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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지서강 Oct 22. 2020

완전변태 선언

완전 변태 02. 양날의 딜도를 차고 섹슈얼리티를 횡단하라



‘남성’에게 리얼돌이 있다면 ‘여성’에게는 딜도가 있다. 남성형 리얼돌을 만들면 된다는 주장과 더불어, 여성의 딜도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딜도가 리얼돌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도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다음과 같은 청원이 게시되었다. “저는 우리가 규제해야만 하는 성기구는 인형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들이 사용하는 딜도임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실제 여성의 신체를 닮아가는 남성의 성기구와 다르게 여성들의 성기구는 기능성에만 집착하며 남근 본래의 모습을 찾기힘든 기괴한 형태로 점차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왜곡된 형상이야말로 성기구의 사용자들로 하여금 잘못된 성관념을 가지게 만드는 주요원인임이 분명하며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번져가는 남녀성대결의 분위기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을것입니다. 왜곡된 형상의 성기구에 중독된 여성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이상에서 벗어난 육체를 가진 남성들은 조롱과 혐오, 증오의 대상일 뿐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용 성기구인 딜도의 판매와 소지를 강력하게 규제 해주시기를 한사람의 국민으로서 요청드립니다.” 김소연 대전시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성매매 여성들에게 리얼돌에 대해 묻는 중앙일보 기사를 링크한 뒤 여성계의 리얼돌에 대한 견해에 논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건 저뿐인가”라고 묻고 “인권타령 하면서 생명체인 태아 낙태죄 위헌을 주장하고, 인형을 두고 인권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여성용 자위기구를 당당하게 논하자고 하고. 자위기구 중 남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것들 남성 인권침해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찬반을 떠나, 비논리 아니 무논리에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하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라면서 “여성계 주장 보고 있으면 그 모순에 멘탈 붕괴되곤 한다. 결국 또 약자 타령으로 귀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래도 ‘조롱과 혐오, 증오’를 당하는 불쌍한 남성들과, 김소연 씨의 ‘멘탈 붕괴’를 위해서라도 딜도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앞선 글에서 리얼돌-여성의 관계를 보았다면 이제 딜도-남성의 관계를 보도록 하자. 이 글에서는 딜도가 남성을 ‘대상화’ 하는지, 혹은 오히려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위계적으로 상위에 있는 것으로 고정하는 질서에 부합하는지 확인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신분석학 담론을 통해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권력과 상징적 의미를 부여 받았음을 논증하고 딜도, 페니스, 팔루스에 대한 퀴어적/변태적 해석이 어떻게 가능한지 검토할 것이다.


1부 딜도는 페니스가 아니다

1) 프로이트와 라깡의 팔루스

여성은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각각으로 분해된 신체들의 조합이기에 성기구 또한 여성 신체의 총합으로 향한다. 여성의 가슴은 성애화 될 뿐 아니라, ‘어머니의 젖’이라는 형태로 아이에게 만족감을 주도록 존재하는 기관이 되어 여성에서 분해되어 나간다. 여성의 외부성기형태는 남근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기관으로 해석되며, 질이 또 여성에서 분해되어 나간다. 그러나 남성은 페니스만으로 자신의 남성성 전체를 주장할 수 있다. 남성의 몸은 분해된 적 없고, 오히려 팔루스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되며 권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페니스-팔루스는 남성의 분해된 신체 일부가 아니라, 리비도가 집중된 지점이며 욕망의 기표라는 상징적 위치를 점한다. 결과적으로 페니스는 남성에서 분화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의 이상적 전형이 되며, 팔루스는 남성 신체의 부분이 아니라 (‘양성’ 모두의) 섹슈얼리티와 욕망 자체를 상징하는 초월적 기표로서 상승한다. 이 논리 속에서 딜도는 남근, 그리고 남성에 대한 대상화로 보기 어렵게 된다.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 담론에서의 오이디푸스 구도와 페니스-팔루스에 대한 개념 소개가 필요하다.


