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남기 Jun 12. 2023

뮤지컬 ‘시카고’는 왜 성공했을까?

All that Jazz!

<시카고>는 1975년 뉴욕에서 초연된 이래 1996년부터 지금까지 재연을 이어 오고 있는 작품으로,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상연되고 있는 미국 뮤지컬이다. 한국에서도 신시컴퍼니가 제작하여 최정원, 남경주, 박칼린, 윤공주, 아이비, 민경아, 최재림 등 내로라하는 뮤지컬배우들이 거쳐 간 스테디셀러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최정원, 윤공주 배우는 록시 하트 역부터 시작하여 경력을 쌓은 뒤 벨마 켈리로도 무대에서 연기했는데, <시카고>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한 산증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2021년 한국 공연에서 최재림 배우의 ‘We both reached for the gun’은 온라인에서도 유명해져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많은 관객이 관람한 작품이니만큼 잘 알려져 있지만, <시카고>가 왜 성공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시카고>는 오히려 진입장벽이 높아서 성공하기 쉽지 않은 뮤지컬이다. 


1990년대에 장엄한 무대 세트와 복잡한 기계장치로 관객에게 스펙터클을 선사했던 ‘메가 뮤지컬’이 성행한 뒤로, ‘대극장 뮤지컬’의 정석이 마치 <라이온 킹>이나 <위키드>, <오페라의 유령>처럼 볼거리가 풍부한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시카고>는 정반대다. 세트도 단순하고, 음악도 기교를 부리거나 높은 음정을 뽐내지 않는다. 조명이나 무대 효과의 화려함도 크지 않다. 심지어 온갖 자극적인 소재를 다 넣어서 ‘살인자들’을 주연으로 내세운 뮤지컬이 이토록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의아하기도 하다. 


이토록 주류 공연에서 벗어난 생소한 문법으로 만들어진 작품, 뮤지컬 <시카고>가 어떻게 지금껏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받아 한국에서도 열렬히 공연되고 있는지 이유를 생각해보았다(2023년 내한공연을 본 뒤 작성하는 후기다).   





1. 탄탄하고 매끄러운 콘텐츠


<시카고>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했던 시카고를 배경으로 화려한 쇼비즈니스가 어떻게 대중의 눈을 현혹하는지 보여주는 뮤지컬이다. 작품을 연출한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안무가 ‘밥 포시’의 관능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절제미가 담긴 안무가 유독 빛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시카고>의 연출 겸 안무가 밥 포시



밥 포시뿐만 아니라, ‘켄더 앤 앱’으로 알려진 극작/작곡 콤비 ‘존 켄더’와 ‘프레드 엡’의 음악과 대본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들은 작품 속의 배경인 시카고에서 성행했던 보드빌 쇼의 스토리텔링 형식을 사용하여 자칫 민감할 수도 있는 소재를 영리하게 풀어내어 관객의 마음을 열었다. 


바로 뮤지컬의 시작부터 제4의 벽을 무너뜨리고 관객에게 말을 걸기 시작해서, 공연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몰입과 소통을 활용한 것이다. 관객은 배우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1920년대의 시카고로 초대되어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극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살인, 탐욕, 부패, 폭력, 사기, 간통 그리고 배신이 가득 담긴 이야기를 감상하게 될 겁니다. 우리 모두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죠.”


- 뮤지컬 <시카고>의 첫 대사




걸쭉한 재즈 음악으로 포문을 여는 <시카고>에서는 무대 위에 오케스트라가 있다. 이 연주자들과 지휘자를 굳이 관객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즉흥성이 돋보이는 재즈라는 장르의 특성을 부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건 ‘쇼’라는 사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위함이다. 


