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죽지 않고 좀 괜찮게 살아보고 싶은 성인 ADHD의 자기기록
“죽고 싶다”. 최근 1년 동안 이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다. 대부분은 휙 스치고 지나가는 가벼운 사념이었고, 어떨 때는 좀 더 무거웠다.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길 작정은 없다. 그러나 나는 버겁기만 한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다. 아무래도 스스로가 쓸모없다는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그랬다. 나는 쓸모없다. 스스로가 쓸모없다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심지어 누가 보아도 ‘좋은’ 결과물을 곧잘 냈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쓸모없었다. 나는 전혀 효율적인 인간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도 노력해서 해낼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보통의 누군가가 노력한 결과물에는 언제나 뒤처졌다.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 하나가 쉽지 않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부터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바람은 ‘보통은 하자’가 되었다. 나에게는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노력의 대상이었다. 그 무엇도 실행할 수 없는 나를 그나마 움직이는 것은 그것이었다. 너무 게으르고, 너무 멍청하고, 너무 못하지 않는, 평범하게 잘 하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저 어찌 되었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던, 그러나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먹고사는데 필요한 그 무엇도 남지 않은 대학 생활 3년마저 지나고 나니 요즘 스스로의 쓸모없음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쓸모없다. 이것은 효율성으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객관적인 사실이다. 내가 가진 특성은 이 체제에서 살아남기에 전혀 유리하지 않다. 나 자신에 대한 비관은 내가 가진 특성, 조건, 현실들이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내가 ‘비정상’으로 분류된다는 것은 내가 ‘정상’의 범주에 속한 과업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것이 온전히 내 잘못이지 않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내 특성이 질환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꽤 큰 위안을 얻었다. 나에게 ‘성인 ADHD’로 진단받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성인 ADHD에 대해 알지 못했을 때는 스스로가 정말 미웠다. 나는 누가 봐도 게을렀고 너무 게을러서 시작조차하지 못하고 포기한 과제가 제출이라도 한 것보다 배로 많았다. 햇수가 넘어가도록 치우지 못한 방은 언제나 먼지투성이에 물건만 넘쳐났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 대화에 집중하고 내 의견을 묻는 질문에 적절한 반응과 답을 주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멍청한 자신을 자책한 적이 많았다. 나는 맡은 일을 제때 끝마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남들은 잘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도저히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서 포기하기도 했다. 늘 조금은 멍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어디로 흘러가든 시간이 얼마나 가든 나는 공상에 빠져있거나 자극을 찾아서 게임을 하거나 목적 없이 시간을 때우고는 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나태함이라지만 나는 유독 심각했다. 이 증상이 나의 나태함으로 생각되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지 다잡기’, ‘노오력하기’였다. 자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혼자 머리만 싸매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혼자 씨름해왔으니 나는 꽤 오래전부터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상태였다. 고등학교 3년과 대학생활을 지나면서 내가 수행해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나자 어느 순간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정신병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가 가졌던 오해들을 마주하며 나는 상담을 받아볼까 막연히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내 우울은 속된 말로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도 않았거니와 실패하는 경험에 익숙한 나에게 시간을 내서 방법을 찾고 혼자 힘으로 실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오죽하면 환자가 스스로 정신과에 발을 들였을 때 치료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대학 내내 증상을 키워가던 나는 먼저 ADHD 진단을 받은 친한 친구로부터 처음으로 성인 ADHD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제야 정말로 치료를 시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흔히 ADHD를 떠올리면 방방 뛰며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어린 남자아이를 상상하고는 한다. ADHD에 대한 통념이 이러한 제한적인 이미지로 굳어지면서 ADHD는 치료와 지원이 필요한 질환이라기보다 개그적 비하 표현으로서 쉽게 발화된다. ‘정신병자’, ‘장애인’, ‘병신’ 등의 단어가 실제 그 범주에 속하는 이들에 대한 이해 없이 비하 표현으로 쓰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 단어들은 ‘정상성’으로부터 극단적으로 멀어진 단편적 이미지로 굳어져 발화 자체만으로 멸칭으로 이해되고는 한다. ADHD가 특정한 이미지로 발화되고 재생산되면서 그 편견에서 벗어나는 질환자는 상상되지 않으며, 어린 남자아이만큼 미성숙한 존재로 치부된다. 실제 ADHD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는 굉장히 폭력적이다. 여성이거나, 성인이거나, 특정한 증상(부주의함, 과잉행동 등)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의 경험은 쉽게 지워진다. ADHD로 일상에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남성 청소년이 아니며, ADHD는 성인이고 여성일수록 정형화된 편견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성인 ADHD는 대부분의 경우 유년기부터 가지고 있던 ADHD를 치료받지 못한 채 자라난 것이 원인인 만큼 개인이 가진 사회적 상황, 요구들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증상으로 나타난다.