먼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구도에 대해서 보자. 인간이 성장하는 첫 단계는 어머니-아이가 합일된 상태로, 주체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으며 아이는 충만함 속에 있다. 3~5세에 아이는 남근기에 들어서며 이성의 부모를 욕망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게 된다. 남아는 근친상간적 욕망으로 어머니와 계속해서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있고 싶어하나 그를 금지하는 아버지 때문에 그 욕망은 좌절된다. 아버지의 금기를 위반했을 때 당하는 벌은 거세이다. 이것이 둘째 단계이다. 아이는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고 근친상간적 단계를 극복하여 성정체성을 지닌 주체로 태어난다. 남아의 경우 아버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며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선택하지만, 여아의 경우 어머니와 동일시하며 아버지를 대상으로 선택한다.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여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데, 이후 남근기에 들어선 여아는 자신이 거세되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페니스 선망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페니스 선망이 아이를 향한 선망으로 대체되는 것이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지위’의 확립을 위해 필요하다. 이 모델은 지나치게 자연주의적, 생물학적 접근법에 치우쳐 있을 뿐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의 남성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되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전제들과 결별하여, 생물학적 기관으로서의 남근이 아닌 ‘팔루스’, 그리고 ‘상징적 아버지’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때 ‘상징적 아버지’란 실제의 아버지로 한정되지 않는 상징계의 질서(에 대한 유비)로서, 문화, 법, 언어 등의 총체를 칭한다. 라캉은 주체를 ‘과정 중의 주체’로 바라보며, 언제나 상실된 것을 다시 채우려고 하는 결여된 주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상징적 기표들의 세계, 즉 상징계이다. 물질적으로 존재하며 상상계 속에서 살아가던 아이는 언어, 문화를 받아들이고 거세되어 상징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 맥락 속에서 그의 ‘팔루스’는 생물학적 ‘페니스’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라는 기표가 된다. 라캉의 오이디푸스 1차 시기는 프로이트와 유사하다. 아직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상징계로 진입하지 않았기에 오로지 육체적 사실성으로 존재하는 아이는 어머니와의 나르시시즘적 합일 속에 있다. 이때 어머니의 젖가슴은 상상적 팔루스(욕망의 대상)이다. 이미 상징계로의 이행을 거친 어머니는 결여와 상실의 인간이므로, 아이는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기를 욕망한다. 2차 시기에 들어서서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팔루스를 욕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시기의 아버지는 상상적 아버지이며, 아이와 어머니의 합일상태를 금지하는 법의 집행자이다. 3차시기로 들어서기 위해 아이는 상상적 집착을 버리고 아버지-법을 받아들인다. 아이는 자신의 모든 욕구를 채워주었던 상상적 팔루스를 상실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상징적 팔루스’라는 기표(욕망의 대상)만을 가진다. 그는 이후의 삶 전부에서 상실을 채우기 위해 대상 ’a’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 상징적 팔루스마저 결여만을 표시하고, 완전하지 못한 상징계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기표로서 작용한다. 이처럼 인간은 언제나 결여된 욕망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상실의 존재이며, 사회 속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법의 욕망에 대한 억압이 필요하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딜도는 설령 페니스와 똑같이 생겼더라도 남성을 대상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페니스와 똑같이 생길수록 권력을 가진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리비도의 흐름을 초월적 가상(남근)에 결부시킴으로써 사회적 억압을 수행한다.” 페니스-팔루스-딜도의 관계가 성립한다면, 딜도는 그 자체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사물일 것이다. 팔루스는 “사회 억압의 최일선에서 욕망의 흐름이 탈코드화, 탈영토화의 극한으로 치닫지 않도록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딜도를 그 자체로 ‘남성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딜도를 사용하는 모든 행위자들을 남성중심적 섹스의 부역자로 칭하는 것은 다소 과하게 느껴진다. 또한 딜도를 팔루스로 본다면, 딜도는 남성중심적 섹슈얼리티를 강화하기에 ‘딜도도 금지해라’라는 말은 오히려 ‘리얼돌을 금지해라’라는 말과 같은 궤에 놓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딜도가 위치한 연관관계, 즉 ‘강제적 이성애’와 남근중심적 섹슈얼리티를 비판하고 팔루스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2) 팔루스는 남성의 것이 아니다 : 버틀러의 레즈비언 팔루스

팔루스는 페니스와 다르게, 상징적 차원에 있다. 주체는 거울 속 이미지, 즉 타자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통일성을 확인하기에 자아의 윤곽은 타자와의 나르시시즘적, 상상계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 나르시시즘적 징표의 기관은 페니스로서, 자아가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상상적 인식의 조건이 된다. 이제 신체일부는 상상적 효과를 가지며, 페니스는 팔루스가 된다. 이처럼 라캉이 제시하는 의미화의 과정 속에서, 의미는 신체의 특정 부위에 투자, 과잉투자된다. 버틀러는 라캉은 남성주의적 입장에서 그 부위를 페니스/팔루스로 보았다고 비판한다. 라캉이 팔루스를 특권적 기표로 설치하는데 반해, 버틀러는 팔루스를 억압된 의미화 연쇄의 효과로 본다.


