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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May 05. 2024

변두리의 믿음, 담담한 불안

알베르 카뮈, 『이방인』

    불신도 하나의 믿음이다. 어느 영화의 한 줄 평으로 쓰인 이 문장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관통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무엇이든 불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뫼르소의 경우 그 대상은 의미다. 그의 모호한 태도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은 모두 의미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다.

    비단 뫼르소뿐만이 아니라, 두 번의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의 비극, 기계화‧산업화로 인한 인간중심주의의 붕괴를 겪으며 서구 사회 전체는 거대한 회의에 잠식당했다. 대의나 위대한 목적에 대한 믿음은 해체되었고,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믿음이 싹을 틔웠다. 의미는 곧 불가해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치환하려는 시도이자 설명이고, 따라서 언어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자연히 의미에 대한 의혹은 언어의 공허함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 아래 쓰인 5, 60년대 서양 문학에서는 권태의 정서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방인』 역시 당대의 흐름과 동질적으로 지겨움이라는 핵심 정서를 부각하며, 무의미한 관습과 허례허식을 고발하고, 언어적 소통의 불확실성을 서사의 중심 소재로 내세우는 작품이다.


말과 침묵과 신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술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를 통해 ‘텅 빈 언어’의 개념과 관련해 흥미로운 논증을 펼친다. 그는 언어가 실재와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언어는 “인간에 대한 사물들의 관계를 표시”하기 위한, “본래의 본질들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비유들”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비유는 개체 간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형성되고, 이렇게 형성된 언어로 인해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각각의 단어가 지시하는 하나의 원형적 개념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유동적인 한 무리의 비유, 환유, 의인관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적, 수사학적으로 고양되고 전용되고 장식되어 이를 오랫동안 사용한 민족에게는 확고하고 교의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적 관계들의 총계이다. 진리는 환상들이다.
    우리는 진리를 향한 충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까지 사회가 실존하기 위해 세워놓은 ‘진실되어야 한다’는, 즉 관습적 비유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책무에 관해서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표현하자면, 확고한 규약에 따라 거짓말해야 한다는,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양식으로 무리 지어 거짓말해야 한다는 책무이다. 그런데 인간은 물론 사태가 그러하다는 것을 잊는다. 그러므로 그는 언급한 방식대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수백 년 동안의 습관에 따라 거짓말을 한다. 인간은 바로 이 무의식성을 통해, 즉 망각을 통해 진리의 감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때 도달하는 ‘진리’는 실제의 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환상, 혹은 “인간이라는 한 근원적 음향이 무한히 굴절되는 반향”으로 주관적이며, 따라서 니체는 올바른 지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뫼르소가 늘상 “아무 이유도 없었다”든지 “별 차이가 없다”라고 무심하게 진술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내재한다. 언어는 확고하거나 명확하지 않으며, 어긋나고 미끄러진다. 타인의 의중을, 감정이나 의미의 실재를 확신할 수 없는 불신의 세상에서 뫼르소가 선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침묵이다.

영화 <이방인>, 1967 (출처 : Panorafilm)

    눈여겨볼 만한 점은, 소설의 서술 방식이 뫼르소가 세계를 인식하는 경향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고받는 대사를 통한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말, 사건과 상황은 뫼르소의 입(혹은 손?)에 의해 ‘기억’으로서 재현된다. 그리고 뫼르소의 이마를 향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은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비현실감을 강화한다.

    모든 것을 불신하고 꿈을 꾸듯 살아가는 뫼르소에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움직이는 인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심의 대상이다.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이는 작은 여자와 고집으로 뫼르소에게 뒤지지 않는 부속 사제가 그 예시다. 그러나 첫 문장에서 명시했듯, 불신도 하나의 믿음이다. 마지막 장면, 부속 사제와의 논쟁에서 뫼르소는 그와 자신이 다를 바 없음을 깨닫는다. 사제는 종교라는 신앙으로, 뫼르소는 의심이라는 신념으로 무장하고 부조리한 이 세계의 급류를 헤쳐나가고자 안간힘 쓰는 동족인 것이다. 그리고 신앙이란 결국 외부세계를 여과하는 필터, 즉 개별 존재의 세계관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 뫼르소 역시 꼭 부속 사제만큼이나 종교적인 인간일 수밖에 없다.


시간이 건져 올린 실존


    침묵으로 이어져 온 아슬아슬한 균형이 파괴되는 순간, 즉 다섯 번의 총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뫼르소는 이제껏 외면해 온 부조리를 대면하게 된다. 세계에 대한 자신의 불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오자 뫼르소가 마주친 것은 그를 놀라게 할 정도로 커다란 증오심이다. 사회는 자기만의 이해할 수 없는 법칙에 따라 그를 처리하며, 그 과정에서 당사자인 뫼르소의 존재는 지워진다. 제로가 되고 대체되어 사회로부터 유리된 상황에서, 뫼르소는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다.

(출처 : Harvard Film Archive / The New York Times)

    감옥에서 뫼르소의 일상은 회상으로 채워진다.


어제 또는 오늘이라는 단어는 내게 의미가 지켜진 유일한 것이었다.


    이때 뫼르소가 어제 ‘그리고’ 오늘이 아닌, 어제 ‘또는’ 오늘이라고 서술한 이유는, 그의 오늘이 어제의 기억으로 정의되고, 따라서 현재가 과거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앞으로 일어날 일, 오늘 또는 내일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찬가지로 위의 문장에서, 뫼르소는 (혹은 카뮈는) 다시 한번 현재를 미래로 대치한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불완전한 인지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세계의 운행을 설명하려는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과거와 미래의 도움을 받아야만 현재라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착각)할 수 있다. 현재는 포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과거로 흩어져 버리고, 아니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채 미래의 영역에서 다가올 준비를 하고 있기에.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 폴 세잔, 1895 (출처 : Paul Cezanne)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매 순간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으며, 따라서 본질을 결정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자아와 시간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자아는, 세잔의 사과 그림처럼, 시간의 지속 안에서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의 지속 안에서도 결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자아 역시 하나의 믿음 혹은 착각에 불과하다. 희미한 기억과 불분명한 미래를 통해 몽롱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은 뫼르소처럼,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틈새 사이에 던져진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이야말로 실존이라는 불안을 촉발하는 인자인 것이다.




    카뮈는 그가 살던 당시의 사회가 ‘늙음’이라는 치유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쇠락해가는 세상에서, 출구 없는 기다림 속에서, 모든 인간을 기다리는 죽음 앞에서 삶의 정동을 일깨우는 것은 사소하고 모순적인 순간들이다.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려 언덕을 오르고 또 내릴 때 그의 마음을 채운 것이 고통과 번뇌만은 아닐 테다. 그는 때로 고개를 들어 불타는 석양을 보았을 것이고, 땀에 젖은 머리를 넘기는 바람의 손길을 느꼈을 것이고, 어느 날엔 기어코 굴러떨어지고야 마는 바위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들을 온전히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카뮈가 말한 부조리에의 반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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