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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편 Apr 05. 2021

당신의 어휘력은 너무 빈곤하다

웹소설만 읽는 당신에게

굳이 글을 쓰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풍부한 어휘력을 가지길 원하곤 한다.

그때마다 그 방법으로 제시가 되는 게 독서다.

소설이든 기타 다른 텍스트든 뭐든, 우리가 감히 세보지도 못할 정도로 책 한 권에는 수많은 어휘가 쓰인다.

그러다 보니 책을 계속 읽다 보면 자연히 어휘력이 예전보다 풍부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게 문제다.


잠깐 이 이야기부터 먼저 해봐야 할 것 같다.


웹소설은 책일까?

웹소설을 읽는 건 독서일까?


나의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이다.


단순히 활자가 인쇄된 형태인 책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고루한 관념을 떠나,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책의 이미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들 '책'을 떠올리면 거기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

지식이든, 감성이든, 상상력이든 뭐가 됐든 은연중에 '지금의 나보다 나은 무언가' 혹은 '내가 기대하는 (고급의) 무언가'가 그 안에 있길 바란다.


그 점에서 웹소설은 늘 책의 조건에 끼질 못한다.

몇 번이고 내가 말해왔지만 우리의 무의식에는 '웹소설 그거 개나 소나 다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뭐가 나은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그걸 책이라고 부르기엔 세상엔 너무나 훌륭한 다른 책들이 많다.

그러니까 웹소설은 늘 우리 인식에서 책이 되질 못한다.

기껏 해 봤자 펄프픽션(싸구려 소설 잡지) 정도가 한계인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인식하게 된 데에는 웹소설의 빈약한 어휘력도 상당한 몫을 차지한다.

그런데 하필 당신의 독서는 대부분 웹소설에 치중되어 있다.

그러면 당신의 창작물에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편집을 하다 보면 작가의 고유한 습관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초고는 당신의 민낯과도 같아서 당신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려준다. 

거기엔 당신의 독서가 어디에 치중되어 있는지, 평소의 어휘력이 어떤지에 대한 것도 들어가 있다.


물론 편집자는 전투력 측정기를 달고 일을 보는 게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 여기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동일한 표현이 연달아 나오면 고쳐줄까 말까 고민은 하지만).

다만 어쩌다 작가들이 자신의 글에 대한 아쉬움을 스스로 토로할 때가 있었기에, 나는 이 문제를 꼭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웹소설 편집을 하다 보면 특정 어휘나 표현이 많이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적인 예가 '주먹을 말아 쥐다'이다.

이건 내 담당작에서도 숱하게 나왔고, 특히 여성향 웹소설을 펼쳐보면 9할 이상은 나온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표현이다.

처음 이 표현을 봤을 땐 '아 그래. 이런 식으로 쓸 수 있지.' 이러고 말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깨달았다.

이 표현을 모두가 쓰고 있는 것도 모자라, 이것밖에 못 쓴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주류로 자리잡은 표현 하나 때문에 다른 표현들이 사장되는 건 서글픈 일이다.

작가가 스스로의 한계를 낮춰버린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웹소설 작가들은 수많은 표현을 잊은 채(혹은 모른 채) 하나의 어휘만 쓰이는 작품들만 소비, 생산하길 반복한다.

그렇게 해도 당장 팔리니까, 재밌으면 되니까.


하지만 당신이 정말 한끗 차이로 조금이나마 더 성장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 이 어휘력의 빈곤은 크게 다가올 것이다.

표현하고 싶은 게 있어도 그 말이 무엇인지 몰라 괴로운 때가 온다는 뜻이다.

아는 말을 쉽게 정제하는 건 가능하지만, 애초에 모르는 말은 쓸 수조차 없다.

활자를 다루는 당신은 언젠가 이 고민에 부딪히게 될 확률이 높다.


이 문제를 깨닫고 고민하는 작가들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그 대안이 조금 이상했다.

아쉽게도 정말 스쳐 지나가며 본 거라 정확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식이었다.


키스의 다른 표현: 입을 맞추다, 뽀뽀를 하다, 혀가 엉키다, 숨결을 불어넣다, 기타

포옹의 다른 표현: 껴안다, 몸을 포개다, 품에 넣다, 품에 가두다, 기타


일종의 모음집으로, 여러 표현을 하고 싶을 땐 이걸 참고해 보란 식으로 쓰여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걸 본 나는 이게 진정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려스러웠다.

정말 동일한 의미로만 쓰이는 거라면 저렇게 여러 표현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아무나 다 쓴다는 웹소설에서 왜 표현 하나하나에 그렇게 끙끙거려야 할까.


그건 작가인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저 표현들은 결코 같지가 않다.

말에 실리는 무게감도, 그 질감도 어느 것 하나 같을 수가 없다.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잘 써야 작품이 빛을 발한다는 것을 당신도 분명 안다.

그런데 방대한 독서는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하지만 당장 글은 잘 쓰고 싶다.

그렇게 마음이 급해지니 저런 걸 찾아 쓰는 게 아닐까.


빈약하고 빈곤한 어휘로도 분명 내용은 재밌을 수 있고, 인기가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작가인 당신이 스스로 어휘력에 대한 문제를 느꼈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당신의 빈 곳간을 채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말이 길어졌지만 요는 간단하다.


풍부한 어휘력을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웹소설을 적당히 좀 봐야 한다.

만약 그러기 싫다면, 다른 책을 더 많이 보기라도 해야 한다.


가장 베스트인 건 모든 작품의 어휘가 풍부해져서 웹소설만 봐도 어휘력이 상승하는 날이 오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당장 작가인 당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난 당신이 조금은 고지식해 보이더라도 웹소설 외에도 여러 책을 읽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가 아끼고 좋아하는 웹소설이 '개나 소나'의 범주에서 벗어날 날이 올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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