버틀러는 팔루스를 특권적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페니스-팔루스의 관계를 끊고자 한다. 팔루스는 특권 없는 하나의 기표에 지나지 않기에 페니스가 없는 이들에 의해 재의미화될 수 있다. 그는 상징계적 팔루스-신체일부로서의 페니스, 육체-자아, 물질-정신 등의 분리불가능성을 젠더의 정치학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이 맥락에서 레즈비언 팔루스는 팔루스의 패러디로 제시된다. 팔루스는 페니스가 아니라 상징이므로, 거세불안과 페니스 선망에 시달릴 이유가 없으며 레즈비언 팔루스는 이성애 패권담론에 대한 패러디로 등장한다. “남성의 기관으로 암시되는 팔루스는 육체의 다른 부분들(가령 팔, 손, 골반, 무릎 등등)로 ‘충분히’ 전치될 수 있으며, 레즈비언 팔루스를 통해 여성은 라깡이 구분을 둔 ‘팔루스 갖기’(to have phallus)와 ‘팔루스 되기’(to be phallus)의 경계를 아우르는 존재가 되어 남근선망과 거세불안을 모두 겪을 수 있는 주체가 된다”. 이는 팔루스와 페니스의 관계를 끊어내며, 라깡의 원래 주장에 ‘충실하게’ 팔루스를 텅 빈 기표로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문제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우리는 팔루스를 변용하는 것에서 만족해야 하는가? 팔루스는 실제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재전유될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팔루스를 폐기하지 않고 재전유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욕망의 억압과 상실에 기초한 오이디푸스적 주체와 라캉적 ‘상징계’-‘상상계’라는 구분 자체가 담고 있는 문제는 없을까?


3) 정신분석 비판 : 오이디푸스와 안티-오이디푸스

첫째, 팔루스라는 '기표'는 그 기의로서의 내용이 변경될 수 있다고 하여도, 마치 여성 범주에서의 '범주'로서의 '여성'과 같이 자신이 정의하고자 하는 기의를 규제하고 생산한다. 팔루스라는 기표에는 또 하나의 외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페니스를 연상케 하는 ‘팔’-‘루’-‘스’라는 외연이 그것이고, 기의가 변경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변경된 기의는 남근phallus이라는 문자적, 음성언어적 외연을 가진다. 쉽게 말해, 팔루스가 페니스라는 생물학적 기관과 무관하다면 그것을 왜 ‘사과’라고 부르지 않는가? ‘거세’가 물리적 거세와 무관하다면 왜 ‘파괴’라고 부르지 않는가? 팔루스라는 기표의 외연은 이미 기의의 내용을 생산하며 규제한다. 따라서 ‘팔루스’라는 개념은 기술적(descriptive) 사실이 아니라 무엇이 기의가 될 수 있는지 일정 부분 지시하는 수행문이다. 그것은 “남근중심 섹슈얼리티의 초월성에 대한 동의라는 의무를 다하고 나서만 기의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라”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팔루스의 '결여'와 어머니 몸의 '상실'과 같은 오이디푸스적 전제는 상실 자체를, 결여 자체를 생산한다. 잃은 적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 가진 적 없는 것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것이 '결여'와 '상실'이라는 개념이다. 여성의 질은 페니스의 ‘부재’가 아니고, 우리는 애초에 어머니의 몸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기원을 호출하는 ‘상실’이라는 서사는 잃은 적 없는 것을 잃었다고 그르게 주장할 뿐 아니라, 상실의 회복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목적론으로서 기능한다. 또한 여기에는 물질, 정신의 이분적 구도가 상정되어 있다. 삶에서 겪는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어머니의 몸(어머니의 자궁, 젖가슴 등)과의 합일 상태를 두는 것은 물질-정신, 여성-물질, 남성-정신이라는 이분법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 팔루스는 그것이 기표가 된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초역사적인 구조로 상정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것이 형성된 사회적 구조와 무관한 차원에서 받아들여진다. 라깡은 비록 기표의 내용이 무한히 변경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오이디푸스적 삼자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를 인간의 기본적 구도로 봄으로서 주체 형성의 원리 자체는 고수하고 있다. 여아는 어떻게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는 어떻게 아버지와 결혼관계를 유지하는가? 돈이 있었으면 아빠와 이혼했을 것이라고 하는 엄마의 말에서, 나는 어머니가 아빠에게 팔루스를 빼앗겼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팔루스를 인질로 잡고 있기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탈출할 수 없다. "아들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팔루스를 욕망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버지의 위치를 점하고자 한다". 어머니가 원하는 그 팔루스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빼앗긴 자기 자신의 팔루스이다. 부계계승 가족제도라는 시대적으로 특수한 체계의 성립이 어머니에게서 '팔루스'를 빼앗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 원래 여성이 '팔루스'가 없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사실과는 연관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오이디푸스적 구도가 출현한 사회적 사실도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가족적 체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문제적일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욕구를 결핍(빈곤)과 일치시키고 욕구에다가 ‘자연성’을 부여한 것 은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자본주의는 그 시초부터 결핍(빈곤)을 양산함으로써 탄생했다. 원주민들의 자급수단인 빵 나무를 베어 내고 농민의 공유지에 울타리를 침으로써 그들을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뜨렸고 그렇게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을 ‘자유롭게’ 노동력을 구매 하는 프롤레타리아로 ‘구원’해 주었다. ···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산업예비군(혹은 비정규직)의 노동 선망은 노동자의 실업 (노동박탈) 공포와 배타택일적으로 이접된다. 남근 선망과 거세(남근상실) 공포로 만들어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먼저 자본주의 생산의 장에서 형성되지 가족의 요람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잠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제시되는 정치철학적 견해를 보자. 오이디푸스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아버지에 대한 가책은 타인에 대한 증오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이는 문화 안에서도 표현된다.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즉 아버지라는 상징물로 표현되는 ‘우리 문화’와 주체가 갖는 관계는 존경, 경탄,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 대해서 생기는 죄의식 등이다. 이는 역으로 이방인들, 전통을 훼손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아버지라는 금지의 법, 어머니라는 금지를 통해 욕망의 대상으로 성립하는 대상,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을 정체성 삼아 생기는 아이의 욕망이라는 삼각관계를 ‘인격의 형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비판적 관점에서 이는 극복되어야 할 장애이지 정상적인 욕망의 형성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은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을 이론적으로 승인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가족삼각형, 금지-금지된 대상 사이에서 죄의식을 가진 아이라는 오이디푸스적 삼각형 속에서 태어나는 인격적 형태를 벗어나서 욕망을 비인격적인 형태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금기를 세우는 오이디푸스적 법에 매개되지 않으며, 사회에 의해 단일한 방향으로 ‘코드화’, ‘영토화’되지 않은 방식의 욕망을 시험하는 것이 <안티-오이디푸스>의 핵심이 된다.


