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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지서강 Mar 12. 2021

착한 성적과 그렇지 못한 발송

서강교지편집위원회

    당혹스러움이 새로움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학교가 학생의 성적을 부모에게 문자로 전송한다’는 서강대학교의 발상이 그렇다. 2019년 6월, 학생의 성적을 부모에게 문자로 발송한다는 성적 문자 발송 시스템이 발표되자 학교 안팎에서는 ‘어이없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총학생회는 학사지원팀 문의 등 나름의 대응을 시작했고 학내 언론사뿐만 아니라 기성 언론들에서도 해당 제도에 대한 보도를 냈다. SNS 및 커뮤니티 등에서는 해당 제도가 ‘서강고등학교’라는 밈으로 소비되며 각종 유머 게시물을 양산했다. 전국적으로 대학교에서 성적 알림 시스템을 없애는 추세이며, 더군다나 ‘문자 메시지’라는 전달이 직접적인 매체를 통한 것은 전무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컸다. 하지만 성적 문자 발송 시스템은 당혹스러울지언정 새롭지는 않다. 기존의 성적 우편 발송 시스템에서 매개체가 변화한 것 말고는 본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매개체를 불문하고 모든 성적 알림 시스템에는 개인의 성적을 포함한 개인정보를 학부모가 열람 가능한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가 있다. 오히려 성적 문자 발송 시스템은 기존의 성적 우편 발송 시스템이 가지고 있던 전제를 강화하면서 본질을 그대로 유지 및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달라진 것은 문자 메시지라는 외피, 매개체뿐이다. 전혀 새롭지 않다.


    그래서 문자 메시지라는 매개체로의 변화가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모습은 어딘가 생경하다. 결국 현재 문제와 관련한 논의가 이미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문제의 본질을 타격하지 못하며 ‘재밌는’ 밈으로 소비되고 그치기 때문이다. 문자 메시지라는 매개체로의 변화는 진정 새롭고 파격적인가? 문자 메시지를 통한 것이 아니라면 부모에게 학생의 성적을 알리는 것이 괜찮은가? 기존의 성적 우편 발송 시스템에는 문제가 없는가? 문자 메시지로의 변화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논의를 확장하지 못하고, 결국 본질을 타격하지 못한다. 타격해야 할 것은 매개체의 변화가 아니라 성적 알림 시스템의 전제 자체이다. 성적 알림 시스템의 전제는 크게 세 가지 쟁점에서 유해하다. 첫째, 전제 기저에 경제적 자립을 통한 인간 개체의 독립성 회복이라는 주문이 있다는 것. 둘째, 청년의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사회구조적 배경은 은폐한다는 것. 셋째, 대학생, 나아가 20대 청년을 한 가지 속성을 가진 균질적 집단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세 가지 쟁점 모두 이 시스템에서 주체로 자리할 수 없는 ‘대상’인 서강대학교 학생들에게 폭력적이다.





1. 경제적 능력이 없으니까?


    개인의 성적을 포함한 개인정보를 학부모가 받아보는 것, 나아가 대학교가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행위에는 당위성이 없다. 본인이 아닌 제삼자가 개인정보를 열람할 수 없다는 것은 헌법이 존재하는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식적 수준의 지식이자 법적 근거를 가진 명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을 포함한 자녀의 개인정보를 지금껏 학부모가 열람 가능했던 것은 한국 사회에서 부모는 ‘남이 아니라는’ 가정과 더불어 그들이 자녀에게 지원하는 경제 자본을 통한 정당화 때문이었다. 성적 알림 시스템이 대학생 당사자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반론이자, 성적 알림 시스템의 존립을 가능케 했던 논리가 있다. ‘대학 다닐 돈은 부모님이 대주니까.’ ‘억울하면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던가.’ 경제적 독립 없이는 자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부모의 보호 하에 있다는 보호주의적 시각을 기반으로 한 주장이다. 현 대학생은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기대고 있고 따라서 부모가 성인 자녀의 성적을 받아볼 ‘권리’가 있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성적 알림 시스템이라는 제도의 주된 정당화 수단일 뿐만 아니라, 20대의 미성숙함을 강조하는 다양한 담론의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론을 꺼내기에도 머쓱할 정도로 당연하게 개인은 독립적 개체이며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독립된 개체의 인권과 경제적 지원은 상환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경제적 지원은 권리를 앗아갈 수 없으며, 인권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성적 알림 시스템은 인권의 무조건성과 개인의 독립이라는 근대의 간단한 명제를 부정하면서 오류를 범한다. 어떤 이유로든 개인의 권리는 타인에게 양도될 수 없다. 서강대학교는 성적발송 시스템의 매개체를 우편에서 문자메시지로 바꾸면서 ‘개인정보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적 알람 시스템의 전제 자체가 ‘개인정보’를 ‘보호’하기는커녕 침해한다. 학생의 개인정보를 타인(부모)에게 알려야 한다는 시스템의 전제 자체가 개인정보보호의 반대말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립으로 인간 개체의 독립성을 회복하라는 주문은 어불성설이다.


