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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이는 루작가 Oct 30. 2024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

세상을 입체적으로

"의사! 의사!!"


어느날 아침이었다. 평소에도 병원놀이를 즐겨 하는 아이들은 서로 '의사, 간호사'의 역할을 하며 놀고 있었다. 안방에는 입원실, 주사실 등 그들 나름의 치료실로 분리되어 있었다. 환자인 나와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오라고 했으나 아침만 마저 다 먹고 들어가겠다고 하던 중 처음 접하는 소리를 들었다.


간호사가 의사를 부르는 소리였다. 언제나 의사는 본인 몫이었는데 동생에게 그 역할을 넘기고 간호사 연기를 하던 첫째의 외침이었다. 현실에서는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에 새롭기도하고 웃기기도 하고 괜히 통쾌하기도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김간호사! 빨리 붕대 좀 가져와!" 혹은 "얼른 가서 수간호사를 불러와!" 등의 대사로 간호사를 '간호사'로 부르는 호칭은 익숙했으나, 의사를 '의사'로 부르는 호칭은 낯설었다. 요즘의 병원 사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무의식에 박힌 수직적인 조직문화를 단번에 깨뜨려주는 아침이었다.


남편과 웃으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출근준비를 하는 아빠에게 첫째가 어디가냐고 물었다. 일하러 간다는 대답에 역할놀이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아이는 엉뚱한 질문을 이어갔다.


"아빠도 사람들을 고칠 수 있어??"

"아니, 아빠는 의사선생님이 아니야~~~"


그러나 옆에서 부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말했다.


"이든아, 아빠는 사람들의 몸은 치료하지 못해도 웃음으로 마음은 치료해줄 수 있어~ 아빠는 웃음치료사거든!"


몸의 병만 고치는 게 의사인가,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도 의사라는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다. 오래전에 따놓은 웃음치료사 자격증 얘기가 민망했는지 남편은 크게 웃으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침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A이면 B이다'하는 일반적인 진술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는 게 흥미로웠다.


'성당에서 미사 드릴 때에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명제는 어떨까, 당연히 참이다. 그러나 '유아실'이라는 환경이 들어가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첫째는 100일이 지난 후 코로나가 풀리면서부터, 둘째는 50일이 지난 후부터 성당에 데리고 다녔다. 차에서 아이들 낮잠을 재우느라 이 곳 저 곳을 방랑하며 다녔지만 주일미사는 안 빠지려 노력했다. 유아실에서 온전히 미사에 집중할 수는 없어도 하느님을 첫자리에 두겠다는 다짐, 하느님께 발걸음을 옮기겠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환영해주실 거라 믿었다.

결혼 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유아실이 출산 후부터는 우리의 사랑방이 되었다. 조용한 아이, 시끄러운 아이가 모두 몰려든다. 아무리 부모가 조용히 해야한다고 일러줘도 그저 소리치고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 모인 곳. 그걸 알면서도 부모들은 아이들이 한번이라도 십자가를 더 바라보고 성모님께 초를 봉헌하는 게 익숙해지고, 신부님과 수녀님을 부르는 게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지난 주일, 같은 유아실에 있었던 아이의 아빠가 우리보고 아이들을 좀 조용히 시키라는 얘기를 했다. 상대의 아이는 차분히 앉아 그림만 그리고 있던 5살 여자 아이었고, 우리집 아이들은 거기다 하필이면 잘 모르는 6세 아이까지 붙어 3세, 5세, 6세 남자 삼총사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처음이었고, 5년 유아실 생활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속으로는 '유아실이 왜 만들어졌나요, 그럴 거면 당신들이 나가서 조용한 곳에서 미사를 드리세요'라고 몇 번을 외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죄송한 척 아이들을 엄하게 단속했다.


그들의 생각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유아실이지만 미사시간이고 조용히 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아직 세살, 다섯살인 아이들에게 "성당에 가는 순간 너희들은 한시간 동안 움직이면 안되고 소리를 크게 내서도 안되고 가만히 앉아 그림만 그리거나 종이접기를 하거라" 라고 한다면, 이 아이들에게 성당은 어떤 공간이 될까. 가고 싶은 곳이 될까.

누가 맞고 틀린 건 없다.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이 점점 더 개구쟁이가 되어갈 수록 어디까지 허용해주는 부모가 되어야할지 고민해볼 문제다. 우리도 예의없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이 자랐고, 자식 교육을 저렇게 시키냐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규칙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곳에서는 융통성의 지혜가 발휘되었으면 좋겠다. 나부터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너른 품을 가진 엄마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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