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댕쟈
제적 경고를 받았다. 이로써 두 번째였다. 어김없이 부모님 앞으로 통지서가 날아왔다. 이번 학기에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지지난번 학기일 것이다. 총 학사경고 네 번, 학사 경고가 쌓여 제적 경고가 두 번. 휴학하겠다고 하면 가족의 장렬한 반대에 부딪혔기에 맞지도 않는 학교를 꾸역꾸역 다녔더니 얻은 결과였다. 심지어 처음 제적 경고를 받은 학생에게는 휴학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만신창이 낙오자 상태로 한 학기를 더 다녀야만 했다. 결과가 좋을 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이제 조건부 휴학을 허가받기 위해 무려 세 번째로 지도교수를 찾아가야 한다. 아니, 이번에 가면 네 번째다. 학사 경고 네 번으로 제적 경고를 받아서 조건부 등록을 하러 가야 했던 5학기(맞나? 가물가물하다), 안 다니면 내쫓는대서 다닐 상황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꾸역꾸역 다녔다가 역시나 제적 경고가 떴던 6학기, 그리고 제적 경고자에게 서류상으로는 딱 한 번만 허가되는 휴학 신청을 하기 위해 찾아갔던 바로 지난 학기, 총 세 번의 방문을 거쳤다. 지난 학기에는 정말정말 등록을 하기 싫어 미루다가 진짜로 제적될 뻔했다. 벌써 7월이 다 갔으니 이젠 정말로 지도교수를 다시 찾아가 왜 내가 또 휴학 연장을 해야 하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애초에 나는 부모의 참관 아래 교수를 찾아가 부디 쫓겨나지는 않게 해주십사 간청하여야 하는 이 상황이 끔찍하게 싫다. 싫은 일을 하려니 정말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담당한 지도교수 개인의 아량에 따라 덜 고통스러울 수도, 혹은 더더욱 끔찍할 수도 있는 면담. 여기서 학업을 계속할지 중단할지 심지어 얼마 정도의 휴학 기간이 있어야 학업에 집중할 수 있을지 등등에 관한 결정은 오롯한 내 몫이 아니다. 애초 당신의 자녀를 내쫓겠다는 내용의 우편은 내가 아닌 부모를 호출한다. 이 협상(?) 테이블의 주인공은 교수와 부모이다. 나는 당사자이지만 결정권을 박탈당했다. 학교로부터 자율적으로 결정내릴 권한을 인정받지 못한 나는 보호자 부모를 대동한채로 두 ‘주체’의 대화를 지켜봐야했다. 결정권을 가진 교수와 그에게 허가를 간청하는 부모의 모습을.
매우 매우 자퇴가 고픈 학생이지만 아직은 대학생 신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나로서는, 그리고 아직 부모와 정면으로 갈등할 용기가 없는 나로서는 이 수치스러운 상황이 불가피했다. 허가를 받기 위해 교수의 앞에 섰을 때 나는 ‘문제아’가 되었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왜 문제아가 되었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하고 마땅한 이유가 필요한 것은 물론, 어떻게 학교가 기대하는 충실한 학생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계획을 제시해야 하고, 휴학을 연장하려는 것에 대한 납득할만한, 개인의 노력이 돋보이는 서사가 필요했다. (아니 이런 걸 다 충족시킬 수 있었으면 애초에 여기 앉아 있었겠느냐고요, 교수님!)
이 세 번의(그리고 네 번째로 경험해야 할) 경험은 어떤 상징과도 같았다. 학교, 나아가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제와 낙오. 낙오 당한 것에 대한 열띤 변호와 어떻게든 기준에 도달할 것을 조건으로만 편입될 수 있는 공동체. 낙오된 것은 나 개인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고, 왜 낙오되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이 없다면 모든 책임은 ‘나’의 것이 된다.