2부 딜도는 팔루스도, 페니스도 아니다

1) 제작된 몸, 그리고 딜도

앞서 암시하였듯, 딜도가 팔루스로서의 위치를 인정받거나, 팔루스임을 중심으로 비판 받는다면 이성애중심적, 남성중심적 젠더 해석도 뒤따라올 수 있다. “닫혀 있는 남성의 몸과 다르게, 여성의 몸은 “경계 없이 열린” 것으로 여겨지고, 따라서 딜도는 결여를 채우는 사물로 해석되었다.”   팔루스가 없는 여성이 팔루스를 보충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딜도라면, 여성은 페니스가 ‘결여된’ 존재로서 고정된다. 이성애자 여성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문제는 같다. 딜도를 사용하는 레즈비언들은 남근 선망을 하는 이들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는 유사-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 즉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열등한 모방이 된다. 이때 딜도가 남성성의 ‘보충’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은, 애초에 ‘남성성’(페니스) 자체가 딜도로 보충 받아야 하거나 보충 받을 수 있는 불완전한 것임을 뜻하기도 한다. 딜도는 페니스를 보충하는 보다 우월한 것이 될 수도 있으며, 페니스는 생체-딜도로 격하될 수도 있다. 그러나 딜도가 끊임없이 팔루스적 기표 자체 혹은 그의 보충으로 해석될 때, 팔루스에 주어지는 과잉된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페니스-팔루스-남성성이라는 연관관계, 억압과 결여라는 오이디푸스적 구조 자체는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프레시아도는 <카운터섹슈얼 선언Countersexual Manifesto>에서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벗어난 딜도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젠더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특히 물질적 신체와 그것을 생산하는 기술(technology)에 대해 분석하였다. “‘카운터섹슈얼리티’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집중하는데, 이는 자연적으로 여겨졌던 인간의 특질들(특히 성적)이 모두 몸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기술의 결과라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에 따르면 “젠더는 보형물(prosthetic)이다. 젠더는 몸의 물질성을 통해 발현하며, 순수하게 구성된 동시에 완전히 유기적(organic)이다.” 젠더는 그 육체적 유연성(plasticity)이 원본과 모방, 자연과 인공 등의 경계를 흩뜨린다는 점에서 마치 기술과 물질의 접합으로 제작된 딜도와 같다. 딜도가 이성애에 대한 원본 없는 패러디로서 제시된다는 점에 있어 그는 버틀러를 일부 따르고 있으나, 젠더가 단지 문화적 수행으로 해석될 수 없으며 물질성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 있어 버틀러와 분화한다.


젠더, 섹스는 사회(의학, 호르몬투여, 약물 등)에 의해 제작된 구성물들이며, 자연과 인공이 혼합된 기술의 집약체이다. 이때 기술은 이성애규범적(heteronormative)인 성격을 가지기에 이성애적, 시스젠더적## 몸들을 제작하고자 노력한다. “성정치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정치적 행위(action)에서 지배적인 형태이다.” 1부에서 언급하였듯, 제약포르노자본주의는 인간의 신체를 분자 단위에서 신체와 욕망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를 막는다. 다만 프레시아도는 이러한 기술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가지는 원래의 목적을 변경하고 몸을 재창조할 것을 요청한다.


