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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Jul 07. 2024

또 하루 멀어져 가는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최근 전시장 지킴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주 작고, 유명하지도 않은 아트 센터라 작가의 지인 말고 누가 찾아오려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각양각색의 관람객이 방문한다. 몇 주 전 예사롭지 않은 차림의 아주머니가 한 분 들어와 한참을 열심히 구경하더니 물었다. 이 작가분, 젊죠? 작가님은 우리 학교 회화과 교수로, 이번 학기를 마치고 정년 퇴임을 확정 지으셨다. 60대 중반이십니다, 대답하니 탄탄하고 마른 팔을 드러내는 검은 민소매에 겨자색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알이 큰 선글라스와 셀린느 백을 걸친 아주머니가 탄식을 내뱉는다. 나랑 동년배였다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일흔 가까이 나이를 드셨다는 아주머니-할머니(?)는 최첨단의 재료(3D 펜)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본인과 비슷한 연배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으셨는지, 별안간 날 붙잡고 넋두리를 시작한다. 한 번 사는 거 저렇게 멋진 무언가를 남기고 가야 하는데, 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기만 했다. 아이들을 물론 사랑하지만… 상처가 많은 삶이었다.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들어 줄 이 없는 지나간 나날의 기록. 노화가 반드시 소외의 충분조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노인들은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어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자기 삶의 정당성을 외치고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의 스티븐스처럼.     

동명의 영화 <남아 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스 역을 맡은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 (출처: The Westline School) 

    스티븐스는 장장 300여 쪽의 소설 내내 지나온 나날과 그 나날을 지나온 자신의 충실하고 고결한 태도에 관해 이야기한다. 모든 모험담에는 허풍이 섞여 있기 마련이고, 스티븐스의 경우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간악한 거짓말쟁이, 허언증 환자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반대로 (스티븐스 자신이 주장한 대로) 그가 사명에 투철했던 전문가, 고귀한 정신의 직업인이냐고 물어도, 긍정의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스티븐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는 지극히 평범한 노인이다. 오랜 시간 자신의 직업에 헌신했고, 업계에서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룬, 그럭저럭 성실하게 살아온 노인. 그러나 그의 성취는, 자신이 주장하는 것만큼 대단하지는 않다. 심지어 그가 평생을 바쳐 모신 신사는 역사가 부덕이라 판정한 나치 부역자였다. 쓸쓸하게, 그는 저무는 해를 가만 앉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스티븐스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사라져 버린 시간을 정당화, 합리화하는 일뿐이다.

    니체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스티븐스는 전형적인 낙타이다. 그는 남이 정해주는 기준에 맞춰 살며, 스스로 사고하거나 성찰하지 않는다. 그는 주인의 짐을 나르는 가축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기 삶의 가치를 타의에 의탁한 인간의 말로는 비참하다. 그가 실제로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얼마나 번듯하게 살았건, 도덕적으로 살았건, 그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의 욕망을,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은 스티븐스의 세월은 이제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는 한, 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어떤 가치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는 스티븐스와 캔턴 양 사이의 로맨스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원작자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혹평했다고.. (출처 : The Hollywood Reporter)

    소설이 발표된 건 1989년, 스티븐스가 여행을 떠나는 건 1956년, 여행 내내 그가 늘어놓는 한담의 무대가 되는건 1920-30년대이다. 이런 시간적 액자 구성은 독자와 서사 사이에 기억이라는 두 겹의 렌즈를 씌워 스티븐스의 진술이 그다지 신뢰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인해, 읽는 이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관찰하게 된다. 화자 자신은 소설의 서사에 지극히 몰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몰입 자체가 역설적이지만 제4의 벽으로 기능한다. 이 거리감, 애매한 불편감은 공감보다는 비판과 반성을 이끌어내고자 한 작가의 의도에 충실히 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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