나는 정신적 치료 과정이 필요했으나 학교를 다니는 동안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고, 따라서 학업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상황이 좋지 않았음을 부풀려가며 호소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수치심을 눌러가며 사유를 늘어놓았을 때, 교수는 왜 노력과 의지로 버텨낼 생각을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답변했다. 그러니까 내 항변은 ‘안쓰러운 소녀 가장’ 따위의 보편적 노오력 서사만큼 설득력 있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의 개인사는 어떤 납득할만한 서사와 저울에 달아 비교되었다. 그는 곁에서 전전긍긍하던 나의 부모에게 “너무 편하게 해주시는 것 아니에요.”라는 농담을 던졌다. 아니 교수님, 노력해서 이 정도인 거라니까요. 그 노력 없었으면 조건부 휴학신청서에 서명 받으러 오지도 않았습니다. 가정이 정말로 편했다면 제적 경고 뜨기 전에 휴학하고 정신병부터 고쳐서 이렇게 찾아뵐 일도 없었겠지요.
아무튼, 나의 노력과 의지는 주어진 상황에서 충분히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아주 쉽게 부정당했다. 그는 나의 낙오됨을 안타깝게 여기며, 한때의 치기로 치부하고는 다음 학기에는 꼭 돌아와서 열심히 해보라는 말과 함께 조건부 휴학을 허가해주었다. 나의 부모는 안도와 부끄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몇 번이나 감사인사를 전했고, 나 또한 고개를 조아리며 교수실을 나서야 했다.
나는 노력이 부족했던가? 솔직히 말해서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학업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나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만 축소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가? 내가 제적경고를 받은 이유는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가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 유무와는 관련이 없다. 나는 내가 공부를 하겠다고 나름대로 노력을 쏟아 부었어도 실패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나의 정신적, 경제적, 물리적 상황과 학교가 요구하는 것은 매우 상이했기 때문이다. 노력만으로 안정적인 학교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기반이 필요하다. 장애 없이 건강해야 하고,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필요하며, 자신의 시간을 학업을 위해 온전히 쏟을 수 있어야 한다.
학내의 기준인 성적이 개인의 노력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노력과 성과를 통한 평가는 일반적 통념처럼 ‘공평’하지 않다. 대학의 평가 시스템은 균일하지 않은 개인의 기반을 무시한 채 성과만을 두고 평가한다. 그리고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퇴출한다. 이것은 교육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나타낸다. 대학은 학업을 통한 자아실현과 성숙한 지식인을 육성하여 사회에 공헌한다는 교육 철학을 표방하고 있으나 그들이 길러내는 가치는 실상 그렇지 않다. 해당 시스템은 교육 대상이 신자유주의 사회에 걸맞은 가치를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노동력이 될 수 있을지 따지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있다.
우리는 사회의 요구에 따라 쓸모 있는, 재화로 교환 가능한 가치를 능률 있게 생산해내는 능력을 배운다. 내가 느꼈던 학벌은 그 안에 속한 개인이 어느 정도로 능률적인 노동력인지에 대한 징표였다. 그리고 내가 문제적 존재가 되는 이유는 이 징표에 걸맞은 수준의 능률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내가 대학과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러나 학업 성적이 괜찮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가능성에 대해 제시받은 적이 없다. 많이 힘들어했었다. 그러나 나의 고민과 고통과 우울은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인고의 노력으로 포장될 뿐 진지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기만적인 이야기일지 모른다. 어쨌든 좋은 성과를 냈던 나는 같은 학군의 학생 중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아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 주루룩 나열되는 앞글자들 중에서도 상층의 간판에 도전할 수 있었다. 지금도 소위 명문으로 불리는 대학교에 진학했다는 것만으로 많은 혜택 위에 있다. 전교 1등이라는 수식, 나아가 ‘서강대학교에 다닌다’는 소개만으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경험이 매우 일상적이었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납득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경험할 때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는 했다. 주입받은 대학 생활의 낭만도, 캠퍼스 라이프의 자유도 동경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동경했으나 솔직히 내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껴왔다. 그러나 의문을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왜? 