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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Dec 18. 2024

도태가 두렵습니다.

노화와 늙음에 대하여.

연말을 맞이하여,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 사는 친구들과 함께 비대면 만남을 가졌다. 저마다의 사는 이야기와 함께 힘든 이야기를 하던 중, 조용히 있던 한 친구의 고민거리가 와닿았다.


"도태되어 가는 것 같아서 무섭다. 새로운 것을 어려워하는 내가 싫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평범하게 사는 것이 목표라면서, 요동치는 일상보다는 평온한 일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추구하게 되었고, 새로운 것보다 당연스럽게 손이 가는 것을 편해했다. 그러면서 안주하는 내가 성장의 길을 가는 것보다도 도태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감정의 도태

 시간이 흘러가면서 정신적으로 신체적 기능이 약화되면서, 즉- 나이가 먹으면서 노화가 진행되다 보면 여러모로 많이 닳고 닳아, 웬만한 자극에도 열정이 없다. 감정의 기복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나이가 들면서, 평온함을 유지하는 내공을 다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로는 귀찮아서, 생각하기도 귀찮고, 말한들 무엇이 바뀌겠느냐-라는 느낌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좀 크다. 좋은 점도 있지만, 예전에 있던 패기와 열정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타인과 자신의 감정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이해하며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사건에 대해서 의연하게 대처하고 넘기는 나를 바라보며 현명하게 나이를 먹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열정은 예전만치 못하다는 것에 대해 서글픔이 있었다. 이것이 늙음인가, 노화이고, 생기를 잃어가는 것인가 했다.

 이 시간을 부정하고 싶어서, 열정적으로 움직여보자고 했지만, 괜히 에너지만 빼는 것 같아서 더욱 힘겨웠고 힘에 부쳤다. 열정이 없고, 의지가 없다. 큰 사건에 의연하긴 하지만, 외롭고 쓸쓸하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언어의 도태

 힘없는 감정을 가지고, 열의 없는 잔잔한 일상을 살다 보면, 나의 시야가 좁아지고, 생활 반경이 좁아진다. 그러면서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언어의 도태이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단어의 개수, 종류는 한정되어 있다. 점점 단순한 언어만을 쓰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것은 '말'이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단어, 언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나의 생활을 닮아간다. 그러면서 나의 단어들이 '유실'되면서 타인과의 대화에서 그 부족함을 느낀다. 단어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과는 또 다른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부족함은 도태로 느껴지면서, 수많은 언어 중에 내가 쓸 수 있는 단어와 표현법이 적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안목의 도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사람들의 관심거리를 찾아봤다. 소위말하는 트렌드를 맞추고 함께 했다. 경제뉴스를 보면서 주식을 하고, 새로운 종목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급등할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안목은 정확했다는 생각에 삶의 확신이 있었다. 세상을 잘 보고 있다는 것이 생활에 안정감을 주었다. 뒤처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안정감이었다. 요즘에는 세상을 잘 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문화들을 접한다. 보수적인 금융시장도 요동친다. 이 급변하는 세상을 뉴스와 주변인들로부터 간접적으로 접하지만, 정작 나는 그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예측조차 하지 못한다. 세심하게 들여다볼까 하면 머리부터 지끈거리게 된다.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 대하여 안목이 사라지고, 홀로 방 한편에서 세상과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예전과는 다른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남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나의 도태에 대하여 말이다.


 적자생존(存)이라 하였다.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하는 현상에 이르는 말로,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잔인하고도 인정해야만 하는 말일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늘 새로운 세대들이 나온다. 거듭되는 실수,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도 불필요한 것은 거두고 발전해 가 나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그러다 보니 도태에 대한 불안감은 클 수밖에 없다. 도태되지 않으려 부지런히 움직이고, 노력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지런히 움직이고 노력한다는 것은 내 정신과 체력을 부단히 쏟아내야 함에 지쳐간다. 난이도의 극복이 힘들어진다. 그러다가 포기하는 순간이 올 때쯤. 내가 늙었음에 슬퍼한다. 내적슬픔이다. 외모가 늙지 않았음에 기뻐할 것이 아니었다. 나의 생기 잃은 에너지에 슬펐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의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응원하고, 이해하지 못할 감성을 공감대신 구경하며 신기해할 때, 나의 지난 젊은 날이 그리워진다. 

 '세월'이라는 두 단어에서 늙음과 노화를 느낀다. 늙지 않으려, 노화를 막아보려고 애쓰는 것에 피로함을 느낀다. 포기하지 말아야지, 놓아버리지 말아야지, 하지만- 갈수록 쏟아지는 온갖 에너지를 어찌 보고만 있으랴,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아껴다가 일상생활에 잘 쓰이게 해야지. 하는 아까움마저 생긴다. 그렇게 아낀 에너지는 일상에 도움은 되지만, 도태되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도태는 나쁜 것인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좋다 나쁘다 할 것이 맞는가. 


나에게는 아직 어린 동생이 있다. 그래서인지 동생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참-어리고, 젊다'이다. 무지함에 대한 염려와 패기 넘치는 열의에 대한 부러움이 묻어나는 말이다. 동생은 나에게 '늙었다'라는 말을 툭툭 던지곤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을 도전하지 않는 나의 안주를 좋지 않게 본다.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워야지, 알아야지, 이해해야 지는 하지만 쉽지가 않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나의 도태를 나쁘게 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세월을 받아들이는 나에게는 도태가 당연히 두려운 것은 맞으나, 불필요한 것을 줄이면서, 나의 감정을 지키고, 나의 체력을 비축할 줄 알고, 적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는 조용한 도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안다. 도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생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의 도태는 후세에게 많은 것을 알려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라는 막이 올랐을 때, 길고 긴 갈등 조성보다도, 조용하게 퇴장하는 과정인 것이다. 퇴장은 아쉬움이 많다. 더욱더 오래 밝은 빛에 서있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밝은 빛에서 내려와 추억을 한다. 퇴장은 그렇다. 퇴장한 무대를 뒤로하고, 추억하며, 사람들에게 짧은 환호를 받다가, 무거운 의상을 벗고, 두꺼운 화장을 지운다. 그렇게 내려온 무대를 뒤로 하고, 다시 무대에 오르기 위하기보다, 새로 시작된 극을 보기 위해 관람석에 착석한다. 그것이 늙은, 노화를 받아들이는 세대의 모습이다. 이렇게 생각하자면 도태라는 것은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 않는다. 편안하게, 또는 불안하게 관람을 하겠지만, 나의 지정석에 앉아서 보는 이 세상은 무대에 있을 때보다는 몸도 마음도 안락하다. 


도태는 두려운 게 맞다. 내가 이렇게 뒤쳐지다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도태가 되는 것이지 정체되어 멈추어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도태도 결국 옛것으로 자연스레 흘러가다 사라지는 것이 인데, 이는 썩어 사라지는 것보다, 또는 썩어서 누군가에게 치워지는 것보다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도태는 세월을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뒤쳐짐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쓸모 없어짐이 아닌, 쓸모가 다 되어가는 것이다.

나의 지난 과거들이 현재의 나를 위로할 것이다.

나의 끝에 슬퍼하기보다, 다른 이의 시작을 응원하며 

대신 설레어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그렇게 우리는 도태를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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