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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화 Dec 04. 2020

#8 당신을 대표하는 숫자

우리는 숫자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있던가



인생에서 종종
숫자가 한 사람을 대표한다.


출처: pixabay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갓난아기 때는 O개월이냐에 따라 엄마가 나에게 주던 이유식이 달라졌을 것이다.


 학생 때는 O학년이냐가 나를 대표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내 기억 속에 처음 만난 어른들은 제일 먼저 "몇 학년?"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했다. 그들은 보통 부정적인 놀라움으로 반응했다. 그들이 기대하는 외적 성장에 늘 못 미치는 작은 키와 왜소한 몸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고모는 동성의 친척 동생 이름을 거론하며

"너 O학년인데 가 그게 뭐야. 동생인 OOO는 O학년인데 키가 벌써 OOO인데. 너 그러다 따라 잡혀. 큰일 났네."라고 만날 때마다 나의 뒤쳐짐을 알려줬다.  


 학생은 O학년에 기대되는 행동을 해야 다. 혹시라도 그 숫자에 기대되는 행동을 하지 못해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이 날 때 "너 지금 O학년이나 되어가지고!"라는 말을 들었다. 초, , 고등학교 그리고 성인이 된 대학교 시절까지도 학년은 나를 소개하는 데 있어 참 중요했다.

 시험을 보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시절에는 내신성적이, 수능 등급이 나를 대표하는 숫자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취업을 할 때는 토익점수 자격증 개수가 내 이름보다 중요한 것이 되기도 한다.

 

 가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어떤 인물을 설명할 때 숫자로 말하는 걸 들었다. 그 사람연봉이 O천인지. O평 그리고 O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인지, O천짜리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인지.


 그래도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나를 대표하는 숫자가 있다. 그것은 '나이'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그 숫자의 힘은 좀 더 강한 것 같다. 예를 들면, 해외에 거주하거나 여행을 할 때 만난 외국인과는 먼저 친구가 되고 나중에 나이를 묻곤 했다. 나보다 20살 30살 많은 사람도 친구가 돼서 같이 여행 다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나이를 먼저 묻고 그다음에 친구가 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은 내게 몇 살이냐고 묻지 않는다.

 


 30~40대로 추정되는데 자세한 나이를 묻기에는 좀 어렵나 보다. 오히려 이런 '숫자'를 더 궁금해한다.

"아이가 몇 명이예요?"

"째가 몇 살이에요?"(첫째가 있는지도 묻지 않고)


 지인들도 종종 묻는다. 결혼한 지 몇 연차인지.

"결혼한 지 몇 년 됐지?"

"너 결혼한 지 O년 됐잖아.

오늘 만날 때 너 임신해서 오는 줄 알았어."


기계로 난소나이를 산정하지 못하는 수치

 


 난임 병원에서는 내 나이보다 더 다양한 숫자가 나를 대표한다. *AMH, *FSH, *E2, *NK CELL 등등. 그중에서도 특히 AMH와 그 달의 FSH 수치 1순위와 2순위이다.


 정상적인 수치라면 한자리 숫자여야 할 AMH가 0.02라는 소수점 두 자리 숫자라서 그런지 어느 병원 어떤 의사를 만나 그 숫자를 강렬하게 인식한다. 가장 오랫동안 나를 대표한 내 나이보다도. 정상수치의 1/100 그리고 20년을 앞서가는 수치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AMH는 1화, FSH는 5화를 참고.
E2: 에스트라디올
NK CELL: 자연살상세포

 

 또 10 이하여야 하는 FSH가 60에 다 달았다며 이번에는 반대로 너무 높은 숫자가 나를 대표하기도 한다. FSH가 이 수치로 계속 나온다면 시험관 시술을 완전히 포기하고 난자공여(현재 우리나라에서 불법)나 입양이나 딩크족을 고려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선택 중 잘못된 선택은 단 하나도 없다. 단지 내가 원하는 선택이 보기에 없을 뿐이다.

 



 나는 생각해본다.
우리는 숫자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있던가.



 족쇄 같은 0.02란 숫자가 아니더라도, 내 삶에서 나는 숫자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그 숫자들은 허락도 없이 나를 대표하고 타인이 나를 판단하게 만들었다. 그리 내가 사는 사회는 그 숫자에 기대되는 삶이 분명한 편이다.


 O살에 키가 얼마큼 크지 않으면, OOOcm의 키에 체중이 OOkg보다 더 나가면, 나이가 OO대인데 OO사이즈를 입지 못하면 지적을 받았다. 나 스스로를 지적하기도 했다.

 나는 O살에 졸업하지 못했고, O살에 취직하지 못했고, O살에 정규직이 되지 못했고, O살에 결혼하지 못했고, O살에 임신하지 못했다.


내 삶은 늘 '사회적 시계'에 맞추지 못했다.




출처: pixabay


 오후 12:30, 무엇이 떠오를까?


 

 점심시간?

 배가 고프지 않아도 12시 반이라서 밥을 먹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바빠서 못 먹는 사람도 있, 다이어트 중이라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혹은 배가 고파 오면 그때가 돼서야 점심을 먹는 사람도 있다.

 또 이 세상 누군가는 배가 너무도 고픈데 원치 않게 굶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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