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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근 Mar 02. 2024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직장편

  핸드폰에 낯익은 번호로 부재중 기록이 찍혀 있었다. 휴직 중이던 학교의 교무실 번호였다. 수화기 너머 새로 부임하신 교감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출산하려면 한 달 남짓 시간이 있네요. 산전 육아휴직 종료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출산휴가 신청을 위해 복직원을 내야 합니다.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다음 주 중에 학교에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관리자는 코로나와 독감이 유행하고 있음에도 대면으로 서류를 제출하기를 원했다. 이곳이 시골이기 때문일까, 초등학교 특성일까. 반복되는 하혈과 자궁수축으로 응급실을 들락거리던 임신기. '절대침상안정(ABR, Absolute Bed Rest)'이라는 처방을 받고 22주부터 사용가능한 자궁수축억제제를 12주부터 달고 있던 내 몸과 뱃속의 아기가 걱정되었다. 대학병원 교수님으로부터 "이제 만삭이니 무슨 일이 생기면 낳으면 된다"는 무섭고도 안심되는 말을 들은 후에야 배를 쓰다듬으며 '교감선생님도 바뀌셨는데 한동안 뵐 일이 없으니 인사드릴 겸 다녀오면 되겠다.' 좋게 생각해보려 했다.


  "교무실에 나눠 드시라고 사 왔어요." 부끄러운 손을 가리기 위해 롤케이크 두 개를 사들고 교무실을 찾았다.  초면의 교감선생님께선 "교무실이 어떻게 빵을 먹나요? 교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먹는 거지." 하시곤 만족의 웃음을 지으셨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따라 지었다. 교감선생님은 미리 준비해 두신 종이 두 장을 가져오셨다. 온라인 행정절차에 스캔해서 들어가는 종이 문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60km를 운전해서 갔는데, 제출해야 할 서류에 고작 도장 두 개만 찍으면 끝이라니 허무했다. 전자문서를 위한 시스템이 있는데 왜 중복으로 종이문서가 필요한 걸까. 교감선생님은 전임 교감선생님께서 보관 중이시던 내 도장을 돌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저는 이런 거 보관 안 해요. 서류도 상호 확인을 해야 하니 꼭 대면을 해야 하고 도장은 직접 찍어야죠." 틀린 말도 아니고 나는 초면의 교감선생님이 소위 말하는 FM 스타일이시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 달 뒤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출산한 지 한 달이 되었으니 육아휴직 관련 서류를 제출해야 함을 알려주는 전화였다. 이번에도 서류를 가지고 직접 방문을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방문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재가하여 3시간 이상 거리에 거주하시고, 시댁은 일 때문에 아이를 돌봐주실 여력이 없고, 남편은 시험관 시술과 배우자의 잦은 입원 등으로 연차휴가를 모두 소진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는 2시간 30분 간격으로 모유수유를 시도 중이라 아기 옆을 떠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근무지가 같은 도시 안에만 있어도 괜찮았을 텐데, 도로에서 보낼 시간만 왕복 두 시간. 아무리 빨리 도장을 찍고 온다고 해도 아기는 엄마를 기다리느라 굶주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2시간 30분 간격으로 수유한다는 것은 수유 후 다음 수유까지 2시간 30분의 텀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 수유 시작 시간부터 다음 수유 시작 시간이 2시간 30분이라는 의미다. 신생아의 경우 30분 내외 수유를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수유를 하지 않는 시간은 2시간 미만이다.) 50일도 안된 아기를 장시간 이동하는 차량에 태울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통화하는 동안 옆에서 아기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설명이 길어지는 게 싫어 일단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휴직 서류 대면', '휴직 학교 방문'과 같은 단어를 온라인 <교사맘> 카페에 검색했다. 요즘은 방문하는 학교가 거의 없고 우편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은데, 학교마다 분위기가 달라 교장이나 교감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무리 학교자치 단위의 재량권을 허용하는 시대라지만 교직원의 처우가 관리자의 입맛대로 흘러가도 상위기관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나와 같은 불편함을 다른 사람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비슷한 선례를 만들고 싶지 않아 최대한 학교를 방문하지 않는 쪽으로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죄송한데, 제가 어떻게라도 학교에 방문해보려고 했는데 방법이 없어서요. 혹시 서류를 완성해서 우편으로 보내도 괜찮으실까요?" 교감선생님은 안된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기분이 언짢아진 나는 "꼭 서류를 대면 제출해야 한다는 교육청 지침이 있나요?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이전 교감선생님께서는 출산 후에는 방문이 어려울 경우가 많으니 도장을 미리 맡겨두라 하셨었거든요."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의 목소리 톤은 더욱 날카롭게 바뀌었다. "공문 어디를 찾아봐도 그런 지침은 없지요. 그런데 선생님, 휴직과 같이 중. 차. 대. 한. 일. 을 앞두고 관. 리. 자. 에게 인. 사. 도. 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제. 20. 년. 교. 직. 인. 생. 에서 처. 음. 봅니다. 앞으로도 직장 생활하려면 아이를 봐줄 사람이 필요할 텐데 이참에 한번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방문 및 서류 제출은 이번 주에 끝나야 하고요. 일정을 잡으셔서 연락 주세요. 그럼 알아들은 걸로 알겠습니다." 끊어진 전화기를 붙잡고 나는 억울함과 당혹스러움에 목이 메었다.


  일주일이 지나 나는 학교에 방문했다. 그동안 아기를 돌봐주셨던 산후도우미와 일정을 맞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수유시간을 맞추기 위해 젖을 물리자마자 출발해 부지런히 자동차 액셀을 밟았고, 종종걸음을 걸었고, 말도 빠르게 최대한 적게 했다.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이렇게 중요한 서류를 우편으로 보낸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우편배달 사고가 날 수도 있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육아휴직 신청서 서류에 도장을 찍는데 교감선생님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미 은행에서 여기저기 팔아넘긴 개인정보일 텐데 주민등록등본 한 장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 서류라고. 그리고 우리나라 우편 서비스가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거 아닌가? 작년 출산 인구가 200명밖에 되지 않아 10년 안에 학교의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아야 하는 이 도시에서, 그것도 초등학교 관리자가 조금의 융통성도 발휘하지 못한다니 왜 우리나라 출산율이 이모양인지 알만하다. 갖은 말들이 입 앞에 맴돌았지만 삼킬 수밖에. 서류 작성이 끝나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뒤통수에 화살처럼 내리 꽂히던 마지막 말은 잊을 수 없다.


"서류는 분명 함께 검토한 거니까 교육청에 올려보고 혹시라도 문제가 있어 반려되면 재방문해야 하는 거 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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