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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리 삼번지 Apr 17. 2023

삼십 대의 권태기

(부제: 안녕, 30대는 처음이지? - 11. 고백할 게 있습니다.)


마냥 좋을 것만 같은 백수 생활에도 권태로움이 있느냐고?

배부른 소리겠지만, 물론이다.

직장인 시절의 권태로움에 비할 바가 되지 않지만 말이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에,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하던 말이 있다.

"바라는 건 없고, 그냥 놀고먹고 싶다."


거창한 꿈은 없었고, 매일 똑같은 출퇴근을 반복하는 게 지겹고 벅찼다. 늘상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힘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힘들었다. 그저 쉬고 싶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권태로운 현실을 하소연하기 바빴다. 그들과 나의 하루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있다는 건 꽤나 큰 힘이 된다. 자조적이기도 한 동병상련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다. 동지들과 유대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들과의 카카오톡 대화방은 주 5일제다. 월요일 아침에 시작해, 금요일 저녁에 끝이 나는 패턴이다.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시작된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서운해하거나, 지적하지 않는다. 기운 없는 출근길 인사로 시작해서 점심메뉴와 같은 사소한 이야기, 흉흉한 회사 욕까지, 하루의 마지막은 항상 퇴근길 지옥철을 비난하는 대화로 끝난다. 별 것 아닌 대화지만, 같은 시간과 감정을 교류하는 굉장한 힘과 위안이 됐다. 우리의 공통 메시지는 하나였다. "존버하자!" 각자의 조직을 힐난하더라도, 서로의 존버정신을 응원했다. 늦게나마, 나를 버티게 해 준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직장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농담으로 하던 말이 있다.

"만약에 저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 안 하면 '아, 얘가 로또 됐구나~' 하시면 돼요."

로또. 직장인의 꿈과 희망이자 일주일을 버티게 하는 종이 한 장.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한 장씩 품고 다니는 사직서와 함께, 그 작은 종이 한 장을 나 또한 품고 다녔다. 로또 1등의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내 품 속에서 먼저 꺼내진 건 사직서였다. 억대 당첨금으로 놀고먹는 꿈보다, 현실에서 숨 좀 쉬고 싶었다. 이제와 설명한들 비겁한 변명이겠지만, 나는 현실에서의 도망을 선택했다.



나는 희한한 성미로, 뜻밖의 경우에 의외로 호불호가 강하다.

사람의 경우, 그에게 아주 조그만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면, 종국에는 그와 거리를 두게 된다.

음식의 경우, 처음으로 마주친 생김새가 별로면, 맛이 어떻건 입에도 대지 않는다.


예외 경우도 있다.

이미 입사 초기에 회사생활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하루하루를 버텼다. 사실, 고생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일종의 정신승리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안 힘든 게 어딨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점점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웬만하면 회사에서의 힘들었던 감정은 퇴근 이후 잊어버리는 편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좀처럼 그게 어려웠다. 그래도, 그렇지만, 나는 버텨보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회사 이야기로 열을 올리던 중, 상대방의 대답은 의외였다. 마치 뒤통수를 맞은 듯 띵했다. 너의 회사생활이 나쁘다, 나쁘다 생각해서 진짜 나빠진 거 일수도 있지만, 흘러 보낼 수 있는 장점 아닌 장점조차 없는 곳이라면, 퇴사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래, 그게 맞다. 불평, 불만을 일삼게 되는 곳에서 어떻게 자기 계발을 할 수 있을까? 투덜대면서 평생을 살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깝다.


나는 회사에서의 존버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백수가 되면 뭐가 좀 달라질 줄 알았다.

퇴사를 하고, 처음 한 두 달간은 마냥 즐거웠다. 출퇴근 걱정 없는 아침, 저녁이라니. 이리도 쾌적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N년간 일한 대가로 받은 퇴직금까지 통장에 들어오고 나니, 그때의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거 없는 용기가 마구 솟아올랐다. 무엇보다 좋은 건, 평일 낮에 가는 병원, 은행, 카페다. 회사에서는 금보다 귀중한 '휴가'를 반납해야만 가능한 것들이다.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볼일을 보고 있자니, 해방감이 느껴진다. 이리도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스스로가 제법 웃겼다.



몇 개월이 지난 나는 여전히 백수다.

여전히 로또 하나에 기대를 품고 일주일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또한, 마냥 놀고먹고 싶은 건 여전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백수 생활의 권태로움을 논하자면, 맞다. 나는 요즘 권태롭다. 평일 낮에 느끼던 소소한 즐거움이 일상이 된 탓일까? 권태로움을 깨닫자, 자책감이 몰려온다. 이건, 지난날의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닐 것이다. 깨어 나와야 한다. 부끄럽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 적어 내려가는 이유는 하나다. 백수라는 타이틀 아래, 권태로움을 즐겼던 건 아닐까 하고. 지금의 권태로움은 사치일 뿐이다. 애초에 내가 백수가 된 이유를 다시 상기해 보자. '진짜 나'를 찾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여전히 나는 나다.


내가 무언갈 노력하지 않는 이상, 용기를 내서 움직이지 않는 이상 달라지는 건 없다. 회사에 있을 시간에 주로 내가 하는 건 청소와 책 읽기, 글 쓰기, 그리고 (막학기) 과제다. 사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여유롭지만 마냥 여유롭진 않다. 시간적으로 여유롭지만, 백수 기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의 여유를 찾기 어렵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급할수록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나는 더 이상 어리숙한 실수를 하고 싶진 않다.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야 한다. 주변에서의 걱정 섞인 목소리는 마음 한켠에 넣어두자. 그들의 의중이 어떻든, 선한 의도만을 필터링하여 훗날 나에게 위안을 주도록 하자. 내 목표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리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그림을 그려보자. 물론, 천천히 가도 된다. 



오늘도 나는 나만의 속도로, 방향성을 찾아, 지향점을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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