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말의 화창한 날, 원더랜드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올림픽공원 88 잔디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콘서트라기에는 페스티벌, 즉 축제와도 같은 행사였기에 많은 이들이 자리를 잡고 음식을 즐기며 동행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콘서트와 비교하여 이동도 자유로웠으며, 공연 관람 외에도 포토존이나 이벤트존 등에서 자유롭게 페스티벌을 즐길 수 있었다.
야외에서 열린 행사였기에 많은 관객이 등받이부터 담요까지 철저하게 준비물을 챙겨온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페스티벌은 장장 500분 동안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행사였던지라, 나는 온종일 잔디마당 위에 돗자리를 깔아두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자리가 불편했던 것은 둘째치고, 후텁지근한 낮부터 찬 바람이 몰아쳤던 밤까지 급격한 기온의 변화를 견뎌야 했던 것이 제일 힘들었다. 미처 밤 날씨를 예측하지 못해 꼼짝없이 강추위를 견디며 콘서트를 즐겨야 했다.
이틀에 걸쳐 열린 콘서트에서 내가 관람했던 회차는 첫째 날이었다. 라인업으로는 규현, 김문정, 김주택, 라포엠, 렌, 박주원, 선우정아, 신예찬, 최상엽, 이석훈, 정필립, 한태인, 해나가 한데 모였는데, 장르와 개성이 가지각색인 이들이라 콘서트를 관람하는 데 지루함이 없었다.
이번 페스티벌은 뮤지컬을 주제로 열렸기에, 다수의 아티스트들이 뮤지컬 넘버를 부르거나 연주했다. 뮤지컬을 사랑하는 나와 같은 이에게는 말 그대로 종합 선물 세트와 같은 행사였다.
처음 잔디마당에 입장했을 때는 루시(LUCY)의 신예찬, 최상엽 콤비가 유희열의 [공원에서]를 연주하고 있었다.
단순히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악기를 갖고 놀아야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제대로 아는 이들이었다. 진정 싱어송라이터의 명색이 걸맞은 예술가들이랄까. 이번 기회를 처음으로 루시라는 밴드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이 출연했던 <슈퍼밴드>를 다시 보고 싶어질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박주원 기타리스트는 국내에 몇 없는 재즈 기타리스트계의 독보적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그의 연주는 ‘집시 기타’로 분류되는데, 집시 기타 연주를 하는 이들 중에서도 박주원의 실력은 최상위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의 연주를 들어보니, 단 6개의 현만으로 만들어지는 선율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다이내믹한 진폭은 물론이고, 풍부한 성량이 무척 아름다웠다.
김주택, 그리고 정필립과 한태인의 무대는 성악 크로스오버 특유의 웅장함을 잠시 내려놓고,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음악이 많이 나와서 마음껏 호응하면서 들었다.
그들이 ‘미라클라스’로 데뷔할 수 있었던 방송 <팬텀싱어>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했던 김문정 음악감독도 반가웠고, 더 피트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역시 훌륭했다. 특히 [New York New York]이나 [La Vie En Rose]처럼 느릿하고도 감미로운 선율이 돋보이는 노래가 따뜻한 봄날에 제격이었다.
해나와 이석훈은 워낙 유명한 가수라 긴 후기를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으므로 짧게 소개하도록 하겠다. 두 사람 모두 가수를 본업으로 두었지만, 무대에서도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실력을 증명한 배우이기도 하다. 뮤지컬 <모차르트!>에서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역을 맡았던 해나는 [나는 예술가의 아내라]를 선보였으며, 본 공연 못지않은 풍부한 표현을 보여주었다.
이석훈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10가지 이유], [연애의 시작] 등의 노래로 잘 알려졌지만, 뮤지컬 배우로서의 탁월한 역량도 갖춘 아티스트이기에, 그가 노래하는 뮤지컬 넘버를 듣는 시간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젠틀맨스 가이드>, <마리 앙투아네트>, <킹키 부츠> 등, 이 지면에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굵직한 작품들이므로, 이 글을 통해 누군가는 뮤지컬에 새롭게 관심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에 짧게 소개해본다.
선우정아의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했다.
솔직히 그의 노래를 많이 알지 못했다. [뒹굴뒹굴]과 [도망가자] 정도만 들어보았는데, 직접 그가 입을 열어 노래하고 공간에 감정을 채우는 것을 보니 심장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단순히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로 대중의 내면을 후벼 파는 것. 거대한 세션이 없어도, 엄청난 고음을 내지르지 않아도, 선우정아라는 사람의 거대한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고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역할이구나, 싶었다.
해가 지고 난 어두컴컴한 저녁, 행사의 끝에 등장했던 규현과 라포엠의 무대는 차가운 밤공기를 따뜻하게 메웠다. 특히 관객에게 건넸던 규현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티켓이 비싸서 뮤지컬을 보기 어려우시죠? 그래도 자주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말. 있는 돈, 없는 돈을 모아 뮤지컬을 보러 다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참 고마운 얘기였다.
뮤지컬 <그날들>, <모차르트!>, <지킬 앤 하이드>, <웃는 남자> 등. 그간 규현의 필모그래피를 수놓았던 뮤지컬 넘버를 들을 수 있음에 고마웠다. 무엇보다 보통 여성 배우가 부르는 [A New Life]를 부른 젠더 프리 무대가 마음에 들었다. 좋은 넘버에 성별이 어디 있으랴.
마지막으로, 원더랜드 페스티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아티스트는 렌이었다. 본명인 최민기가 아닌, 뉴이스트의 렌이라는 활동명으로 알려진 아이돌임에도 전문 배우 못지않은 훌륭한 감정 연기와 무대 장악력이 무척이나 돋보였다. 무대를 집어삼키는 강렬한 에너지가 관객을 압도했고, 대사 처리도 깔끔했다.
렌은 뮤지컬 <헤드윅>의 넘버를 연달아 불렀는데, 말 그대로 헤드윅이 무대 위에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심으로 그가 연기하는 헤드윅을 꼭 보고 싶어졌다. 나는 <헤드윅>을 조승우 배우가 출연했던 회차로 관람했는데, 렌이 연기하는 헤드윅도 못지않은 매력이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앞으로도 그를 무대에서 계속 만나고 싶다. 그가 또 다른 캐릭터를 입는다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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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랜드 페스티벌을 전반적으로 돌이켜보자면 오락가락한 날씨부터 비싼 음식, 불편한 자리까지, 어느 하나 쾌적하다고 할 수는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펼쳐지는 라이브 콘서트에 집중하다 보면 모든 제약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그 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음악의 힘이란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달까.
게다가 코로나 엔데믹이 다가오면서 방역 제한이 풀리는 시점에 열렸던 콘서트였기에, 오랜만에 느끼는 관객의 함성과 호응이 무척이나 반갑고 기뻤다. 무대 위의 아티스트들 또한 ‘관객의 직접적인 반응’이 이렇게나 강렬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면서, 다시 돌아온 현장 예술의 매력에 감사함을 표했다. 나 또한 오랜만에 잠들어있던 감각을 하나하나 일깨우는 듯한 멋진 공연들을 보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앞으로도 이러한 자리가 더 많이 생기길, 코로나 바이러스가 얼른 자취를 감추길 바란다.
* 원문 링크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9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