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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 Ception Feb 02. 2021

티칭 매직 표지 디자인

유진 버거의 유산을 표현해가는 과정

책의 표지를 디자인하기 전에 이 책의 원서를 통해 유진 버거라는 사람을 처음 접했다. 군대에 있을 때 원서를 빌려서 읽었는데, 마술을 가르쳐주는 것뿐만 아니라 마술을 가르치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는 것이 이 책을 읽게 만든 이유였다.

〈티칭 매직〉의 공저자 로렌스 하스 박사(왼쪽)와 유진 버거

알고 보니 그는 내가 몰랐을 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마술사였다.


2000년에는 매직 매거진에서 그를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마술사 100  명으로 선정했고,  세계 무대에서 공연을 했으며, 여러 나라의 TV 방송에 수차례 나왔다. 또한, 40 년간 유진 버거는 마술계의 사상가이자 최고의 선생님   명으로도 인정받았으며,   외에도 20권이 넘는 베스트셀러 , DVD, 그리고 마술사를 위한 해법 영상을 출판한 사람이다.   


- 루카스퍼블리케이션 상품페이지 인용


책 속 내용이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도움을 줬는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40여 년간의 선생으로서의 경험은 그가 전하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었고 내게 진정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주었다. 책을 읽은 뒤에 저자의 깊은 식견과 경험을 공유함에 깊은 감사를 보냈다.

〈Teaching Magic〉 원서 표지

〈티칭 매직〉은 그런 유진 버거의 유작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책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저자도 그것을 알았던 것일까? 표지 속 잔잔한 모래의 형태와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저 돌이 유진이 걸어온 발자취와 유산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런 〈티칭 매직〉이 번역이 되어 출판된다는 것, 그리고 그 책의 표지를 내가 맡게 되는 것은 내게 있어서도 정말 뜻깊은 일이었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통해 좋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하고 그가 나눈 유산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티칭 매직〉 번역서는 저자 유진 버거의 공식적인 첫 번째 한국 활동이다. 그렇기에 그의 유작이 된 이 책과 그의 유산을 기념할 수 있는 표지를 만들길 원했다. 유진의 마지막 유산을 기념할 수 있는 그런 표지를.





1차 시안 작업: 디자인 방향성 토의


표지에 대한 요구사항과 전반적인 제반사항을 전달받았다.  


신국판 : 152*225 (mm)

하드 커버, 양장제본


아래는 전달받았던 요구 사항을 정리한 내용이다.

흑백 이미지, 유진 버거의 실루엣 사용

진지함, 진중함, 경건함

고급스러움

저자에 대한 존경심

"유진 버거의 유산"이라는 느낌을 강조



시안 1 : 정면 실루엣 활용
시안 2 : 좌측면 실루엣 활용

1차 시안은 흑백의 실루엣을 사용하자는 요구는 충족했으나, 나머지 요구는 충족하지 못했다.


흑백의 실루엣을 통해 깔끔하고 대비되는 이미지는 표현할 수 있지만,


진지함, 진중함,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급스럽기보다는 모던함에 가까웠고,


"유진 버거의 유산"이라는 느낌을 강조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2차 시안 작업: 단순함과 섬세함


책의 내용은 인자하고 깊이 있는 식견을 가진 저자가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다. 뭔가를 강력히 주장하기보다는 부드럽고 세심하게 이야기한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명확하여 단순하다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굉장히 섬세했다.


그의 인자한 품위를,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내용을 표지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이미지를 고민하던 중 찾게 된 참고 이미지다. 형태는 단순하나 그 속에 섬세한 디테일을 더한다면 앞서 말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진 버거 사진 위에 연필로 스케치

먼저 책을 읽으며 느꼈던 유진의 인상과 가장 가까워 보이는 사진을 골랐다. 그리고 수염의 형태를 대략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스케치를 통해 정했다.

스케치를 바탕으로 진행한 디지털라이징 작업
왼쪽은 스케치를 그대로 옮긴 것이며 오른쪽은 각 요소를 다듬은 이미지다

안경테의 비뚤어짐, 수염의 밀도, 수염을 구성하는 선의 간격, 전체적인 대칭 등 뭉개지거나 불분명해 보일 수 있는 부분을 다듬어서 아트워크의 완성도를 높였다.





