현재의 자아를 모두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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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아동 행동 교정 프로들이 어떤 하나의 주제- 말을 곱게 하지 않는 가족이라거나 비운의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 묻어뒀다거나, 형제자매 간의 갈등을 다룬다거나 하는 단편적인 사연에 집중했다면 이 프로그램에선 꽤나 세세하게 아동, 인간 심리의 디테일을 볼 수 있다. 밥을 잘 안 먹는다거나 식음을 전폐하는 아이의 심리와 타고난 기질, 부모와의 역학관계를 꽤나 디테일하게 분석하고 이에 근거한 솔루션을 내린다.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실은 부모, 특히 엄마인 것이다. 엄마의 성향과 아이의 성향이 대립할 때 나오는 문제점, 산후 우울증이나 체력적 챌린지, 보호자 내면의 트라우마 등 엄마가 가진 고민들을 미처 다 해결하지 못했을 때 아이 그리고 가족으로 번져가는 갈등이 핵심이다. 아주 작은 언어 습관, 좋자고 건넨 애정 표현의 부작용, 머리론 백번 알지만 행동에 옮기는 방법을 몰라 고군분투하는 사이 정도를 넘어 삐뚤어지는 아이와의 관계 등등. 단순히 A로 아이를 키워 B가 되었네요. 틀렸으니 고쳐봅시다가 아닌, 엄마 자신도 몰랐던 자기 안의 모습과 알게 모르게 이를 눈치 보며 자란 아이의 이상행동을 고쳐가는 과정 속에 부모는 부모 안의 상처를 마주하고 그걸 사랑하는 아이에게 답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뭐 그런 인류애 말이다. 하여 이전의 프로그램들 사연보다 훨씬 더 정교한 지침, 아이와의 대화법이나 감정을 읽어주고 표현하고 바로잡는 연습, 엄마와 아이뿐 아닌 가족 안에서의 제대로 된 롤플레잉 들을 연습하는데 난 그걸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의 일상과 다르지 않단 생각을 한다. 그냥 주인공이 엄마와 아이일 뿐 인간사에 모두 적용되는 아주 보편적인, 그러나 실천하기 어려운 문제들 아닌가. 특히나 우리 사회는 어린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보다는 부모에게 종속된 미성숙한 불완전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한데 러닝타임 중 가장 놀랄 때가 아이의 속마음을 엿봤을 때다. 아이는 다 알고 있다. 어린이 정도만 돼도 엄마가 가진 고민과 불안, 가족관계의 기류, 본인의 포지션 그리고 부모의 관심을 끄는 방법들을 아이는 다 알고 있다. 결국 인간 대 인간의 문제인 것이다. 양육자와 피 양육자 사이의 조건 몇 개만 걷어내면 나의 사회생활 혹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들과도 맥을 같이 한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느낀 점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다른 점에 대한 서로의 노력과 새로운 룰을 연습하는 일. 사람이 태어나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란 결국 이 공식 안에 모든 주기를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동심리학뿐 아니라 정신의학과 박사 셔서 그런지 가끔 오박사 님의 코멘트를 듣다 보면 내 이야기를 하나 싶을 때도 많다. 자극에 예민함을 보이는 아이를 코멘트해줄 땐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의 유년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편식왕에 해보지 않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그건 그냥 예민한 아이여서 그랬던 거다. 나이 들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아지고 예전보다 호기롭게 새로운 경험과 좌절을 받아들이는 면 역시 사회성과 경험치가 발달했기에 가능한 일일 거다. 성장도 한계는 있는 것이어서 타고난 기질이란 것은 크게 바뀌기 어려운 것이기에 그런 에피소드를 보고 있노라면 유년기의, 그리고 오늘의 내가 동시에 떠오른다. 아동심리학 박사처럼 날 케어하고 바로잡아주지 않은 우리 엄마에 대한 원망 같은 거라기보다 나의 기질과 성장배경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더하는 느낌이다. 내 상황에 꼭 들어맞는 문제아동이 아니더라도 오박사 님의 솔루션을 듣다 보면 그간 공허하다 생각했던 어떤 부분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나아가 내가 부모라면 저럴 때 어떻게 행동하고 말할지에 대한 몰입이 되기도 한다. 정말로 어렵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니까 자녀계획을 다 떠나서 죽을 때까지 불완전한 한 인간이 자식을 낳고 그를 또 다른 어른으로 키워내는데 드는 노력과 정성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90년대 프로그램처럼 누가 봐도 문제인 집들보단 되려 엄마 아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키워내려고 공부하고 노력하는데 결과치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관계로 이 프로그램에 사연을 접수해야 하는 상황들을 보라. 모두 자식을 사랑해 마지않고 더 좋은 환경 제공을 위해 대부분 맞벌이를 하며 나아가 조부모들까지 육아를 돕는 정성을 다하는데도 말이다.
우리 엄마의 금쪽같은 내 새끼 역시 아직도 성장 중일지 모르겠다. 독립을 하고 경제적인 하나의 주체로 인구 카운팅이 되는 삼십 대가 되었다고 해도 우리 안에 어떤 공간은 아직도 비어있거나 조금 망가져있다. 그 공백을 찾고 고쳐내 충만함으로 채우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엄마가 아니란 점에서 약간의 슬픔이 몰려오기도 한다. 대개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고 배우자나 연인 등 또 다른 나의 가족들로 인해 그 공란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승전결이 뻔한 육아 상담 프로그램 재방을 보면서 문득 오늘의 나를,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