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고민 후 "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여봐. 턱을 최대한 안쪽으로 넣어볼래?
금방 감겨줄게. 조금만 참아보자."
아이의 머리 위로 물줄기가 닿자
"끄응..." 채이는 끙끙 소리를 낸다.
손은 눈보다 빨라야 한다.
사사사삭... 스윽스윽슥
샴푸를 바른 손을 최대한 바삐 움직여 빨리 끝내야 한다.
사방에 물이 튄다.
귀에 물이 들어가진 않을지 걱정이다.
채이의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엄.. 마.. 빨.. 리.. 해.. 히잉..."
"다했어 다했어 조금만 참아... 응? "
후다닥 샤워기로 거품을 덜어낸 머리칼을 마른 수건으로 감싸고 고개를 들어주자
벌게진 얼굴로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는 채이다.
나도 덩달아 숨 쉰다.
휴... 우... 우...
소임을 다한 낡은 샤워기도 굵은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다 이내 잠잠해진다.
폭풍 같은 시간이 끝났다.
"아~ 시원~ 하다~"
채이가 웃는다.
발그레한 볼이 반짝인다.
너무나 사랑스러워 입가에 절로 웃음이 맺힌다.
"이리 와~ 머리 말리자~"
뜨뜻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향긋한 내음이 풍긴다.
행복이달리 있나? 이게 행복이지..
12
쏴아아 아
온 하늘을 뒤덮은 잿빛 구름은 울분을 토해내듯이 세찬 비를 뿜어댄다. 순식간에 세상이 젖어 들어 간다. 지면과 건물을 때리는 빗소리가 꽤나 강하다. 심술보가 가득 차 악담을 퍼부으며 시시덕대던 이웃 여자가 떠오른다. 참 사나운 비다.
오매불망 의사 회진시간을 기다리는 일은 그냥 목 빠진다 쯤으로 표현할 수는 절대 없는 일.
똑똑.
드디어 오셨다!
"네!"
채이는 덤덤하게 앉아 배를 훤히 보이고 목젖을 훤히 보여준다.
잘 놀고 잘 먹고 하니 보기에는 다 나은 듯 보여 조심스레 퇴원 여부를 물었더니,
염증 수치 블라블라 백혈구 수치 블라블라...
결론은 아직 아니란다.
슬쩍 '돈 벌어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퇴원이 물거품이 되니 힘이 빠지고 다크서클이 더욱 짙어지는 듯하다.
창가에 온몸을 부딪쳐 줄줄 흐르는 빗물.
내 눈물인가.
하룻밤 다시 버텨보자.
13
시트가 더러워졌다.
주섬주섬 걷어내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위잉-
진동이 울린다.
"어? 얘가 웬일이야?"
통 연락할 일이 없는 이웃 여자의 전화다.
"언니! 바쁜가? 우리 술 먹세!"
왜 하필 이런 날에 이런 전화가 오는 건지
아쉬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아.. 정말? 어쩌지? 나 채이 입원해서 병원이야."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쉬움과 다음을 기약하는 말 들을 끄집어내 놓는다.
나도 마찬가지라 털어내며 이내 전화를 끊었다.
귀촌생활 중에는 이미 구축되어 있는 '여자들의 인간관계' 사이를 뚫고 '서로 친해짐'을 얻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이러한 술자리에 부른다는 것도 보통 친해지지 않고는 힘든 일임을 알기에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 날 이후로 다시 전화 온 일은 없었기에...)
인간관계에 무슨 큰 의미를 두고 사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유지해야 하는 인맥은 있다.
큰아이 학교생활이라든지, 학원정보라던지..
그저 그만큼만의 인연이면 된다 하고 살고 있지만
가끔 서러울 때가 많다.
오늘 마실 술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하였거늘!
하하... 누가 한 말?
시트나 교환하러 가야겠다.
"채이야, 잠깐 있어. 엄마 시트 바꿔올게"
14
오늘은 퇴원할 수 있겠지?
설마 오늘도 안 시켜줄까?
지레짐작으로 오늘은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서두르다가 놓치는 게 있으면 안 되니까.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정말 정말 미치도록 집에 가고 싶었다.
큰 메인 가방, 쇼핑백, 검정 봉지, 슬리퍼...
마지막으로 채이까지 완벽하게 짐은 모두 세팅되었다.
'자자, 입원비 계산만 하고 오늘은 나가는 거야!
마침 비도 개었고 날씨는 화창 해지는 중이네.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맛있는 것도 사 가지고 가야지.'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하루 더 계셔야 할 것 같아요"
기어이 5일을 채워서 내보내려는 의사가 야속했다.
물론, 아이가 먼저 낫는 게 우선이다.
떼를 쓴다고 될 일은 아니니까.
결국 또 못 가게 되었는데 곱게 싸놓은 짐들을 보니 스트레스 지수가 상승했다.
갑자기 소비지출 욕구가 생기는 건 무엇일까?
"채이야 매점이나 다녀오자"
"오예~!"
채이는 집을 가던 매점을 가던 신발을 들고
나가는 자체가 좋은지 한껏 신이 났다.
병원 매점에서라도 flex 좀 하고 와야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았다.
없는 게 없는 매점.
채이 손에는 아기자기한 화장품 모형이 든 장난감이 들려졌다.
내 손에는 고작 커피 한 캔이었지만
"훗! 플렉스!!!"