당신(관객)들은 돈 내고 쇼를 보러 왔고, 우리(오케스트라)는 돈 받고 쇼를 보여주는 이들이라는 묵시적 계약관계를 명시하는 구도라는 뜻이다. 이 ‘계약관계’라는 것이 묘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데, 돈이면 무엇이든 사고팔고 보여줄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명확히 보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과 무대 위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려 <시카고> 속 이야기가 단지 허상에 그치는 구연동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즉, 현재의 뮤지컬 극장이 ‘옛 시카고의 보드빌 극장’과 일치되어, 관객은 교도소에 수감된 살인마 주인공의 이야기에 넋을 놓고 빠져들게 된다. 때로는 극장에서 세상의 민낯을 마주하며 깔깔 웃다가도 슬그머니 자신의 민낯을 돌아보기도 한다. 근데도? 재밌다. 핵심은 같지만 ‘착하고 바르게 살자’라는 딱딱한 설교보다 피부에 잘 와닿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 탄탄하고 매끄러운 콘텐츠의 힘 덕분일 테다.   





2. 촌철살인 사회풍자  


코러스 걸이었던 ‘록시 하트’는 불륜의 상대를 죽이고 교도소에 갇혔다. 보드빌 무대로 전국을 누볐던 ‘벨마 켈리’ 또한 남편과 여동생의 바람 현장을 목격하고 모조리 살해하여 교도소에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지리멸렬하고 지질한 범죄자일 뿐이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환호한다. 왜일까? 


작품의 배경은 20세기 초에 금주령이 시행되었던 미국 시카고다. 국가의 제제로 인해 억지로 술을 못 마시게 된 대중들은 반발심리를 이기지 못했고, 오히려 더 희소해진 음주에 집착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그러던 중 마피아 세력이 등장하여 불법 양조 시설을 이용해 돈을 거두기 시작했고 정부 기관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도시는 술과 향락, 돈과 유행에만 집착하는 풍조에 물들기 시작했다.  





상술했듯 관객과 무대는 계약관계, 즉 ‘돈을 주고 보는 공연’이라는 사실에 엮여 서로에게 종속된다. 이러한 관계는 무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돈이면 모든 것을 맺고 끊을 수 있는 황금의 시대, 당시의 시카고는 그런 곳이었다. 무법천지에서 돈이 될 만한 범죄자를 찾아 수임료를 걷는 변호사 ‘빌리 플린’은 그러한 자본주의의 맹점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록시와 벨마의 스타성을 알아본 빌리는 그들의 정보를 가공해 대중들을 속이기 시작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미시시피의 완전 부잣집에서 자란 록시 하트는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1920년에 우연히 시카고에 왔다가 자상한 남자 에이모스를 만났고 그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어요. 그러다가 옛 애인 프레드가 찾아와 불같이 화를 내며 총을 들고 다가왔는데…. 록시는 죽고 싶지 않아서 총을 뺏으려 했어요’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다. 당연히 뻥이다. 물론 진실도 있겠지만, 관객도 얼만큼이 사실이고 거짓인지는 모른다. 대중들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이런 상황에서 화제성에 목마른 기자 ‘메리 선샤인’은 그저 불쌍하고 예쁜 신데렐라 록시가 왕자님을 만나야 한다며 대중을 호도한다. 


변호사 빌리는 원시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황색 언론에 힘을 더해주고, 교도소장 ‘마마 모튼’은 록시와 벨마의 뒤를 봐준다. 반면에 줄곧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모 헝가리 여성은 철저히 무시당한다. 작중에서 어떤 대사를 하는지 자막으로도 알려주지 않는다. 소수자, 약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이다.


