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맛의 지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근 Jun 05. 2022

괜찮아, 한 잔 하고 넘어지면 안 아파

코로나 블루 극복기 혹은 슬기로운 빠지생활(feat. 맥주)

# 1 (2019년 12월)


"지이이잉-"


[외교부] 중국 원인불명 우한폐렴 확산. 체류자 안전유의.

2019.12.28. 19:02




# 2 (2020년 4월)


  빌어먹을 코로나. 남편과 계획한 '50년 할부 세계일주' 잠정 연기. 여름 휴가 계획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고약한 도둑. 그 어렵다는 포도알(방탄소년단 콘서트 좌석을 일컫는 은어)이 당첨됐는데 손꼽아 기다리던 서울 공연 취소. 마스크 품귀현상. 일주일만에 400원에서 5000원까지 치솟는 일회용 플라스틱 쪼가리의 가격. 게다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면서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 보다 심리적 거리가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켰더니 생활용품 사재기를 하다가 발생한 미국의 폭력 사건이 보도 되고 있었다.


나 "야, 우리 에티오피아 못 가겠는데? 다나킬이고 뭐고 뉴스보면 세상 끝날거 같다. 예수님 곧 재림하실 듯."

친구 "또 겁나 극단적인 소리 하네. ㅎㅎㅎ 근데 세상이 이렇게 재미없는 곳이었나?"

나 "그러게. 뭐 재밌는 거 좀 없나?"

친구 "날도 더운데 물놀이나 갈까?"

나 "다대포 서핑갔을때 사람이 무슨 개미떼보다 많드라이가. 물 반 사람 반. 딱 코로나의 온상아이가."

친구 "통영에는 사람 좀 없을거 아이가"

나 "코로나 코로나 해도 욕지도 가는 배는 미어 터진다드라. 그래도 한번 찾아볼게."




# 3 (2020 7~2021 9)


  우연히 해안가 산책을 하고 있는데 웨이크보드 운영하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몰랐지? 집에서 10분만 걸으면 바다가 있는데. 심지어 내가 사는 아파트 작은  창문으로 빠지가 보이는데 말이다.  바로 친구를 통영으로 소환시켰다. 웨이크보드는 1 탑승에 2 5천원. 초보자는 무조건 6만원짜리 코스부터 시작하는게 룰이라고 한다. 그래야 겨우   있을 거라고. 사장님은 특별히 3 태워줄테니  안에 서라는 미션을 주시며 서비스로 탬버린까지 태워주기로 하셨다.


나 "이거 어렵나요? 아니.. 넘어지면 많이 아픈가요?"

사장님 "아스팔트에 넘어져야 아프지. 물에서 넘어지는건 안 아프다."

나 "사장님 저 진짜 몸친데 괜찮을까요?"

사장님 "걱정마라. 일어날 때 까지 태워준다."

나 "그래도 못 일어나면 어떡하죠?"

사장님 "에헤이.. 이 아가씨 진짜 말도 많고 걱정도 많네. 몸이 가벼우면 물에 잘 떠. 지금 봐서는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뜨겠네. 혹시 물놀이 좀 해봤나? 서핑 같은거 할 줄 알면 금방 일어난다."


  친구와 나는 지난 여름 발리에서 배워온 서핑이 도움이 되기를 빌었다.



  물에 들어가기 앞서 지상훈련을 받았다. 기둥에 묶인 삽자루 모양의 손잡이를 어깨너비로 잡고 다리에 힘을 주고 앉아 있는다. 힘을 너무 세게 주지도 풀지도 않으면 저절로 물에 뜬다. 그때 천천히 일어서면서 중심이 되는 발을 앞으로 두고 보드를 돌린다. 몸은 정면의 줄이 묶인 곳을 바라본다. 아래를 보면 넘어진다. 무릎은 조금 굽혀 스프링처럼 탄력을 받는다. 몸을 꼿꼿하게 세우거나 줄을 당기면 넘어지기 쉽다. 물에 들어가면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지상에서 연습한대로 움직인다.


사장님 "니는 와 줄을 자꾸 땡겨서 넘어지노"

나 "넘어질까봐 무서워서요. 아까 물에 패대기 쳐졌는데 너무 아프던데요? 아직도 골이 흔들려요."

사장님 "자, 한 잔 해라. 술 한 잔 쭉 들이키고 넘어지면 하나도 안 아프다"

나 "이래도 되나요? 음주 라이딩 아닌가요? 사장님이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는거 같은데요"

사장님 "에이그.. 운전을 니가 하나? 배가 하지. 니는 그냥 가만히 줄만 잡고 따라 가면 되는건데"


  맥주도 한 잔 했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으로 여러번 물에 빠지길 반복하다 보니 금방 보드 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사장님은 방금 태어나 첫 걸음을 내딛는 송아지 같다고 했다.) 처음에는 손에 힘을 안주고 어떻게 줄에 끌려 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곧 잡고 있던 줄에 익숙해지고 다리가 물 위에 있는 것이 편안해졌다. 마치 수영을 어떻게 하는 지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일단 해보면 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 처럼.


