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 문어와 버섯, 꽃과 함께
끝이 머지 않았다. 2019년 11월 5일, 세계 153개국의 과학자 11,000명은 “지구를 보존하기 위한 즉각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기후 위기는 인류에 막대한 고통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제 허비할 시간이 없다”며 기후 변화의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구 억제, 육식보다는 채식 위주의 식사, 탄소 제로 경제 구축, 저탄소 재생에너지 개발 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고에도 거대한 사회적 변화는 목격되고 있지 않다. 아직도 ‘출산율’ 증대와 경제 성장이 유효한 사회적 화두인 지금, 우리에게는 얼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가?
바삭하게 튀긴 문어 칼라마리, 송로버섯을 곁들인 소고기 스테이크와 그 위에 얹힌 가니쉬 한 송이…. 식욕을 자극하는 식탁의 풍경은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여준다. 식탁은 자연과 인공이 뒤섞인 일상적 권력의 장이다. 식탁에 먹거리가 올라오기 위해 필요한 과정은 먹어도 되는 것을 규정하는 경계작업이다.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근대적 체계의 설립은 자연을 먹거리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근대의 핵심인 인간 ‘이성’은 먹혀도 되는 것, 먹기 위해 감금해도 되는 것을 결정하여 우리의 식탁 위에 올린다. 병든 동물들의 대량 살상은 법을 통해 살처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식탁은 먹거리와 먹거리 아닌 것, 즉 주체와 타자를 경계 짓는 울타리로 기능한다. 주체-타자의 이분법은 먹거리로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의 생산과도 연관된다. 먹어도 되는 것들은 지식의 대상이자 관리의 대상이다. 종들을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자연’과학 속에서 인간-주체는 지식의 생산자이며, 자연-타자는 지식의 대상이다. 그렇게 먹거리는 ‘마음의 양식’이 된다. 그렇기에 ‘먹이 피라미드’는 자연에 대한 중립적 기술(description)이 아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필적할 만큼 오래된 인간적 건축물이다. 인류의 역사는 피라미드 정점에 인간을 위치시키고, 다른 종들을 벽돌로 만들기 위한 건축의 역사였다. 인간 문명의 기술(technology)은 세계를 먹거리로 만들며 인간 자신은 먹거리가 되지 못하도록 막는 요리의 기술이었다.
인간은 오로지 입으로 존재한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먹거리의 세계이며, 인간은 먹히지 않는 가장 상위의 존재자이다. 또한 인간의 입은 언어와 문화의 생산자로서 발화하는 입이자 무엇이 먹거리(자연, 대상)이고, 무엇이 입(문화, 주체)인지를 규정하는 입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은 아무도 먹을 수 없게 차단하고 윽박지르는 입, 좁디 좁은 주체의 자리를 지켜내려는 입이기도 하다. 문화와 언어는 이질적인 말을 하는 이들을 입의 자리에서 박탈하는 입들의 체계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끊임없이 우리의 식욕을 자극한다. 21세기의 권력은 더 이상 무엇도 ‘강제’하지 않는다. 통치의 기술은 쾌락 생산의 기술이자, 미각을 길들이기 위한 기술이다. 입맛을 자극하는 새로운 상품, 강렬한 맛에 대한 중독과 먹기 위한 삶이 계속된다. 먹이 피라미드의 정상에 있는 것은 맛을 관장하는 미뢰다. 우리에게는 혀가 있지만, 미각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소비할 수 없을 만큼 생산한 먹거리들이 전쟁을 통해 소비되었듯, 모든 것을 먹어 치운 입은 칼로리의 잉여를 소모하기 위한 운동기계를 만든다. 비대해진 생산과 잉여의 양면에는 아사와 빈곤의 은폐가 있다. 우리의 식욕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나는 분명히 더 먹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먹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뒤편으로 밀려난다.