2) 억압과 규범을 넘어 : 분산하고 생산하는 딜도

급진적 레즈비어니즘의 관점에서, 딜도는 가부장적-남근적 섹슈얼리티의 복사본이라는 이유로 배척된다. 딜도-페니스-팔루스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관점에서, 딜도의 사용은 남근의 부재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 된다. 이에 반해 프레시아도는 팔루스의 패러디적 인용으로서 딜도를 제시하며, 딜도는 페니스의 모방이 아니라 원본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오이디푸스 구도 속에서 인간은 부성법의 욕망에 대한 억압을 통해서만 상징계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가족’은 욕망의 흐름이 탈코드화, 탈영토화의 극한으로 치닫지 않게 하며 리비도를 특정한 방식으로 코드화한다. 오이디푸스적 가족이라는 표상은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을 매개로 하여 욕망을 억압하는 법을 설립한다.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로서의 자식은 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통제하고 다시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도록’ 법질서와 국가를 창설한다. 이처럼 도덕적 자아와 법의 형성은 선의보다는 무리 전체의 집단적 자책을 그 기원으로 삼으며, “초월적 일자의 존재가 욕망의 흐름들을 단일하게 통합하는 이와 같은 방식을 들뢰즈-가타리는 ‘초코드화’(surcodage)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넘어선, 즉 팔루스의 부재와 거세불안에서 분리된 딜도는 아버지-법에 매개되지 않은 방식의 ‘탈코드화 된 욕망’으로 나아간다. 기존의 성감대에서 벗어난 딜도는 새로운 성적 쾌감을 생산하는 기관이 되며, 그럼으로써 상징계의 차원에서 기입된 의미화에 저항하여 대안적인 물질관계(성적 기관들의 접속)를 창출한다.


또한 딜도는 페니스와 다르게 유기체적 신체 외부에 존재한다. 그것은 신체 부위들과 맞물려 쾌락을 생산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사용되나 ‘생물학적’ 신체가 아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쾌락 생산의 장소가 아니라 어디에든 접합할 수 있는 것이 딜도이다. 딜도는 몸의 경계 내부로의 참여와 이탈을 반복하며 경계 자체를 분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이러한 행위 속에서 딜도는 신체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재의미화된다. 역으로, 신체 부위들도 딜도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변이할 수 있다. 딜도가 페니스를 닮은 것이 아니라, 딜도와 페니스가 같은 항으로 엮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딜도, 그리고 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젠더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도, 이성애 중심주의와도 결별한다


딜도는 미리 그려진 욕망의 지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향한다. 그것은 사정을 할 수 없기에 애초에 이성애적 재생산과 무관하며, 이성애적 성교와 쾌락의 장소만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프레시아도는 그 대표적 장소를 항문으로 꼽는다. 인류의 재생산을 목표로 하는 이성애적 성교는 남근과 질을 성적 기관으로 의미화 하며, 기술을 통해 해당 신체 기관들을 이성애적으로 제작한다. 이때 항문은 성적 기관이 아닌 것으로 배척되며, 항문성교는 ‘변태적’이고 위험한 섹스로 규정된다. 항문은 이성애적 욕망의 코드에서 벗어나는 기관인 것이다. 그러나 딜도는 항문과 같이 ‘틀린(erroneous)’ 기관과도 접합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항문을 보편적 성적 기관으로 두며, 딜도와 항문의 접합을 다시 성화sexualize시킨다. “원초적인 수동성의 중심이자 추함의 완벽한 장소로서 쓰레기와 똥에 가깝게 위치하는 이 부위는 젠더, 섹스, 정체성, 그리고 자본이 질주하는 보편적 블랙홀의 역할을 한다.” 필자의 의견으로, 이는 ‘억압받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중심으로 또다른 형태의 정체성 정치를 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방식의 민주주의를 모색하도록 자극한다. “항문은 모든 몸에 장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급진적으로 민주주의적”이며 “이 신체-부분은 재의미화된다 : 틀린 부위들은 중심으로 배치되고, 몸과 연관되지 않은 부위들은 몸으로 변형된다.” 새로운 모습의 민주주의는 주체와 그의 권리를 중심적 목표로 삼지 않으며, 인정이라는 끝없는 갈망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주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주류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식이기에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민주주의일 수도 있다.


3) 젠더와 인간을 넘어 : 사이보그, 기계로서의 딜도

라캉에 있어서 성차는 팔루스를 향유하는 방식에 따라 일어난다. 여성은 팔루스를 가지지 못했기에 팔루스’인’ 척 하고, 남성은 팔루스가 없기에 팔루스를 가지고 싶어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남성은 여성을 욕망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욕망되기를 욕망한다. 이에 대해 여성을 오로지 대상으로 본다는 비판이 있지만, 사실 라캉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팔루스라는 욕망의 대상을 원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럼에도 욕망 대상에 대한 소유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욕망 대상과의 합일, 즉 ‘동일시’로 설명되는 욕망은 대상과의 완전한 합체를 통한 소유의 관계에 다름 아니다. 동일시를 통해 대상은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자신은 말 그대로 자신이기에 대상에 대한 주체의 완벽한 소유가 확보된다. 그러나 소유와 동일시는 ‘본능적’인 욕망의 형태인가? 우리는 소유라는 욕망의 모습이 근원적이며 고정불변한 욕망의 양태인지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동일시로서의 소유가 지배와 폭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혹은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특수한 욕망의 양태는 아닐까?