100년 전의 미국 이야기가 지금을 살아가는 한국인인 우리에게 얼마나 와닿을까 싶지만, 막상 작품을 보고 나면 열렬히 박수와 환호를 보냈던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나조차도 진실을 외면한 채 ‘보고 싶은 것’을 따라가며 환상에 취해 있을 때가 많다. <시카고>에서 던지는 촌철살인의 사회풍자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3. 빈티지와 트렌디, 그 사이 어딘가


세련되긴 하나, <시카고>가 낡은 뮤지컬임은 틀림없다.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나의 세트로 이루어진 보드빌 쇼가, 프로젝션 맵핑을 이용해 화려한 영상 기술을 선보이는 최신 뮤지컬을 따라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장기간 색을 잃지 않고 아직도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미니멀리즘이다. 특히 요즘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디자인 트렌드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것이 새삼 느껴지기도 한다. <시카고>에서도 의상 변화가 거의 없는, 비슷한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은 앙상블과 주조연 배역들이 등장한다. 


어쩌면 삭막하고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블랙과 레드라는 두 개의 키 컬러만 이용하여 시스루 의상에 다양함을 부여한다. 이러한 의상은 밥 포시의 미니멀하면서도 농염한 안무의 효과를 더욱 극대화한다. 의상뿐만 아니라 무대와 조명에는 블랙과 골드를 활용하여 고전적인 미국 뮤지컬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코인=돈=명예=권력’을 상징하는 색의 연출로도 쓰인다. 이렇게 주요 색인 블랙레드골드만 활용하면서도 최소한의 조명과 무대장치를 활용해 전체적으로 관능적인 분위기를 감질나게 표현한다. 





둘째는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이다. 물론 당대의 시카고 풍경을 표현하기 위해 록시와 벨마가 섹스 심벌로 사용된다는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수십 년 전에 나온 작품에서 두 여성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점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특히 ‘Cell block tango’에서 쿡 카운티 여성 교도소에 갇힌 수감자들이 속사포 사연을 읊는 것처럼 무대 전면에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서사를 이야기하는 것 또한 그들의 주체성을 대변한다. 록시와 벨마가 각자 남성 캐릭터와 성애적으로 연결되어 소비되지 않고, 둘이 뭉쳐서 ‘자신의 무대’를 찾아간다는 결말도 유의미하다. 


다만 뮤지컬 <어쌔신>이나 <스위니토드>에서는 다양한 서사를 가진 남성 살인마를 보여주며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원인이 하나로만 귀결되지 않도록 해 인문학적 깊이를 더했는데, <시카고>에서는 여성 범죄자들의 죄목이 거의 다 상대 남성과 이성적 관계로 엮여 저지른 살인임은 다소 아쉬운 지점이다.  

 

셋째는 변화를 포용하는 창작진의 노력이 빛난다는 것이다. 


2022년, 브로드웨이에서 최초로 오픈리 트랜스젠더 배우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 바로 <시카고>다. MTF(트랜스여성) 배우 ‘안젤리카 로스’가 록시 하트 역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 축하하는 마음에 영상도 여럿 찾아보았는데, 그녀가 흑인 여성이자 성소수자인 사실과 상관없이 록시를 연기하고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완벽하여 놀라웠다. 넘버를 갖고 놀면서 록시 특유의 능청스러운 매력을 보여주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록시 하트 역의 안젤리카 로스    



같은 해에는 교도소장 마마 모튼 역에 넷플릭스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 우승자인 ‘징크스 몬순’이 캐스팅되기도 했다. 드랙 퍼포머로서 끼가 많은 배우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지정 성별에 얽매여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역을 맡아 재능을 뽐내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징크스 또한 실력이 출중하여 관련 무대 영상을 넋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마마 모튼 역의 징크스 몬순  



과거로부터 브로드웨이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공연되었던 작품이라면 보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이들도 있기 마련일 텐데,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끊임없이 새롭고 배우들을 무대에 설 수 있게끔 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한국에서는 관용과 사랑은커녕 아직 수십 년의 공연을 거듭하며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뮤지컬조차도 없는데, 언젠가 우리 곁에서도 <시카고>와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뮤지컬 <시카고> 내한공연은 오는 8월 6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공연한다. 공연 시간은 145분, 만 14세 이상 관람가이다.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작가의 이전글 나는 아주 작은 나비 - 연극 '몬순'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