질문을 시작하는 것은 바로 낙오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내가 낙오되기까지의 구구절절한 개인사는 굳이 적고 싶지 않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많은 학우들이 공감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경쟁력 있는, 사회적 인재상이 되는 것은 결국은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기반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를 두고 그것을 모방해 수준을 충족하기를 강요받고 있다. 이것은 구조적 문제이지만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교묘한 방식으로 숨겨져 왔다. 마치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것처럼 광고되는 것이다. 의지와 노력, 능률은 개인의 영역으로 치환되며 마치 누구든 노력만 하면 성공신화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처럼 확대된다. 성공을 위한 경쟁과 자기계발은 외압이 아닌 개인의 자유로운 노력으로 포장된다. 이 긍정성 안에서 우리는 끝없이 자기 착취를 해야 한다. 멈추는 사람들은 그저 낙오자일 뿐이다. 그리고 낙오된 사람들을 위한 대안은 없다. 생활을 영위하기에도 빠듯한 임금과 주거 환경은 정당한 벌이 된다. 자신을 어떻게든 갈아 넣어서 성과를 이루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노력’은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적합한 부문으로 쏠려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데, 쉽게 생각해보면 바로 그런 것이다. 취미를 위해 시간과 돈을 들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노력이 아니지만(취미가 공적인 부분에서의 성과에 영향을 미칠수록,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수록 더욱 그렇다.) 취업에 유리한 스펙을 쌓는 것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노력이다.
노력과 의지에 저울을 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사회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을 착취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람직한 노력과 그렇지 못한 것을 나눌 때의 기준은 ‘임금 노동’으로 포섭될 수 있는가 없는가와 밀접하다. 임금 노동은 일반적으로 ‘근로’라는 단어로 지칭되는데, 근로는 ‘성실하게 노동함’으로 노력에 대한 가치를 담고 있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영위할 수 있는 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성실하게,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성실함의 범주가 바로 노력으로 인정받을만한, 임금이 주어질 만큼의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성과적 압박은 목표해야 할 긍정이 되고, 임금이 부여되지 않는 노동은 근로로 인정받지 못하며, 임금 노동 내부에서도 그 ‘신성도’에 따라 급이 나뉜다. 어떠한 노동은 경외의 대상이 되고 어떠한 노동은 낙오자들이나 하는 하찮은 것이 된다. 교육은 그 신성함의 척도에 있어 가장 쉽고 직관적인 지표로 기능한다. 이른바 “공부 열심히 안 하면 평생 배달/청소/알바 등 열악한 일이나 하면서 가난하게 먹고 산다”는 흔한 통념이다. 이 통념은 이미 내 또래 세대에서는 낡은 것이 되었으나 여전히 신자유주의 사회를 지탱하며 작동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은 ‘노동이 당당한 나라’라는 구호를 통해 이러한 시스템을 타파하는 것을 가장 큰 공약으로 내세웠다. 어떠한 모습의 노동이든 상관없이 당당한 것, 똑같이 ‘신성한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정의당은 대선 출마 정당 중 내 또래 세대의 목소리에 그나마 진보적으로 응답하고 있다고 느꼈던 정당이었으나 나는 해당 구호와 많은 낙오자들이 처한 현실 사이에서 상당한 괴리감을 느꼈다.
당당해질 대상으로 호명되는 ‘노동’은 과연 무엇인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노동’의 범주와 어떤 것이 임금-정당한 대가-을 받아야 할 노동이고 아닌지를 가르는 기준에 대한 질문이 없는 구호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노동은 매우 한정적이다. 차별받는 노동이 당당해지는 것, 신성하게 취급받는 ‘고급 노동’과 동등하게 취급받고, 열등하지 않은, 존중받아야 할 정상의 범주로 편입되는 것, 더불어 생계를 유지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보장받는 것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모든 임금 노동이 당당해져야 한다는 신념은 개인의 몫으로 지워지는 성과와 노력, 끝없는 자기 착취의 구조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해왔던 노동들은 어떻게 당당해져야 하나. 장애가 있어서, 질병 때문에, 너무 어리거나 나이가 들어서, 이미 자기 착취의 끝에 번아웃 되어서,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임금 노동에서 배제되어온 사람들은 구호 속에서 여전히 당당하지 못하다. 임금 노동을 통한 생계유지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는 애초 임금 노동 자체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낙오자로 분류해왔으며 당당한 노동을 필두로 하는 ‘진보적 노동관’은 이 시선을 유지, 답습한 채로 퇴출당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줄일 것만을 주장한다.