15
조용한 밤.
앞방 , 옆방 다 퇴원을 해서인지 오늘 밤은 유독 조용하다.
채이는 낮에 사 온 화장품 모형 장난감을 한참 가지고 놀았다.
거울을 보며 분도 찍어 바르고, 향수도 뿌렸다. 립스틱 바르는 모습엔 너무
사랑스러워서 "오구오구 이뻐"를 남발하며 껴안아줬다.
그렇게 너무 잘 놀길래 나는 이내 폰 안에 있는 인터넷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드르륵-
언제 간 건지 스르륵 문을 열고 있는 채이다.
텅 빈 복도의 풍경이 눈 앞에 보이는 동시에 그 입에서 나온 소리는 순간 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엄마 내 친구 왔어"
온몸에 소름이 확 돋고 지나갔다.
"아.. 뭐야-"
친구에게 안녕이라고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건지, 그런 장난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건지
무슨 대답을 하는 게 좋을지 0.1,2초 사이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역할놀이가 납량특집으로
가는 이 상황이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이기에 그 느낌이 배가 되어 소름이 끼쳤다.
공포영화나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내 상상이 지나친 건가.
채이는 얼떨떨한 내 표정을 보며 시익-웃는다.
'아 뭐야... 왜 웃는 거야...'
내 딸이지만 진심으로 왜 저래? 싶었다.
"히히힛 장난이지 롱- 장난이지 롱-"
아, 너무도 해맑다.
순간 멈칫하게 만든 채이의 장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너 상태가 좀..." 말끝을 흐리다가 같이 웃었다.
그리고 난 대범한 척하며
"심심한가 보구나. 엄마랑 복도로 나가서 걷기 운동할까?"
"앙! 좋아!! "
링거 줄을 추스르고 함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왔다 갔다 한 번만 하고 들어가서 자자. 알았지?"
"네 엄마"
걸으며 슬쩍 열린 문으로 보이는 다른 방에선 작은 tv소리 밖에는 오늘따라 무척 조용한 복도다.
"걸으니까 좋다 그렇지?"
방금 전의 식은땀 소동이 잊힐 즈음 또다시 훅 들어오는 채이의 음성이 있기 전까지는.
"히히 엄마 내 친구 여기 있어"
손으로 가리키는 빈 공간.
"하악! 채-이-야-아-!!"
"장난이지 롱~ 장난이지 롱~"
하! 너를 어쩌면 좋니.
16.
관계와 시간
역시 관계와 시간은 비례한다.
오랜 시간을 겪지 않고서 이 사람은 진짜 내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몹시도 경솔한 언행이었다. 처음에는 웬만해서는 누구나 친절하다. 서로에게 조심하며 사실 큰 기대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편해지며 애정의 온도에 편차가 생긴다. 더 많이 주는 쪽, 더 많이 받는 쪽. 그것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형성되는 거라 그 시점이 언제인지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도 없다.
더 많이 주는 쪽은 점점지쳐가고. 더 많이 받는 쪽은 자꾸 커지는 기대감에지쳐간다. 그러한 지쳐감은 관계를 뒤흔들 때가 많다.
한 방송인이 이런 말을 했다. "사심 없이 배려를 했어야 했는데 생색의 마음이 있었다.."
속으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심 가득한 배려. 주고받음에 있어서 친절함을 가장한 사심 가득한 배려는 관계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고작 짧은 시간 동안 나눈 친절함으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라고 착각한 순간부터 더욱 그렇다.
사소한 말실수나 서운한 감정이 드는 순간 모래성 같은 사이는 쉽게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반면 곱게 다져서 탄탄하게 일군 시간의 두께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오래 만나왔어도 서로 나눈 시간이 아닌 기간만 긴 것은 해당사항이 아니다.
탄탄하게 일궈온 사이는 웬만한 농담에도 훗 웃어넘길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다 그렇다기보다 나의 단견일 뿐이다. 요즘 나는 와르르 무너진 모래성 흙더미에서 기어 나와 모래를 툭툭 털고 있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는 미움의 싹이 자라고 있다. 내 사람인가? 했던 사람에게 말이다. 한없이 퍼주고 함께 시간을 나누다 보니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몇십 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서로를 잘 아는 듯 지내왔다. 하지만 사소한 일에 등을 돌리곤 아예 남보다 못한 사이로 틀어지는 것이 너무도 쉬웠고 그로 인한 상처는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시간과 관계. 짧은 시간에 깊은 관계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놓고도 다시 빠지는 게 인간이고 나다. 내 안의 미움의 싹이 어떤 쪽으로 햇빛을 받을지 물을 더 줄지 아니면 시들어서 죽게 만들 것인지 갈팡질팡이다.
결론은 모두 행복이다. 행복하고 싶은 것이다.
짧은 시간에라도 느낀 행복이 클수록 등 돌린 순간의 아픔은 더 크다. 그래서 미움의 싹이 커지는걸 수도.
아픔 극복에 좋은 처방을 알려준 책이 있다.
<회복탄력성>이라는 책에서는 1. 잘하는 일을 하기 2, 감사일기 쓰기 3. 운동하기 를 추천했다.
이 세 가지 처방약으로 스스로를 치유하다 보면 관계에서 오는 슬픔이나 아픔 대신 나만의 행복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조용히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