    권리를 경제 논리로 귀결시키는 것은 당위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경제적 지원을 포함한 양육이 자녀의 권리는 약화하고 부모의 통제를 키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각은 양육을 투자의 개념으로 치환시킨다. “내가 이만큼 너한테 해줬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야” “부모님 덕에 대학 다니면서 그 정도 권리 주는 거로 그러냐” 양육을 투자의 개념으로 바라볼 때,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받아온 지원은 본인도 모르는 새에 갚아야 할 빚이 된다. 분명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 같지는 않아도 부모에게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온 것들이 ‘투자’일 때, 자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21세기 한국, 부모는 자녀의 교육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청소년들은 과도한 교육열 안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을 한다. 양육이 투자이므로 자녀의 보상이 당연하다는 입장에 대해 누군가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투자로 빚어진 고통들에 배상해주세요”라고 답하지 않을까. 양육을 투자의 개념으로 볼 때, 21세기 한국의 자녀들과 부모 모두 행복할 수 없다.





2. 청년의 경제적 자립은 쉬운가?


    인권에 대한 명제를 부정하면서 합리화된 주문은 나아가 대학생 청년들이 왜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없는지를 은폐한다. 경제적 자립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현시대 청년들은 성인이 되기 전의 단계보다 청소년의 연장선에 있는 집단으로 여겨진다. 이는 분명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았던 80년대의 지식인 대학생과는 다른 양상이다. 당시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의 주체로서 사회를 바꿔나간다는 역사적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현재의 대학생들은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미성숙한 존재로, 즉 청소년화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기표로 그려진다. “청년은 이제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해석되는 존재로 전락했고, 성인기 자체에서 분리되어”[1] ‘후기 청소년’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는 심화하는 청년 실업난과 경제 구조의 변화 속에서 생겨난 흐름에서 기인한 결과다.


    서강대학교 성적 알림 시스템은 현행 사회/정치 제도들이 으레 그러하듯 청년이라는 기호가 변해 온 사회구조적 요인은 지워버리고 결과적으로 덧씌워진 기표인 미성숙함을 재생산할 뿐이다. 수십 년 동안 극심해진 청년 실업난과 양극화, 불평등 문제는 이 기표 뒤에 숨어 등장할 생각을 않는다. (한국에서는 성인 또한 그렇지 못하지만) 청소년 시기에 생활 임금이 충족되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노동할 권리도 박탈되어 있다는 지점도 은폐된다. 보호주의라는 미명 하에 노동권이 박탈되어 독립을 원해도 일할 수 없던 나이에서 한 살 더 먹었다고 경제적 능력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성적 알림 시스템이 싫으면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되지”라는 주문에는 경제적 독립이 힘든 사회구조에 대한 고려는 부재한다. 결국 사회적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할 뿐이다.





3. 성적 알림 시스템이 호명하는 대학생은 누구인가?


    뿐만 아니라 성적 알림 시스템은 기반부터 기득권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담론의 수준을 낮춘다. 갑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제도는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한다. 왜 학교는 학생의 성적을 부모에게 알려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일까. 성적이 부모의 핸드폰에 문자메시지로 도착하면 자녀는 자신의 안 좋은 성적에 머쓱해 하거나, 잘 받은 성적에 “엄마, 나 잘했지?” 하며 으쓱대는 그런 풍경. 부모는 그런 자녀에게 왜 성적을 그렇게밖에 받지 못했냐며 가벼운 잔소리를 하거나, 이번 학기도 고생했다며 자녀의 등을 토닥거리는 풍경. 풍경의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학교는 가정에서의 이 정도 분위기를 가정하고 문자 발송 시스템을 고안한 것이리라. 가정폭력 등의 이유로 탈가정을 한 학생들, 여러 이유로 부모에게서 위협을 느끼고 연락하지 않는 학생들을 학교는 고려했을까? 부모에게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것이 삶에 위협이 되는 학생들을 고려했을까? 학교가 이들을 고려했다면 성적 알림 시스템을 애초에 고려할 일도, 개인정보가 더 직접적이고 쉽게 전달될 문자 메시지를 매개체로 사용한다고 일방적으로 공지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학교는 화목한 정상 가족을 성적 (문자)알림 시스템의 전제하에 두었다. 성적 알림 시스템이라는 제도가 호명하는 대학생은 중산층 이상의 정상가족의 일원이다.