이제 소비주의(consumerism)와 생산은 먹을(consume) 수 없는 것들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분해되지 않는 초미세 플라스틱과 비닐, 반감기가 수십에서 수만 년에 이르는 고준위 방사능 폐기물…은 소화되지 못한 채 신체기관들에 누적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통해 물질계에서 벗어나 입을 가져다 댈 수 없는 초월적 가상으로서의 인간이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인간은 현세적 시간을 벗어나 영생하는 절대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말은 ‘인간이 아닌 자연’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과도한 생산에 대한 반대는 천진한 ‘자연 보호’로 오해되기 일쑤이다.
요리의 기술은 끊임없이 먹거리처럼 ‘보이는’ 것들을 발견한다. 약육강식과 먹이사슬이라는 유비는 경제, 정치에 걸친 방대한 인간적 질서 전부에 통용된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먹어도 되는 것, 먹거리와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는 치밀한 분류체계가 있다. 요리의 기술은 여자들을 ‘따먹’고, 이주민들을 식탁에서 쫓아낸다. 먹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요리를 해야 하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식탁에 바쳐야 한다. 근대 질서는 먹히지 않는 주체-인간, 타자를 요리하는 생산-기술의 체계이다. 자본/권력은 우리의 미각을 길들이며 항구적으로 자극하는 쾌락의 시스템이다. 지상의 가장 낮은 위치에는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가련한 꽃 한 송이-‘어머니’ 자연, 여성, 장애인, 청소년…이 있다. 문화의 영역에서 쫓겨난 심해의 플라스틱 무덤 아래에는 문어-난민, 성소수자, 빈민과 ‘창녀’…가 있다. 이 모든 것을 폭발음과 함께 존재를 무로 되돌리는 버섯구름이 에워싸고 있다. ‘종말’을 앞둔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는 무엇인가?
반-주체
‘여성’이라는 범주가 가부장제의 발명품인 것처럼, ‘주체’라는 범주 또한 근대 경제/정치 체계의 신화적 산물이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는 생각보다 흐리며, 인간은 다양한 종들과의 영향관계 속에서 공진화[1]한다. 우리가 씹어 삼킨 ‘먹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우리도 어느 순간 먹히고 있었다. 인간과 기술의 경계 또한 흐리다. 해러웨이는 사이버네틱 시대 인간과 과학기술의 상호침투가 가져온 공진화 과정을 거부가 아니라 경이로 받아들였다. ‘사이보그 선언’은 한편으로는 군산복합체 다국적 자본주의의 위력에 대한 응전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활로 모색 프로젝트였다. 간단히 말해 명령-통제-통신-첩보의 시대, 사이보그 되기만이 살길이라는 선언이었다. 자연문화’는 자연과 문화,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선택적, 도덕적 결합이 아닌 진화하는 사회의 실체로서, 종횡단적 사회성cross-species sociality을 갖는다는 것을 표방한다. 종횡단적 사회성은 종과 종의 경계를 허무는 사회적 성격을 상상하는 것이며, 기술, 인간, 동물의 사회적인 경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새로운 형태의 자연문화를 형성하길 요청한다. 모든 것은 혼종적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금 경계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분산된 경계 속에서 서로에게 기댄 공생의 방식을 찾는 일이다.
반-생산의 기술
인간은 이미 실리콘 칩과의 접합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기술은 배척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동시에 불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은 인간을 조각 내어 요리하기 위한 기술이다. 인간이 먹거리로 스스로를 개방하는, 다른 종들에게 만찬을 대접하는 기술 말이다. 입이 되기 위한 기술은 단일종을 배불리 하기 위한 생산과 소비의 기술이다. 반대로 스스로를 요리하는 기술은 기꺼이 다종을 위해 스스로를 해체하며, 더욱 풍성한 식사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다. 인간을 요리하는 기술은 분해될 수 없는 것들을 분해하는 ‘썰기’ - 미세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화석연료를 저탄소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며 핵발전소를 닫는…- 의 기술이다. 또, 그것은 조각들을 모아 뒤섞고 빼내는 ‘볶기’ – 다종들의 공존을 모색하는 정치학, 공유자산의 재분배와…- 의 기술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냄비 전체의 온도를 올렸다가 다시 낮추는 ‘끓이기’ – 출생률을 낮추는 방식을 고안하고, 오염 물질과 탄소 배출을 줄이는, 윤작과 안식년, 그리고…- 의 기술이다.