"사장님, 진짜네요. 한 잔 하고 넘어지는거. 생각보다 괜찮네요. 다시 하다보니 결국 되네요."


  웨이크보드  경험. 얼마나 손에 힘을 주었던지 다음  출근해서 업무를 보는데 키보드를 두드리기 어려웠다. 마치 손가락이 움직일  마다 조율이   피아노처럼 손가락이 무겁고 삐그덕 거렸다. 허벅지 뒤와  종아리는   그렇게 당기는 건지. 나도 모르게 걸음이 자꾸만 고장난 로보트처럼 움직였다.  삭신이 쑤시는데 80 넘은 우리 할머니가 생각났다. 몸이 고통스러우면 뇌에서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고 했는데. 그래서일까? 친구와 나는   이후 중독이라도   수시로 빠지를 드나들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이라는 것을 잊게 하는 시원한 바람. 갤러리(다른 사람들이 라이딩 하는 것을 배 위에서 보는 행동) 할 때 느껴지는 배의 덜덜거리는 진동. 푸른 바다의 짠내. 바람에 날려 두 뺨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소금기가 가득한 몸을 민물에 헹궈낼 때의 개운함. 또 다시 이글거리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후덥지근함. 빠지에 둘러 앉아 나누는 시원한 맥주캔. 맥주가 얼마나 차가운지를 미리 알려주는 송골송골 맺힌 이슬. 식도를 타고 흐르는 탄산의 청량감에 저도 모르게 나오는 감탄사. 한 컷 (정해진 한 바퀴를 도는 거리로 1회를 의미) 더 타면 분명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 무릎을 용수철 삼아 파도를 견디고 거품을 넘어 갈 때의 두근거림. 엣지(보드의 가장자리)를 세워 힐(발꿈치)과 토(발가락)를 쨀 때(빠르게 움직이는 것) 느껴지는 스피드. 복잡한 생각 따위는 저절로 머리속에서 지워지는 해방감.


친구 "와.. 해외여행 안 가도 되겠는데?"

나 "ㅇㅇ 올 여름 왜케 재밌노"

친구 "심지어 해외여행 다닐 때 보다 더 쌈"

나 "ㅇㅇ 그렇게 생각하니 하나도 부담이 안 되네"


  그렇게 친구와 나는 점점 빠지에 방문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여름 내내 빠지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빠지에 피리를 불었다. 남편, 친구들, 테니스 동호인들, 회사 후배들... 만났다 하면 모임장소는 빠지였다. 슬기로운(?) 빠지생활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우리는 직장을 관두고 수상레저 사업을 하자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짧고 강렬했던 욕망에 이끌린 우리는 틈틈히 필기공부를 하고 실기시험을 위한 배운전도 배웠다. 자전거도 못 타고 자동차 운전면허도 2종 보통인 내가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면허 1급을 따다니.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웨이크보드를   저녁이면 친구, 남편과 셋이 둘러 앉아 항상 맥주를 마셨다. 오늘의 라이딩을 복기하며 오늘은 알리(파도를 타고 점프에 도전하는 것)에 도전해볼걸. 성호 라이딩 엄청 늘었던데 아버지가 빠지 사장이라니 과연 웨이크보드 금수저답다. 중국인 언니 자격증 따고 바로 수상바이크 샀던데 진짜 멋있더라. 우리도 바이크 사서 제주도 가자. 야, 그러다 우리 뉴스 나와. 깔깔깔. 그건 그렇고 아까 니 얼굴로 넘어질때 얼마나 웃겼는지 아냐. 깔깔깔. 그런데 진짜 사장님 말대로   하고 나면 하나도  아픈거 같지 않냐. 소주보단 특히 맥주가 효과가 있는거 같아. 깔깔깔. 친구와 내가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으이그. 그거 완전 술꾼들이 하는 말 아니냐. 그러고 우리는 또 웃기다고 깔깔깔.


  과연 맥주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바다의 짠기를 산뜻하게 씻어내고 후덥지근한 열기를 날려버리는 힘이. 여름날의 맥주는 술에 취하게 하기 보단 각성을 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더운 날일수록 더더욱. 그리고 사장님의 한마디 "괜찮아, 한 잔 하고 넘어지면 하나도 안 아파"는 우리의 유행어가 되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야, 괜찮다. 한 잔 하자. 넘어져도 안 아프게." 하며 서로를 위로 했다. 시답잖은 농담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들은 날은 이상하게 '그래, 넘어지면 그 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풍선처럼 부풀었다. 인생의 파도가 아무리 세게 찾아와도 까짓것 한 템포 쉬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파도야 네 아무리 세봐라. 침 한 번 크게 꼴깍 삼킬지언정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너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다.




# 4 (2022년 6월)


나 "이번 주말 비 안오면 빠지 고?"

친구 "ㅇㅇ 콜"





통영 빠지, 웨이크보드
합천 빠지, 웨이크서핑
친구와 함께 동력레저수상기구 조종 1급 면허를 딴 날


매거진의 이전글 내 마음 속 영원한 별, 멍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