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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기 Oct 15. 2022

연극 <옥상 위 카우보이>

아이에서 - 어른으로


나의 아빠가 쟤의 엄마와 바람이 나서 꼬여버린 두 여고생이 있다.

둘은 환풍기도 멈춰버린 옥상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싸우다, 놀다, 결국 함께 운다.



연극 <옥상 위 카우보이>(작 이보람, 연출 권지현)의 줄거리다. 


주인공은 두 명이다. ‘주리’와 ‘윤아’. 주리 아빠는 윤아 엄마와 바람이 났다. 윤아 엄마는 임신했고, 주리 엄마는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찾아 나선다. 줄거리만 대충 보아도 골치가 아프다. 무대에서는 줄곧 두 주인공을 양육하는 어른들의 혼외관계가 불러일으킨 카오스가 펼쳐진다. 그리고 정신없는 가정환경을 벗어나 세상에 내던져진 주리와 윤아는 학교 옥상에서 만나 결투를 벌이기로 한다.  





극 초반부에, 주리와 윤아가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에서 극장에는 <황야의 무법자> 영화 음악이 울려 퍼진다. 공연의 제목이 ‘옥상’, 그리고 ‘카우보이’의 합성어라는 것을 부러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모종의 의미를 전달하는 연출이었다. 이 연극에서는 대체 왜 카우보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두 주인공의 관계를 설명했을까? 


우리가 ‘카우보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떤 모습인가? 말을 타고 다니며, 허리춤에는 권총을 차고 과묵한 얼굴로 드넓은 황야를 누비는 백인 남성을 상상할 수 있겠다. 미디어로부터 알게 모르게 주입된 고정관념 중 하나다. 그러나 연극 무대에는 이러한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보이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주리와 윤아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 청소년이다. 그 나이의 인간이 응당 누려야 할 안정된 양육 환경에서는 벗어난, 학교 밖 청소년(이는 학교 안이 아닌 옥상을 주요 무대로 삼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이기도 하다. 


그들은 가공할 근력을 지닌 성인이라기보다는, 아직 미숙한 아이의 모습이다. 대중적으로 각인된 카우보이의 이미지와는 다르기에, 이러한 모순성을 통해 관객에게 흥미로운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그들은 카우보이 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과 혈투를 벌이기 때문이다. 


카우보이는 낱말 풀이 그대로 ‘소를 지키는, 목동(牧童)’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북미 서부 땅을 개척하며 야생의 소를 몰아 잡고, 방목하여 사육하던 이들이 카우보이였다. 그들은 무법지대에서 개인 소유물인 가축을 지키는 데 열을 올렸고, 이를 위해 주변과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는 소위 ‘정상 가족’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본인이 지켜야 할 영역인 가정의 평화를 깨트린 상대방과 싸움을 벌이는 두 주인공의 모습과 닮아있다. 


주리와 윤아가 안전지대 바깥에서 거침없이 날것의 예민함을 표출하는 모습은 카우보이의 그것과 흡사하기에, 마땅히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들을 옥상으로 쫓아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지 나는 관객으로서 자문하게 되었다.


  



주리와 윤아가 옥상의 텐트에서 나누었던 허심탄회한 대화를 들어보면, 그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던 양육자들, 두 어머니와 한 아버지의 부족한 모습이 무대에 그려진다. 


극에 등장하는 세 명의 어른들은 지극히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우습게도 나이를 병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 문화에서 고통받는 것은 비단 미성년들뿐만이 아닐 테다. 오히려 나이만 먹은 성인들이 헛짓거리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 연극은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의 모습을 풍자적인 묘사로 그려낸다. 