나는 산만하기보다는 차분하고, 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성인 여성이지만 ADHD로 진단받았다. 나는 ADHD의 대표적 증상인 과잉행동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이 집중해야 할 상황에 제대로 집중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나의 경우, 어릴 적에는 흔히 이야기되는 ADHD의 증상인 산만함과 부주의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나는 어느 곳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였지만 학업성적은 좋은 여자아이였으며, 그렇기에 곧잘 똑똑한 아이의 왕성한 호기심으로 이해되었다. 오히려 나의 산만함이 크게 충돌한 지점은 여자아이에게 요구되는 성역할이었다. ‘선머슴’같이 행동하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여자아이는 어른들에게 골칫거리였다.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나의 증상은 여러 곤란한 상황과 실패를 불렀고 나는 자연스럽게 내 행동이 또 관계를 망치거나 어른들을 화나게 하지는 않을지 눈치를 보며 성장했다. ‘기를 죽이려는’ 부친의 여러 시도들과 친구들과의 불화를 거치면서 나는 산만함을 밖으로 방출하기보다 내재화하기 시작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대신 혼자만의 망상을 즐기거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대화에 집중하고 생각을 정리해 내 의견을 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나는 종종 얌전하게 듣고 고개만 끄덕인다.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가 상대를 당황시키거나 화나게 했던 경험 때문인지 내 생각을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갑자기 떠오르는 잡생각은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속으로 되뇌고는 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산만하기는커녕 얌전하고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성인 여성일수록 ADHD를 발견하기 힘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여성에게 더 엄격하게 작용하는 성역할은 많은 여성 ADHD 환자의 증상이 정형성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도록 만든다. 또한 잦은 실패 경험 때문에 다른 정신질환까지 복합적으로 경험하기 쉬운 특성상, 대부분의 여성 ADHD 환자들은 성인이 되어서야 다른 정신질환으로 정신과를 찾았다가 ADHD를 발견한다.
ADHD는 대부분의 증상이 ADHD가 아닌 사람들도 종종 하는 실수이기 때문에 개인의 나태함으로 치부되기 쉽고 질환으로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ADHD를 질환으로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하다. ADHD가 질환이 되는 것은 ‘정상’을 유지하는데 요구되는 것들에 ADHD의 특성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ADHD는 고대 원시사회에서는 사냥꾼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뇌적인 특성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전두엽의 발달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늦어서 나타나는 특성이 문제시되는 것은 다른 사회적 조건 아래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근로에 적합하지 않은 특성은 ‘게으름’, ‘멍청함’, ‘낙오자’ 등의 이름을 붙여 배척하고 쓸모 있는 가치를 능률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곧 독립한 인격체로의 조건이 되는 사회에서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증상은 질환이며 장애가 된다.