소외된 노동에 대한 진보적 관점은 적어도 어느 단계를 지나오기는 하였지만 ‘근로’의 가치에 머물러있는 듯하다. 적어도 내 주변의 모두는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는 발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그 의견을 당당하게 전시할 수는 없다. 이 낡은 문장은 특정 세대 이후로는 보편적인 사회 정의에 걸맞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들로 반박되는데, 주로 이런 것들이다.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긍정, 해당 노동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혹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음을 피력하는 등이다.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 자료에서는 환경미화원, 급식 아주머니로 대표되는 소위 하위 노동에 대한 감사를 담은 내용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들이 대표되는 이유는 교육 대상이 가장 쉽게 일상에서 접할 수 있으면서도 사회에 기여하며 없어서는 안 될 노동으로 근로의 범주에 편입시키는 것이 가능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육은 아이들에게 환경미화원이나 급식 배급을 장래희망으로 삼도록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저 고마운 존재, 차별적 대우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사회에 이바지하는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해당 노동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부당한 임금, 근로시간 등은 가려지며 어쩌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한 가지 근거로 긍정된다. 이 시선은 노동의 신성도에 따라 차등을 두고, ‘근로’하지 못하는 이들을 배척하는 기존의 통념과 무엇이 다른가?
새로운 인식과 담론이 필요하다. 노동이 성과를 내야 할 의무가 있을까? 근로에 편입되지 못하더라도, 임금 노동을 할 수 없어도 인간다운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돌고 돌아 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나는 ‘근로자’로서 자기 착취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 그것을 위해 어떻게든 학벌을 유지하고 내 자율적인 선택으로 학교를 떠나거나 남을 수 없는 상황이 고통스럽다.
나는 대학에 진학한 이래로 부족한 생활비와 용돈을 위해 늘 아르바이트를 했다. 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비정규직 노동자 엄마의 수입만으로는 나의 ‘정상적인 대학생활’에 충분한 비용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그 아르바이트마저도 1년이 넘도록 구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흔히들 말하는 철없는 청년세대처럼 엄마의 등골을 빼먹으며 미래를 위한 스펙 따위를 쌓기는커녕 어떻게든 대학 공간을 벗어날 것만 생각하면서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다. 사실 이 성적과 이 스펙으로는, 졸업여건이라곤 전혀 채우지 못한 너덜너덜한 학사기록으로는, 어떻게든 대학 등록금을 버텨가며 졸업장을 따낸다 하더라도 가망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언제나 해왔던 불안정 노동이 아니면 일할 수 없을 것이다. 혹여 이 상태로 좋은 조건의 직장을(가능하지도 않지만) 구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당한 노력의 대가가 아닐 것이기에 정의롭지 않다. 충분한 자기 착취 없이 쉽게 일자리를 얻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니까.