프로토타이핑: 최적의 크기 찾기


책 표지는 제목, 저자의 이름, 출판사의 로고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그렇기에 각 요소의 최적의 크기와 위치를 정하는 작업이 본격적인 디자인 작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위 사진은 아트워크의 세로 길이를 5mm 단위로 (100~175mm, 총 15개) 프린트해서 대조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책 사이즈에 맞는 아트워크의 크기와 위치를 찾는다. 아트워크의 위치는 본문의 레이아웃을 참고하여 위치를 정했다.


표지는 검정 종이에 은색 박으로 인쇄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인쇄를 했을 때 선이 뭉개지지 않으면서 수염을 구성하는 선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0.25mm 선으로 이루어진 아트워크를 선택했다.


글씨체와 글씨 크기 프로토타이핑
옆면 글씨 크기 비교

마지막으로, 아트워크와 어우러지면서 책 사이즈에 맞는 최적의 글씨체와 크기를 정했다.

최종 표지
예상도





샘플 제작: 사용할 종이와 박 정하기


앞서 표지는 검은색 종이 위에 은색 박을 인쇄하기로 결정했기에 제작에 사용할 종이와 박을 정해야 했다.


먼저 종이를 정하기 위해 인더페이퍼 매장을 방문했다.

인더페이퍼 매장 안 매대

저자의 수염이 생각났던 것인지 원서의 표지 속 모래가 연상되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약간 까슬까슬하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느낌을 풍기는 검은색 종이를 고르게 되었다. 엔티랏샤, 슈퍼콘트라스트, 디프매트 이 3장의 종이를 골랐다.


이후 각 종이에 은박을 찍어보기 위해 매장 부근에 있는 한성금박연구소에 방문했다. 방문할 당시에는 표지를 제작하기 위한 동판을 만들기 전이었다. 그래서 연구소에 있는 동판 중 하나를 골라 샘플 제작을 진행했다.

 한성금박연구소의 정대선 소장이 인쇄 작업을 준비 중이다(왼쪽) / 각 종이에 3종류의 은박을 인쇄했다(오른쪽)

은색 박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테스트했던 것은 유광, 무광, 크롬 박이다. 같은 박도 인쇄를 하는 종이에 따라 색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샘플을 확인한 뒤, 세 종이 중 원서 표지의 사진 속 모래와 같은 질감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스크래치에 비교적 강한 슈퍼콘트라스트를 선택했다.

왼쪽부터 크롬, 무광, 유광 박 (왼쪽) / 왼쪽부터 무광, 유광 박(오른쪽)

크롬 박의 경우 붉은색이 도는 것을 볼 수 있다. 무광 박의 경우 은은한 은빛이 돌았고, 유광 박은 무광 박에 비해 빛을 더 잘 반사하나 과하지 않게 반짝거리는 느낌을 줬다.


요구사항 중 "유진 버거의 유산"이라는 느낌을 드러내기에 유광 박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자리와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유광 박을 선택했다.







클라이언트를 통해서 〈티칭 매직〉의 공저자 로렌스 하스 박사의 메일을 전달받았다. 그는 표지 속 아트워크가 유진의 성격의 일부분을 정말로 표현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작업한 아티스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내가 담고자 했던 유진 버거의 모습이 전해진 것 같아 정말 기뻤다.

공저자 로렌스 하스 박사에게 받은 메일의 일부분


〈티칭 매직〉은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이면서 처음으로 작업해본 책 표지 작업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비록 한 번도 유진 버거를 만나보지 못했고,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의 존재도 몰랐지만, 나는 〈티칭 매직〉을 통해 그를 만났고 이내 그는 내 마음속에 하나의 큰 존재로 남았다.


표지를 볼 때면 가끔 생각한다. 저자가 마음에 들어했을까? 자신과 정말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물론 그 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표지를 볼 때면 괜스레 궁금해진다.



1. 〈티칭 매직〉감상글 링크

https://brunch.co.kr/@deception/24


2. 〈티칭 매직〉은 〈루카스퍼블리케이션〉에서 출판한 번역서다.

https://lukaspublications.co.kr/product/teachingmag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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