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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May 23. 2024

과학이 낡은 믿음이 되어버린 세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4천 년 후의 미래에 관하여


시작하는 이야기 : 4천 년 후의 미래


    밤중에 아이가 수풀을 헤치고 내려간다.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4천 년 후의 언어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체계를 가진다. 그러나 수풀이라는 단어는 40번의 세기를 더 살아남았다. 인류가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도 우리가 발붙인 더 거대한 단위, 자연은 강건하게 제자리를 지킬 뿐이다.

    아이는 더는 자라지 않는다. 기대수명이 증가하면서 ‘아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변했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스무 해를 훌쩍 넘긴 아이가 물을 건너다 뒤를 돌아본다. 조용한 밤의 수면은 ‘유리하다’. 유리라는 물질은 훨씬 저렴하고 효율적인 화합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이제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개념은 여전히 찌꺼기처럼 남아 반반한 표면을 묘사하는 형용사로 쓰인다. 수면에 하얀 달과 함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가 반질 비친다. 그 풍경을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이는 말을 잃는다. 



    말은 언제나 끝없이 모자라며, 말은 언제나 전체를 담지 못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말했듯이,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 다 일면적이며,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전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소리 내어 발화하는 말도 그렇지만, 더 넓은 개념의 말도 마찬가지다. 활자는 언어에 언어는 관념에 관념은 실체 혹은 진실에 대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포함되는 것도, 그 반대도 아니며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서로가 서로의 불완전한 대체재가 될 뿐. 언어는 실체보다 열등하지 않으며 실체로부터 파생되었을지는 몰라도 그에 예속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유구한 역사 동안, 우리는 많은 도구를 갖게 되었다. 그것들은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절감했고, 편리함을 증대했으며, 따라서 도구가 행하는 일을 스스로 수행해 낼 기회를 인간으로부터 박탈했다. 앞서 언급한 언어도 그중 하나다. 언어의 영역 바깥으로 사고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도구들에 너무 익숙해진 모두의 삶. 그 삶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편협한 틀-인간의 사회 내에서 사고하고 있는지 새삼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생활양식과 고민, 추구하는 이상, 심지어는 자아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까.

    21세기의 사람들은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 TV를 보고, 스마트폰을 하고, 주말엔 친구랑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가족들과 외식하고 영화를 본다. 연말에는 와인 한 잔으로 분위기를 내고, 백화점에서 옷이나 구두를 산다. 이런 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삶의 거의 전부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사회)를 조형하는 것은 믿음 혹은 신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전통, 관습 같은 것들. 우리는 국가의 존재를 믿고, 믿는다는 행위는 무의식적으로 대상의 영원성을 전제한다. 서구의 역사를 기준으로 : 직전 시대에 우리는 개인의 이성을 믿었다. 그전에는 단일한 신을 믿었다. 그보다 전에는 왕과 영웅의 영광을 믿었으며, 짐작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에는 마술을 믿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천 년 전, 고대 이집트 왕조의 한 계승자가 그의 궁전을 장식하던 값비싼 조각품이 수천 년 뒤 고고학자라는 직종에 의해 지하에서 발굴될 거라는 걸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현대를 사는 우리는 고층 빌딩으로 구성된 세계, 혹은 그 세계와 연속성을 지니는 어떤 형태-이를테면 SF영화 속 디스/유토피아적 미래 도시 혹은 무너진 도시의 잔재만 남은 폐허-밖에는 상상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선사, 혹은 고대라고 부르는 어느 시점에, 마술은 실재했다. 구석기시대의 어느 부족이 동굴 벽에 소를 그려 넣어 그 그림을 향해 창을 던졌고, 그럼으로써 그 소를 잡았다고 믿었다는 역사적 가설이 있다. 이 추측을 접하는 현대인들은 현대의 기준에 따라 그 관습이 미개하다고 평가한다. 가짜란 게 빤히 보이는데 어떻게 그걸 진짜와 혼동한다는 거야? 그러나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결코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명확하지 않다. 그 단적인 예시가 바로 화폐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그림이 그려진 종이쪼가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를 가졌다고 믿는다. 실제로 지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을 훨씬 웃도는 가치를.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다수의 인간이 마술의 존재를 믿었고, 마술이 행해지는 것을 보고 경험했다고 믿었다면, 즉 마술이 그것을 믿는 대상들에게 효력을 발휘했다면, 그게 리얼리티가 아니고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현실은 주관적인 창조물에 불과하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객관적인 실재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존재하는 개인의 수만큼 현실도 그 모습을 바꾼다고. ‘현실은 주관적인 창조물’, 이는 무수한 개인이 세계를 개별적인 방식으로 인지한다는 이야기기도 하지만, 바꿔 말하면 모든 개인이 어떤 문제에 대해 같은 의견을 공유할 때, 그 의견은 곧 진실이라는 (최소한 진실이라고 여겨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학의 시대