나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하는 걸까? 그것이 적어도 더 이상 엄마를 착취하는 방식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자기 착취를 해보려 해도 제때 치료받지 못했던 정신 병력과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을 만한 기반이 아무것도 축적되지 않은 상황이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비상시국으로 인해 더욱 비좁아진 아르바이트 노동은 구하기조차 쉽지가 않고, 구한다 해도 이전보다 유연해진 조건 아래에서 언제 일자리가 사라질지를 걱정하며 노동해야 할 것이다.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해 제대로 진단을 받거나 상담을 늘리는 것이 두렵고, 치료는 과정이기에 낫기 위해서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나아지지 않으면 효율적인 성과를 낼 수 없다. 나의 ‘근로자로서의 가치’는 그저 떨어지기만 할 뿐, 애초 가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이것을 끌어올릴 방법은 없다. 어떻게든 기반을 만들어보기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시도해보고 싶어도 당장의 생활비가 빠듯해 포기하고 만다. 내 인생은 이미 악순환의 굴레에 들어버렸다. 연료가 고갈되어버렸는데 연료를 채울 기반은 없고, 그저 시동을 걸기 위한 시도만을 반복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은 나와 같은 낙오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다. 임금 노동이 삶의 조건으로 전제되는 사회인데, 나는 그나마 내 삶을 지탱하던 열악한 노동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사회는 노동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충분히 책임지지 않기에 누군가의 부양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우리를 부양하는 사람들은 더욱 큰 짐을 지게 되었다. 어쩌면 좀 더 안정적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많은 비-낙오자들 또한 내 상황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임금 노동을 전제로 유지되는 시스템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로 인해 마비된 경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던가. 이 문장은 더는 성립되어서는 안 된다. 아니, 임금 노동을 통한 성과주의 체제를 관통하는 듯 보이는 이 문장은 애초 단 한 번도 제대로 성립되었던 적 없었다. 사회적 보상 체계는 원래부터 일하는 만큼, 즉 사회에 기여하는 만큼 주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축적되는 것은 임금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자본이 아닌 불로소득이다. 임금은 자신과 공동체를 돌보기 위한 일을 했기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에 기여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임금이 근로의 대가로 여겨지는 것은 노동함에 있어 마치 개인의 노력, 성과가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이도록 구조를 은폐한다.
나는 감히 일하지 않고도 먹을 권리가 보장되어야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였던 재난지원금은 많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뜻 깊은 시도였다고 느낀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었던 재난이 전 국민의 재난이 되었다. 이는 낙오됨의 경험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재화. 나는 이것이 재난 상황의 일시적 정책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나아가 노동하지 못해도, 노동을 인정받지 않아도 낙오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기를 바란다. 누구나 이러한 ‘재난 상황’이 닥치더라도 미래를 계획하고 삶을 꾸릴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필요하다.
모두가 상상해보았으면 한다. 원치 않는 노동으로 막막한 생계를 이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삶을 꾸릴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누군가는 그럼에도 더 많은 재화를 얻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동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기 착취를 멈추고 스스로를 돌볼 여유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부모와 교수 사이에서 더 이상 전전긍긍하지 않고 학교를 떠날 수 있을 것이고, 내게 맞지 않는 것을 하기 위해 꾸역꾸역 살지 않아도 될 것이며, 내 상태에 대해 더욱 정확하게 진단받고 다른 치료들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일 굶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 집 고양이들에게 좋은 화장실과 모래를 사줄 수 있을 것이고, 조금 사치를 부려 갖고 싶었던 데스크 탑과 게임기기를 사서 정당한 가격으로 취미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이 불안하지 않아진다면 운동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학점의 시스템 안에서 제한 시간이 걸린 과제와 시험을 수행해내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우리 엄마는 아빠와 이혼해 공간을 분리할 수 있게 될 테고, 무엇보다 다른 가족들까지 부양하기 위해 무리해서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학교를 다니며 언제나 내가 공부와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러나 조금 더 단단한 기반 위에 섰을 때를 상상해본 뒤에야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기반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기반을 사회 시스템이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재난지원금’의 이름으로 일시적으로 주어졌던 사회적 보장이 조건 없이, 끊기지 않는 미래에 대한 상상이다. 이 상상이 노동과 인간됨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담론을 불러왔으면 한다. 나는 이 글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자기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어떤 것을 하며 살아갈지 잠깐이나마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여전히 내 상황은 막막하고, 아마 이 글을 읽을 사람들 또한 대부분이 막막하겠지만, 그 막막함을 다른 사회를 꿈꾸며 조금이라도 타파할 수 있기를. 언젠가 우리는 상상이 이루어진 미래를 직접 개척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