반-쾌락
먹거리가 된 인간은 타자의 입과 접속한다.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은 무의미하다. 종들의 관계는 언제나 ‘사회적’이다. 때문에 굳이 무언가를 자연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개별적 항들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상황’이지, 나무와 숲 같은 것과는 관련이 없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나의 고통은 단지 나의 고통이고, 나의 쾌락은 그저 나의 쾌락이다. 사회체 속에서 타자를 향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은 윤리적, 피학적 쾌락으로 전환된다. 고통은 자신의 살을 내어 주며 타자의 욕망, 타자의 쾌락을 향해 운동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쾌락’이라고 불렀던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된 쾌락이 아니라 시스템이 충동하는 단일한 방식의 쾌락이었다. 기꺼이 먹거리가 되어 입과 마주했을 때 외부의 가장 먼 곳에 있던 ‘쾌락’은 이제 나와 접속한 이의 쾌락이 되며, 바로 곁에 있는 이의 혀라는 가장 가까운 장소로 위치를 변경한다.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시간은 <세상 끝의 버섯>[2]의 시간이다. 일본의 송이버섯은 황폐화된 환경에서 생존하며, 임금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고 살아가는 버섯 채취자들도 그러하다. ‘단지 발견한 버섯들을 판매할 뿐’인 그들은 불안정한 생계의 표본적 사례이다. 우리가 함께 생존의 기술을 발명하는 시간은 불안정한(precarious)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든 생존하는 송이버섯, 그리고 그와 함께 파트너를 맺고 살아가는 버섯채취자들의 시간이다. 생존을 위해 도래해야 하는 시간은 낱낱의 먹거리로 분해된 인간을 흙 속에서 섭취하는 식인 꽃, 그리고 인간이 생명력 넘치는 만찬의 일부가 된 시간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시대는 ‘문어 괴물’ 크툴루[3]의 시대이다. 남은 것은 종말뿐이라는 패배주의적 전망들에 맞서,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비인간을 위한 피난처를 조성하며 다시 생명의 기회를 찾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파괴되어 버린 피난처들을 복구하는 시대, 쑬루세(Cthulucene, 쑬루世)는 바로 그 복구의 시대다.
완전변태의 종착지는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 무엇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다종들의 공진화는 종의 경계를 아득히 넘어서며 최종적 변이 형태로 전진한다. 그렇게 우리는 꽃-버섯-문어-인간-문어-버섯-꽃-버섯-문어…로 무한히 변태한다. 서로를 씹어 먹으며 우리 모두의 시간을 한데 모아 뒤섞는다면, 그래도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지 모른다.
[1]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공생’하면서 ‘공진화’하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한다. “동물 진화의 살아있는 역사의 모든 단계가 내부적, 외부적으로 동물에 대량 서식하는 박테리아에 적응하는 과정”인 것처럼 인간의 질병 역시 가축과의 공생을 통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결과라고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어형변이적인 관점에서 예술과 기술이 서로 공진화하듯이, 자연과 문화가 상호작용함으로써 인간과 반려동물도 서로 적응하면서 공진화한다.
[2]
안나 칭(Anna Tzing)의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을 참고하라.
[3]
해러웨이는 거미 ‘피모아 크툴루’를 차용하여 새로운 시대의 이름을 짓고자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그것은 러브 크래프의 소설 속 여성혐오자/인종주의자 문어 괴물 ‘크툴루’와 철자가 같았다. 하여 그는 그리스적 철자 크툴루(Cthulhu)를 쑬루(chthulu)로 변경하여 다가와야 할 시대를 쑬루세(cthulucene)로 명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