    그와 같은 맥락에서, 21세기의 인간들은 과학을 믿는다. 과학은 외부세계를 해석하고 외부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현대의 프리즘이다. 현대에 들어서며 신체와 감각이 미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이유 역시 과학에 대한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감정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체는 기관의 합, 조직의 합, 세포의 합, 분자의 합, 원자의 합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토록 실제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 가능한 신체의 활동과는 달리 지난 세기의 사상가들을 휩쓸었던 이성, 즉 의식의 힘은 너무나도 모호하고,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으므로 상대적으로 가치 없는 것이 되었다.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해, 외부세계와 관계없이, 내재적으로 결함 없는 논리 구조를 만들어내는 사유라는 개념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합의된 기준에 따라 정확하게 해석하고, 타인과 공유해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명제를 확립하는 일이다. 주관적 리얼리티를 제창하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벗어나, 세계는 개인의 외부에 실재하며 진리는 개인에 의해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에 의해 발견-실상은 합의-되는 것이라는 사상으로 나아(혹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실패한 포스트모더니즘? 그도 아니면 파시즘적인 네오-모더니즘?  

    이성의 지배를 받던 때와 마찬가지로, 과학의 지배를 받는 대중 역시 쉽게 선동당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과학의 시대-현대는 결국 이성의 시대-근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세계는 다수결에 의해 움직이니까. 그러나 감히 예상해 보건대, 우리 시대의 믿음인 과학의 수명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기술문명은 이미 타락했고, 인류는 최신의 구원을 찾아 고개를 돌릴 테니까. 그렇다면 곧 도래할 새로운 시대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어디에서 답/구원을 찾아야 하는가? 


예술(가)의 역할


    독일의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새로운 도덕을, 새로운 신앙을 제시하고자 했다. 혹은 그 탐구의 필요성을 주장하고자 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역할이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해답을 찾아 나서는 것. 『데미안』은 그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서사의 클라이맥스는, 싱클레어와 데미안과 그 많은 죽어간 젊은이들, 살아남은 젊은이들이 전쟁을 매개로 한 구세계의 해체라는 범지구적 운명에 직면했다는 사실이다.

    역병은 전쟁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사람들은 죽고, 자유는 제한당한다. 종말의 분위기가 넓은 범위를 휩쓴다. 인간은 서로의 추악한 본성을 직시하고, 우리 자신의 유능함과 선함에 대한 공고한 믿음은 무너진다. 이 대역병의 시기가 마침내 끝을 맺고 나면, 우리도 그와 같은 세계의 운명과 조우해야 한다. 과학의 죽음이 채 도래하기도 전에, 분명 새로운 도덕(영웅)이 필요해질 것이다. 즉,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제어할지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개인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사회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물을 벗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섭리를 찾을 수도 없을 터. 최소한 그 틀을 확장하려는, 나아가 본질에 다가가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아마 예술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어도, 유의미한 단서를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언어


한 전시에서 이런 설명문을 읽은 적이 있다.


언어는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음성, 문자, 몸짓 등의 수단 또는 그 사회 관습적 체계를 뜻하며 예술 또한 언어의 한 종류이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예술적 언어는 문학이겠지 : 일제 강점기와 군부 독재, 민주화의 파도를 겪어오며 한국의 문학가들은 투쟁을 체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은 (나아가 예술은)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 작가가 작품 내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 대중을 설득하려 드는 순간, 예술은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나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선전물로, 혹은 예수의 신성을 강화하는 상징물로.  

    한국 문학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바로 이 지점에 내재한다. 한국의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그 시각을 독자들에게 강요한다. 소수자의, 사회적 약자의, 특정 사상의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그 불합리성에 분노하도록 요구하고 때로는 선동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다양한 시각들의 존재와 표현은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신념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혁명가의 역할이다. 작가(예술가)는 정치적인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지만, 작품만큼은 언제나 객관적인 목소리를 유지해야 한다.  