윤아 엄마와 바람을 피운 주리 아빠는 아버지의 책임감 따위는 버리고, 아이의 아픔을 보듬지 않은 채 자신의 고충만 곱씹는 모습을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극 중에서 ‘청소년’ 상담센터에 전화해 자신이 ‘어른’이라며 말끝을 잇지 못하는 주리 아빠의 모습은 다소 과장된 상황으로도 보이지만, 그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주리 엄마는 주리에게 ‘쌀밥’을 먹으라며 잔소리하고, 윤아 엄마는 오히려 윤아에게 ‘쌀밥’을 차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박을 듣는다. 그들이 아이를 키우는 방식은 정반대이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가 그토록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의 속마음은 어떠한지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엄마는 상당히 닮아있다. 


어른들이 처신을 못 해서 아이들이 삶의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런 이유로 이 연극이 어른들을 완전한 악인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한 명의 인간이었기에, 가정 안에서 존중받고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주리는 자신의 아빠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는 말에 답하지 못했고, ‘엄마는 그냥 엄마, 아빠는 그냥 아빠’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키워준 사람을 양육자로서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는 한다.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그 어른들도 또렷한 자아와 작은 마음씨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을 테다. 그래서 유원지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주리 아빠와 윤아 엄마에게도 어떠한 감정이 있었겠지 싶다. 


반짝 빛나며 돌아가는 대관람차를 바라보았던 두 어른. 그 이면에 숨겨졌던 진심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남편의 외도를 마주했던 주리 엄마가, 되려 “당신이 정말 나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혼외관계를 맺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고 도망만 다닌 주리 아빠의 모습은 여전히 얄밉다. 


세 명의 어른 캐릭터들의 서사가 상당히 은유적이지만 너무 복잡하지 않고, 함축적이지만 명확하다. 그래서 이를 따라가기에 조금은 벅찬 감이 있었지만, 가정 문제와 세대 갈등을 각 인물 안에 매력적으로 담아내어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자칫하면 무겁게 흘러갈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짜임새 있는 공간 구성과 이동 동선을 통해 분위기를 환기해주었던 것도 기발한 연출이라고 느꼈다. 


내면의 아이를 제대로 직면하지 못했던 어른들을 뒤로하고, 윤아 엄마에게서 미숙아로 태어나 일찍 죽어버린 아이를 추모하며 어느새 조금씩 어른으로 성장하는 주리와 윤아. 두 청소년의 모습이 애틋하고 슬펐지만 동시에 아름다웠다. 특히 텐트 아래의 옥상 환풍구에 타임캡슐을 넣는 장면을 보며, 잘 쓰인 희곡이 영민한 연출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 극 외적인 요소지만, 전체적으로 배리어 프리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극을 제작하는 데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 같았다. 요새 공연계에 배리어 프리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어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극장에 갔는데도, 여러 측면에서 장애인 관객의 접근성을 높인 것이 보였다. 


우선 객석에 휠체어가 진입해도 편하게 극을 관람할 수 있도록 좌석을 마련해두었고, 공연장으로 입장하는 문턱에 경사로를 설치했다. 소극장이라 승강기가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관객에 따라 수동 휠체어를 오르내릴 수 있게끔 이동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로비 탁자 위에 있는 팸플릿 더미 옆에는 점자 책자가 놓여 있었고, 공연 회차마다 수어 통역과 한글 자막, 음성 해설이 제공되었다. 내가 관극했던 날에는 음성 해설이 제공되었는데, 배우들과 해설사께서 극의 진행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낭독해주셔서 좋았다. 공연예술을 관람하며 실시간으로 음성 해설을 듣는 것은 처음 경험해보았는데, 다른 공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재미있었다.   


내가 비장애인 관객이기에, 다수자로서는 체감하지 못했을 불편함도 있었을 테다. 아직도 장애인이 즐길 수 없는 공연이 많다. 공연계 곳곳에 쌓여있는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특히 아직 대극장에서는 배리어 프리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동안 당연히 여겨왔던 것이 실은 보편적인 혜택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차별과 편견을 넘어 극장에 배리어 프리 시스템이 널리 자리 잡을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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