이와는 다르게 딜도는 남성도, 여성도 완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모호한 기관이다. 딜도는 언제나 몸에서 떨어져 있기에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정체성 범주에 의문을 제기한다. 지배적 규범에 의해 성적 기관으로서 의미화되는 몸의 기관들과 달리, 딜도는 열린 가능성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물(rogue object)이다. 가령 레즈비언이 딜도를 사용할 때, 그는 기술로 제작한 페니스/팔루스를 가진 자가 된다. 동시에 그는 딜도를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을 수 있기에 페니스/팔루스를 가지지 않은 자이기도 하다. 딜도는 이처럼 이분법적 젠더 구도에 불화를 일으키기에 팔루스에 대한 배타적 소유 혹은 완전한 무소유를 통해 성차가 일어난다는 라캉의 관점에 저항한다. 오히려, 딜도는 그 사용자를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로 만들며 남근에 대한 선망과 무관하게 한다. 딜도에게는 젠더가 없으며 딜도의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딜도에게는 모든 젠더가 있으며 딜도의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림 1>

또한, 딜도는 사용자의 몸의 어디에도 부착할 수 있는 기관이다. 딜도는 자연적으로 제시된 ‘원래의 위치’를 가지지 않기에 신체 기관 중 어디와 접합하든 쾌락의 창출이라는 목표만 채운다면 상관이 없다. 때문에 딜도는 ‘생물학적’ 기관과의 연결 속에서 본래적 위상을 차지했던 성감대를 변용하고 확장한다. 딜도는 ‘부재’하는 페니스 위가 아니라 손에, 클리토리스에, 질에, 항문에 접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상력은 무한하게 전개된다. <그림 1>은 허벅지에 찰 수 있는 딜도이다. 이러한 딜도의 ‘비자연적’ 재배치는 생물학적 섹스, 고정된 젠더, 그리고 유기체적 인간이라는 환상까지도 넘어서 있다.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오이디푸스적 구도에 대항하여 제시한 ‘부분대상들의 기계적 결합’이라는 욕망에 대한 설명과 공명한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은 욕망에 ‘인간’이라는 총체적 상을 덧씌웠다. 항문, 페니스, 가슴 등의 부분대상들을 가족 내의 인물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부분대상들로부터 ‘인물’을 미루어 짐작한 결과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인물의, 인물에 대한 욕망으로 보지 않을 것을 주장한다. “젖가슴이라는 부분대상은 입이라는 부분대상이 젖의 흐름을 절단하면서 채취된 것이지 ‘엄마’라는 인물 전체로부터 분리된 기관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입은 젖가슴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대상들과도 자유롭게 속할 수 있는 ‘분리될 수 있는’ 부분대상이지 ‘나’라는 인격 총체의 일부가 아니다.” 욕망은 부분대상들 간의 접속적 종합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유기체적이며 총체적인 ‘인물’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딜도는 이분적 젠더관계를 통해 구성된 인간이라는 총체적 상을 향하지 않고, 기관들의 기계적 접합을 통해 무수한 변이체들을 생산한다.


가늠 불가능한 경우의 수로 접합되는 기관들의 운동 속에서 우리는 포스트 휴먼, 포스트 젠더의 밑그림을 확인한다. 젠더가 없는 딜도는 단지 여남의 경계, 성적 정체성들 간의 경계를 흐릴 뿐 아니라 자연과 인공, 그리고 인간과 기술의 경계 또한 모호하게 한다. “가령 피임약을 보라 – 그것은 유기체의 경계를 넘어서고, 따라서 그러한 구분을 취약하고 침투 가능하게 만든다.” 자연의 영역으로 오인되는 임신, 출산이 기술에 의해 구성되어 있듯, 딜도과 성기를 비롯한 우리의 성적 기관들은 모두 인공과 자연의 뒤섞인 경계 위에 놓여 있다. 둘째로, 규범적 질서를 벗어나서 욕망의 흐름들을 생산하는 접합체들은 억압과 죄의식의 오이디푸스적 체계를 뒤흔드는 방식으로 생산한다. “이 분열자인 욕망하는 기계가 발판으로 하고 있는 기관없는 충만한 몸은 역설적으로 반(反)생산이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이 반생산으로서 생산한다는 것은 오이디푸스적 가족 모델, 즉 부 모가 있는 생산의 모든 삼각형화를 거부하기 위해서만, 반생산으로 개입 한다는 뜻이다.” 생산은 총체적인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분열적인 ‘욕망하는 기계’에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이는 초월적 지평이나 유토피아적 공간이 아니라 더럽게도 ‘변태적’인 바로 현재의 공간에서 벌어진다. 오이디푸스적 주체, 딜도, 인간 신체 등은 모두 기존의 권력과 기술에 의해 제작되어 있다. 딜도는 팔루스일 때 우리 자신에게 겨눠진 칼날이지만 전복적 행위와 의미화를 위해 사용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시스젠더-이성애자, 노동자, 오이디푸스적 죄의식을 가진 아이를 양산하고자 하는 목표로 양육되었지만 본래의 목표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다. “서자라는 존재조건으로 인해 사이보그는 자신의 기원에 대해 대단히 불충스러울 수 있다. 그들의 아버지는 결국 비본질적인 존재들이 아닌가.” 필자는 이 지점이 일련의 들뢰즈, 해러웨이, 그리고 프레시아도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순수하며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지만, 패배주의에 빠질 필요도 없다. 약간의 유머와 무례함,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욕망의 행위들이 ‘혁명’이라는 거대한 운동의 전부이다. 들뢰즈의 말처럼, “욕망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함으로써 혁명적이다.”


