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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언 Jul 18. 2023

이불에선 체념의 냄새가 난다.


집을 지었다. 아니, 집 안에 집을 지었다.

집을 짓다니. 이리 말하면 백만장자의 허세 같으니 소시민인 나는 달리 표현해야겠다. 모두가 아는 구제적인 어휘로 상황을 다시금 알리고자 한다. 드라마 속 재벌에서 흔하디 흔한 일개미로 수준이 떨어지긴 하지만 별 수 있나. 

낡은 침대 위에 난방 텐트를 설치했다. 가벼운 지갑은 한껏 노려보다 몇 날며칠을 고민한 뒤, 제일 어여쁜 것을 골라서 말이다.

몸을 눕힐 공간이 집이라면 이것도 집이라고 우길수 있을 테다. 일단 내 기준으론 그렇다. 누가 뭐래도 이건 집이다. 비좁긴 해도 몸 하나 정돈 누울 수 있으니. 


질긴 천으로 만들어진 집. 부엌도 화장실도 없는 집. 그렇지만 집은 집이다.


어리석게도 침대 보다 한 치수 작은 난방텐트를 주문했다. 의지를 배반한 손가락은 잘못된 옵션을 눌렀고, 게으른 눈은 실수를 잡아내지 못했다. 견고히 협업된 오판이었다. 어리석음을 뒤늦게 탓하면 무엇할까. 때는 늦을 때로 늦었다. 포장이란 포장은 이미 다 뜯어버렸고 반품하기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냥 쓰는 수밖에.

그래서 되는대로 설치해 버렸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텐드가 되던 움막이 되던 일단 침대 위에 올려봤다. 대각선 길이가 짧아 텐트를 쭉쭉 늘리는 게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어이 해내고야 말았다. 시간은 많고 그에 비해 돈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겠다.

내 공간 안에 내 공간이 생겼다. 혼자 살고 있으니 대문만 열면 모든 곳이 내 공간이긴 했다. 그러나 주방에선 냉장고가 대장 노릇을 하고 있고, 거실의 메인은 소파였다. 침실 역시 침대가 주인 같았는데, 요 놈의 난방 텐트를 씌워버리니 내가 기선제압을 한 느낌이다.


고작 침대 따위와 기싸움을 하다니. 나도 참 옹졸하기 짝이 없다. 부끄러워서 어디에다 말도 못 하겠다.
난방 텐트를 얼기설기 설치하고선 그 안에 이불과 베개, 그리고 귤을 소담하게 쌓아 놓았다. 그리고선 온수매트를 켰다. 이로서 월동준비는 완벽하다. 여기에 누워 있으면 한 달은 무슨, 일 년도 지낼 자신이 있다.

옷 대신 이불, 밥 대신 귤. 게다가 집도 있지 않던가. 의식주가 해결되었으니 이번엔 영혼을 채울 차례다. 어찌하면 영혼이 통통하게 살찔지 한참이나 고민하다 난방 텐트 안에 드림캐쳐를 달았다. 헐겁게 달린 탓에 수시로 이불에 떨어지지만 단 한 번도 텐트 밖으로 내친 적은 없다. 


귀찮은걸 그토록 싫어하는 나건만 떨어지면 다시 걸어놓고 또다시 걸어놓는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구태여 의미 부여를 하자면 여기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이라 티를 내고 싶어서 정도겠다. 텐트 안에 전입신고를 할 순 없진 않은가. 


결국 내가 할만한 것이라곤 악몽을 막아주는 요 조그마한 장식품을 걸어 놓음으로써 이곳이 내 공간이라고 땅땅 못을 박는 것뿐이다.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는 괴담을 진지하게 듣고 자란 세대가 아니던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드림캐쳐에 대한 이야기를 제 멋대로 해석 후, 당차게 의미부여를 해 봤다. 오리엔탈 감성이 묻은 인디언의 장식품이다.

집 안의 집에선 무엇을 할 수 있느냐. 귤 까먹기, 온수매트로 등지지기, 와이파이 아래에서 문명 느끼기 정도일 테다. 이 정도는 누구나 생각하는 평범한 일상임이 틀림없다. 인간의 삶이 비슷하다는 게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적당히 따라 말하기 퍽 좋으니까.


00 씨는 퇴근하면 뭐해요? 누군가가 물어오면 마치 외워놓은 것 마냥 답한다. 퇴근하자마자 난방텐트 들어가서 귤 까먹으면서 드라마 봐요. 지극히 평범하고 재미없는 답이 아니던가. 그럼 별다른 부가 질문도 없다. 간혹 무슨 드라마를 보냐 물어오면 아주 예전에 본 드라마를 말한다. 다시 본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다. 참으로 쉽고 간단하다.

그렇다면 나는 난방텐트 속에서 진실로 무엇을 하는가. 두 평도 안 되는 침대 위에서 시간을 죽인다. 아니, 나를 죽이는 것을 죽인다. 그래서 나를 죽이게 된다.


 둥그런 돔에 싸인채 괴로움을 씹어댄다. 우울함을 삼킨다. 슬픔을 먹는다.


몸이 사라지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귀가 없으니 음악을 들을 수 없을 테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참으로 많은데 이걸 어쩌면 좋나 싶다. 욕심 많은 나는 필시 한 많은 혼이 되어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번화가에 맴돌 테다. 


코도 없어질 텐데. 그럼 하지 못하는 게 한둘이 아니다. 머리카락 향은 어떻게 맡지? 카페에 머물다 나오면 머리카락에 원두 향이 남아있곤 했는데. 킁킁 몇 번 맡아볼라치면 금세 날아갈 정도로 아주 옅게 말이다. 


사소하고 또 사소한 것들. 누가 보면 코웃음 칠 것들. 그것들을 위해 나는 살아간다. 목에 비릿한 쇠맛이 올라오도록 움직인다. 그래야만 간신히 어제와 같은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무섭게도.


나는 아프다. 아플 일이 없는데도 아프다. 형태 없는 가시에 온몸이 찔린 채 무취의 피를 흘려댄다. 조금씩 말라간다. 스스로 짠 관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말라간다. 그렇게 한없이 침전한다.


숨을 내쉴 때마다 눈물 비린내가 난다. 감추어 볼래도 무겁고 축축한 냄새가 숨겨질 리 없다. 내 하찮은 고민 따위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는데. 타인의 눈엔 개미 한숨만 한 일이건만. 나이만 헛으로 먹어가며 대여섯 살짜리나 할 법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간다. 관성처럼 살아간다. 어느덧 이불에선 체념의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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