    어느 사회의 어느 집단도 내부가 균질하지 않다. 대학생이라는 집단의 내부도 성별, 성적 지향, 장애 유무, 경제적/문화적/사회적 계층 등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상황에 놓인 개인들로 구성된다. 내부의 이질성 때문에, “부모의 지원을 바탕으로 성인기로의 이행을 유예하는 ‘청소년화된’ 청년과는 달리 성인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일찍 수행하는 ‘성인화’된 청년”[2]도 존재한다. 문제는 균질적이지 않은 집단을 하나의 이름으로 호명할 때 배제되는 내부 구성원은 정상의 규범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성적 알림 시스템은 중산층 이상의 정상가족의 자녀를 제도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규범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구성원을 배제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탈가정을 한 학생들과 부모와의 분리를 원하는 학생들의 자율은 제도의 설계 시기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위협’이다.


    등록금과 생활비 등을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충당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있다는 사실도 성적 알림 시스템에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이 제도의 존립이 가능했던 것은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자녀의 권리 침해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오류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당 오류 이전에 ‘부모가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전제부터가 중산층 정상가족을 디폴트로 두면서 이미 기득권 중심의 제도를 형성해버린다. 서강대학교 내에는 부모가 자녀의 대학 등록금, 생활비 등을 지원해 줄 여력이 있을 만큼 ‘어느 정도 사는 집’ 자녀들만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란 학생들이 서강대학교 내부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면(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부끄러운 일이다. 성적 알림 시스템의 전제에는 서강대학교라는 집단 내부의 일원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원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결여되어 있다. 중산층 정상가족 중심의 제도다.


    하지만 결국 제도가 호명하는 대학생이 중산층 정상가족으로 환원되는 탓에 규정된 범주의 일원으로 위치할 것으로 강요받는 대상도 또한 제도에 의해 배제된 학생들이다. 제도는 대학생을 호명하고, 원치 않더라도 호명된 대학생들은 부모의 핸드폰에 도착한 성적 알림 메시지에 의해 중산층 정상가족 내부의 단란한 풍경에 불편하게 자리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재생산된다. 정상가족이 ‘정상’이라는 생각, 중산층이 ‘정상’이고 도달해야 하는 이상이라는 주류의 생각이 곧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와 맞지 않는 인간의 위치는 어느새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자리가 없으니 인간도 보이지 않게 된다. 스피박의 말처럼 “하나의 징표로 비추어진다는 것은 언제나 침묵 당하는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적 알림 시스템이 호명하는 대학생의 징표가 침묵시키는 대상은 실제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중산층 정상가족에서 자란 이성애자 비장애인이며 정상성에 불만을 품고 있지 않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제도는 그 자체로 타자를 배제한다. 곧 폭력이다.



    학교에 다니는 4년 동안 나는 엄격한 학사관리와 다른 학교보다 ‘짠 성적’을 서강대학교의 자랑처럼 여기는 교수님들과 학생들을 종종 만났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모두 성적을 부모에게 발송하는 시스템도 그들이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서강고등학교’의 문화 중 하나이곤 했다. 하지만 우편물 유실이 우려되어 성적 알림 시스템을 굳이 보완(?)하는 서강대학교와 이것을 다른 학교와 구별되는 학사관리 시스템을 가진 ‘서강고등학교’의 재밌는 특징이라며 “자랑스럽다”라고까지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되묻고 싶다. 대학교에서의 성적이 애초에 부모를 포함한 타인에게 ‘알려져야 할’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인가? 일정 수준의 지식을 학생 모두가 습득해도 교수들은 상대평가 때문에 어떻게든 점수를 나누려 하고, 학생들은 시험 기간 동안 족보를 다운 받고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은 뒤 시험지에 통째로 뱉어내는 대학의 시험 및 성적 산출 시스템에서 ‘성적’은 신자유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인권 침해와 누군가를 배제하는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도 불구하고 ‘성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며 부모에게 이를 필사적으로 알리려는 대학의 결정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우습다. 그 결정이 대학의 지향점을 역행하다 못해 모순되어 우습고, (이미 타 학교에서 진행 중인) 상대평가의 폐지를 논하기는커녕 논의의 수준을 시대착오적으로 끌어내려 우습다. 성적 알림 시스템이 유해한 지점 3가지를 논의한 지금, 아주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다. 성적이란 무엇인가? 성적은 인권을 넘어서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참고문헌

김선기. 2019. 청년팔이 사회. 파주: 오월의 봄.


          

[1] 김선기 2019, 151.


[2] 김선기 2019,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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