3 완전변태 선언 : 양날의 딜도를 차고 섹슈얼리티를 횡단하라

물론 그럼에도 남는 의구심들은 있다. 지배적 욕망을 따르지 않는 생산적 욕망의 실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욕망의 투여는 항상 집합적이다. 욕망의 에너지가 ‘기관 없는 신체’에 투여될 때 거기에는 항상 다수의 부분대상들 사이의 접속이 일어난다. ‘내’가 어떤 ‘대상’에 리비도를 투여하는 게 아니다. 부분대상이 부분대상과 접속하면서 두 부분이 공통으로 놓이는 ‘기관 없는 신체’에 에너지를 투여하면 그 위에 어떤 장(champ)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때 다수의 부분대상은 기존의 근대철학적 질서, 그리고 정신분석학에서의 주체/타자 구조로 대립되지 않으며 그러한 구분은 “욕망의 현실 너머에 있는 초월적 가상”으로 비판된다. ‘주체’와 ‘타자’라고 기존에 불리었던 부분대상들은 다른 부분대상과 접속하여 공통의 신체, 다양한 집단을 가질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굳이 ‘타자’를 찾는다면, 우리는 욕망 속에서 언제나 이미 타자화 된다. 욕망을 통해 우리는 다른 존재와 결합하여 다른 존재로 변한다. 여기서 굳이 ‘주체’를 찾는다면, 우리는 욕망 속에서 언제나 이미 주체화된다.”


주체와 타자가 일치된 욕망-기계의 일원적 구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우리는 타자가 절대적으로 요청하는 윤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존재론적 지평에서, 내가 부정할 수 없는 윤리적 책임을 호소하는 타자를 못 본 척 할 수는 없다. 학살 당하는 비인간동물들, 시설에 감금당한 장애인들, 서구의 이론에서 포착되지 않는 동시에 ‘선진국’이 저지른 환경에 대한 죄를 대신 갚고 있는 ‘제3세계’인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동물은 커녕 비건도 아니며, 장애인이 아니며, 이번 겨울 동남아로의 ‘즐거운’ 여행을 계획하는················내가 ‘원죄’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내가 접속하고 살아가는 타인들의 고통의 원인이 직간접적으로 나에게 있고, 죄를 대신 갚는 타자가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말이다. 들뢰즈는 “상징계를 거짓 범주로 간주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인간 범주’인 상징계를 초월하고, 결국은 인간을 신적 주체로 승격시킨다.” 그러나 “과연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상징계를 초월하고 지배하는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들뢰즈의 ‘상징계’ 해석에 대한 홍준기 씨의 비판에 대해 필자가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들뢰즈 철학은 과거에 ‘신, ‘이성’이 차지했던 초월자의 자리를 없앤 것이 아니라 현세적 존재 모두로 대체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낸다는 점은 일견 타당하게 들린다. 남겨진 초월자의 자리는 그 자리를 독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며, 누구 하나가 독차지하지 않은 왕좌는 끝없는 권력을 향한 투쟁을 요청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잔여의 고민들을 필자의 성적 경험을 토대로 소박하게 적어 내려가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진지한 농담 정도로 읽어 주시길 바란다. 필자는 여성과 섹스하는-여성이자, BDSM을 좋아하는 ‘변태’다. 딜도가 어느 방향으로도 겨눌 수 있는 양날의 검이라면, 우리는 양방향 딜도를 사이에 두고 교접하는 몸들을 상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가 없다면,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무런 본질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 딜도 뿐이라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즉, 그곳에는 ‘무’가 있다. 초월자의 자리에 아무것도 앉지 않아야 한다면 그곳에는 ‘무’만이 설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가장 낮은 곳에서 우스꽝스러운 광대로 군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규범적 성교에서 벗어난 BDSM의 공간에서, ‘무’는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첫째, BDSM은 정상적 섹스로 여겨지지 않기에 법 밖의 공간, 무법의 지대이다. 따라서 BDSM 플레이의 장소는 입법이 가능한 공간이 된다. BDSM의 입법은 법의 ‘구성적 외부’, 법의 틈에서 전체화 되지 않는 판례를 만드는 일이다. 플레이의 공간은 여성이 하네스를 차고 남성을 ‘박는’ 것이 가능하며, 뺨을 맞는 것이 욕망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법은 ‘코드’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시에 법과 초자아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것(징벌)을 쾌락원칙으로 삼는다. 둘째, 우리는 기존의 언어 질서가 무화 되는 장면을 발견한다. 플레이의 중지를 요청할 때 사용하는 세이프워드는 언어체계의 의미 관행들을 의도적으로 전복한다. 세이프워드는 ‘분위기를 완전히 깨는 말’로 정한다는 것이 BDSMer들 사이에서의 암묵적 룰이다. 이때 해당 단어의 기표는 기존 언어에서 빌려 온 것이지만, 폭력을 철회하라는/철회하겠다는 신호로 사용될 때 기존의 기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 오히려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참여자들 간에 ‘의미’를 가지는 단어인 것이다. 또한 세이프워드는 전체화 하는 언어, 법 체계를 구성할 수 없다. 세이프워드는 n명의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정해진다. 세이프워드를 사용해야 하는 조건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 맞게 사용된다. 어제는 괜찮았던 것이 오늘은 다르게 느껴질 수 있기에 해당 단어의 사용 이유, 시점 등은 매번 다르다.