    좋은 작가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세계를 인지하고 해석하되, 그 해석된 세계를 첨언 없이 객관적으로 기술한다. 결과적으로 글을 쓰는 과정에는 새로운 세계의 필연적인 형성이 수반된다. 작가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제 세계, 그리고 작가가 치밀하게 묘사해 낸 작품 속의 세계. 그 세계가 올바른 방식으로 창조되었다면, 감상자는 작가의 시각을 경험하면서도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를 주체적으로 판단할 여지를 잃지 않는다. 따라서 좋은 예술(작품)은 모두 주관적으로 객관적이다.  

    문학적 허구 말고 시각적 허구에 대해서도 논해볼까. 기다란 스크롤에 장면의 진행을 순차적으로 새겨 전체 서사를 보여주는 고대 로마의 연속묘사법과 영화에서 프레임을 넘기며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같다. 둘 다 실제가 아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 비록 후자가 더 그럴듯하긴 해도.  

    그러나 과연 실제가 환상보다 우위에 있는가? 


진실의 반대 개념으로서 혼란


    사실, 모든 것(자아, 삶, 사회, 우주, 그 외에 무수히 많은 것들)은 진실보다 허상에 훨씬 가깝다.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동등하게 주어진다는 '시간'이라는 것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를 경험할 수 없다. 과거 혹은 미래와 마찬가지로. ‘현대’라는 개념 역시 상대적이다. 우리가 고대, 중세, 근대라고 부르는 시기는 모두 한때 현대였다.

    한 마디로, 세계는 혼란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지 알 수 없는 상태. 왜냐하면 ‘옳다’라는 개념 또한 실존하지 않으니까. 관계라는 측량 도구를 갖다 대어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타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한 나를 알고, 나도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나를 알 수 없으며, 나의 전체집합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지, 존재한들 의미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주인공 네오와 동료들은 매트릭스 속 세계를 벗어나야 할 가짜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기준이 뭐지? 그들이 그토록 ‘진짜 현실’에 집착하는 건 객관적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우리가 사는 우주는 진짜인가? 진짜인들 의미가 있나?  

    그러나 인간은 선천적으로 의미를 찾아 헤맨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남기려고 한다. 그건 아마 인간의 뿌리 깊은 본성일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종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신화,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상정하고 그 존재를 믿는 능력이라고. 

    가상의 존재를 믿는 것은 사피엔스의 재능이기도 하지만, 종종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가령 대의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의 희생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가치를 갖지 못한다. 특히 이미 소멸해 버린 그 자신에게는. 그럼에도 그것이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은 그토록 불가해한 희생을 감수한다. 희생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삶에 헌신하려는 사람은 누구든 믿을 것을 가져야 한다. 신념을, 신앙을.  

    자아의 실존에 의문을 품고서, 내가 욕망하는 것이 진정 ‘나’의 욕망인지 확신하지 못하고서, 자아와 그 자아의 욕망이 진실하다 한들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지 믿지 못하고서 어떻게 그 모든 것에 헌신할 수 있겠나? 진실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나 수많은 진실 중 하나를 골라 믿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모순


현실의 실재를 믿지 못하는 인간에게 생이란 유희에 불과하다.

현실의 실재를 믿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 반대로 말해, 허구도 현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예술


    그리고 예술은 허상에 불과한, 무력하고 하찮은 스스로를 초월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다. 동시에 생을 유희로 낭비하기 위한 수단이다. 또한 그 허구성을 무기로 현실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다줄 미래의 프리즘이다.

     따라서 예술은 진실하고 진지하게 현실을 반영하려고 하는 대신, 극단의 허구를 향해 나아가야 마땅하다. 오로지 예술만이 할 수 있는 것 : 그것은 불가능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건설하는 일이다. 


현실과 비현실 : 4천 년 후의 초현대에 어느 예술가가 남긴 기록


    우리가 사는 도시는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바닥 없이 무너져 내려 아마 존재했었다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고 말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이 기록을 남깁니다.

    세계는 여러 층위의 현실들-혹은 하나의 현실, 그리고 그 현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수많은 비현실-이 겹쳐진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 예술가의 의무는 그 경계선을 넘나들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거죠. 미지와 불가능을 서술하는 환상의 견자로서.  

    그러나 이 시대는 이미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세계에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려는 그 의지뿐일 테죠. 수천 년 전, 헨리 밀러라는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시대도 오늘날만큼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차지는 않았다.” 글쎄, 그 말은 틀렸네요. 인류 역사상 어떤 시대도, 오늘날만큼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차지는 않았으니까요. 우상이 없는 시대입니다. 현대의 도덕은 힘을 잃었죠.  

   

    우리가 숭배해야 할 것은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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