‘정신병’은 사회적이다. 또 그렇기에 나는 어디까지가 내가 ADHD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고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다. 애초에 내 증상이 정신질환인가? 물론 내가 가진 ADHD에서 비롯된 다른 합병증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정신질환자이다. 하지만 심각한 수준의 의지박약과 일을 끝마치지 못하는 습성이 정말로 내 개인적인 문제로 인한 결점이 아니라는 것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 어렵다. 어떤 사람의 정신건강, 특히 능률적이지 못함이 게으른 개인의 잘못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이것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특히 정신병자를 떠올렸을 때 상상되는 이미지만큼 ‘미쳐있지’ 않으며, ‘정상적’으로 여러 기능들을 수행해왔고, 그것이 전제로서 여겨지는 ‘정상적인’ 기반-소위 ‘명문’으로 불리는 대학에 재학 중인 20대 초반의 여성- 위에 위치해있다. 정신질환은 보통 ‘정상’으로부터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있다고 여겨지는 만큼, 이 위치만으로도 나는 ‘미친 사람’으로 인식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처음 진단을 받기 위해 찾아갔던 병원에서도 대입 전의 내 학업성취를 듣고는 내 병력에 의문을 표했다. 어린 시절부터 ADHD 증상이 나타났던 게 맞나요? 의사는 조리 있게 정리해서 설명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상담치료는 경험해본 적이 없고, 현재 약 처방이 주목적인 병원 한 군데에서만 치료를 받고 있다. 초진 비용이 너무 비싸서 ADHD 진단에 필요한 집중력 검사만을 실시했으며 검사 결과가 나온 주에 바로 약을 처방받았다. 매일 아침 ‘집중력 약’(ADHD 환자의 호르몬을 조절해 집중력을 높이는 약이다.)을 먹고 저녁에는 항우울제를 복용한다. 일주일에 한 번 약을 받으러 병원에 가고 약에 안정적으로 적응하면 방문 기간을 늘린다. 병원에 가는 것은 꼭 감기약 처방을 받으러 가는 듯한 느낌이다. 약으로 인한 부작용, 느껴지는 효과, 일주일간의 감정 상태는 어땠는지에 대한 짧은 보고가 끝나면 의사의 주관대로 약이 처방된다. 식욕부진이 심하면 소화제를 바꾸거나 항우울제 복용 시간을 바꾸거나, 소화제 용량을 늘리거나. 집중력 약의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으니 용량을 조금 늘리는 식으로. 일반 병원과 별다를 것 없는 모습에 이상한 위화감도 들고 내가 괜한 약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고는 한다. 의사에게 보이는 증상으로 나타나는 몸의 질병과는 달리, 정신질환은 내 스스로의 설명에 가장 큰 무게감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믿는 것부터가 힘든 나에게 치료 과정은 끝없는 의심과 불안이다. 내가 처방받는 약이 나에게 맞지를 않는 것인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약효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있어서 더 그렇다. 일상이 나아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생각보다 크게 불안한 일이었다. 치료를 시작하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큰 위안이었는데 그 확신이 사라진 것이다. 치료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숨기려고 나는 종종 의사에게 내가 해낸 것들을 위주로 이야기하거나 지키지 못했던 계획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진단 검사 결과도 그렇고, ADHD가 아닌 사람이 집중력 약을 복용했을 때 나타난다는 부작용(흔히는 강박 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는 오진단을 받은 경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약을 먹어도 차도가 눈에 보이게 나아지지를 않자, 내가 못나서 하지 못하는 것을 ‘정신병’이라는 이름을 빌려 도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병원을 다니고 있는 것일까? 역시 문제는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온전히 구분할 수 없는 개인의 의지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쓸모없는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우울한 결론은 어찌 되었건 나는 ‘낙오’되었고, 어떻게든 ‘정상 범주’로 편입되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책임이 어디에 있든 친절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내는 것만큼은 온전히 나, 개인의 몫이라는 결론이었다. 사회는 나와 같은 낙오자들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책임지지 않는다. 치료를 시작했다고 한순간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설령 치료를 통해 ‘좋은’ 결과를 보더라도 나는 그 수고만큼 낙오된 상태일 것이다.
조금 더 일찍 치료를 시작했으면 해낼 수 있는 일도 더 많았을 테고, 지금의 나도 조금은 더 괜찮았을 텐데. 거의 졸업을 포기한 대학 생활도 어느 정도 되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억울해서 가끔은 울고 싶기도 하다. 치료는 과정이고 이제야 두 달 차인 내 앞에는 여전히 막막한 과정이 남아있다. 오늘도 움직이는 것을 미루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버린 나를 자책했다. 작은 것 하나도 해낼 수 없는 내가 여전히 밉다.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나는 괜찮아질 수 있을까? 고쳐야 하는 것이, 괜찮아져야 하는 것이 나라는 게 참을 수 없이 부당하지만, 나에게 괜찮아지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다. 나는 살기 위해 꼭 괜찮아져야만 하고, 아마 시간이 가면 점점 괜찮아질 것이다. 다시 우울한 생각이 내 속을 채우기 전에 글을 마치고 항우울제를 챙겨 먹으러 가야겠다. 며칠 정도는 이 글을 끝까지 써낸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