지식은 권력효과를 가지고, 권력은 진리효과를 가진다(미셸 푸코). 권력과 지식은 뗄 수 없는 관계로 주체를 구성한다. 이와는 반대로, BDSM의 공간에서 법 밖에 거주하는 타자와의 접합은 참여자들이 공동으로 향유하는 무지의 장을 만든다. 어떠한 행위가 성적 쾌감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일관성이 깨져 버린 플레이의 공간에서, 타자가 함유하는 무지는 ‘폭력’의 장으로 흘러 나와 상대에게 법 밖의 판례를 세울 것을 요구한다. 페티시즘과 변태적 성행위 가운데 미지의 쾌락원칙을 가진 마조히스트는 사디스트와 함께 새로운 쾌락의 윤리를 생산한다. 최근 우리는 타자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범주적 ‘지식’으로 구성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명명, 인정, 법으로의 편입이 최대의 윤리적 목표가 되는 장면이 만연하다. 어쩌면 ‘무지’ 그 자체가 무언가를 요청 가능하게 하는 권력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상대를 잘 알기에 그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지 못하기에 쾌락의 생산원칙을 발명해야 하는 실천적 상황이 바로 윤리가 아닐까?


오로지 이러한 정황 속에서 권력은 놀이가 될 수 있다. BDSM은 고정적인 주체-대상, 폭력-순응의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BDSM은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의 중요성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관계이나 역설적으로 권력의 철회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 BDSM을 권력 그 자체가 아닌 권력에 대한 조롱이자 패러디, 권력-놀이로 만드는 것은 플레이가 중단되는, 권력이 철회되는 순간이다. 폭력을 행하는 자는 영구적으로 주체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며 참여자들은 동등하게 쾌락의 참여자들이 된다. “권력은 재배치될 뿐 철회될 수 없다”(버틀러). 대상-되기, 대상화-하기의 폭력 또한 제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을 장난감으로 만드는 일이고, 장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참여자들 간의 관계이다. 장의 전개와 철회 가운데 인류의 역사에서 항구적으로 존재했던 폭력은 놀이가 되며, 권력은 비로소 쾌락에 굴복한다.





욕망 우리는 우리가 동의하고 욕망했던 가부장적, 이성애적 섹스에 대한 동의를 철회한다. 내가 동의했던 섹스와, 내가 동의하지 않은 섹스의 모호한 경계 위에서 나는 변태임을 선언한다.


지식 우리는 우리의 섹스, 젠더에 대한 지식을 철회한다. 우리는 이제 병원에서 태어난 여아나 남아가 아니라 무지로 무장한 인공적 갓난아기이자, 아무것도 기입되지 않은 변태임을 선언한다.


소유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당신의 페니스와 질, 팔루스와 클리토리스에 대한 소유를 철회한다. 우리는 몸이 재생산하는 잉여들의 교환, 증여, 양도를 포기한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구독subscribe하며 변태한다.


연합체 아버지 없는 이자적 관계 속에서, 존재의 최소 단위는 하나(주체)가 아니라 둘(연합체)이다. 우리는 아들과 어머니의 근친상간을 막는 아버지의 팔루스가 아니라, 어머니와 딸의, 아버지와 아들의 근친상간을 가능케 하는 양날의 딜도를 택한다. 찌르고, 찔리며 우리는 변태한다.


완전변태 그렇기에 우리의 길은 0-1-2-3, 무-정-반-합으로 나아가는 변증법, 알-애벌레-번데기-성체의 완전변태complete metamorphosis가 아니라, 0-2-0-2···, 무-우리-무-우리의 도돌이표, 아브락사스66를 모르기에 깨지지 않는 알, 완전변태complete perversion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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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그림1> Girlfriends, Nov./Dec. 1994, Reprinted with kind permission of Socket Science Labs<그림2> (선언문 상단의 검은색 양방향 딜도) https://lacoquette.com/glass-double-ended-dil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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