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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구 Dec 17. 2020

정리: “이후의 시간”

“이후의 시간”(“The Time After”, 자크 랑시에르) 정리


“원시시대-봉건시대-자본주의-(그리고 언젠가는 오게 될) 코뮤니즘”이라는 선형적 시간은 1970년 대 말까 지 지속되었던 공산주의 국가 헝가리의 공식적인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서는 각 시기의 단계들과 그에 맞는 과제 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으며 언젠가 사회주의는 그것의 라이벌인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고 승리하게 될 길을 만들 어 나갈 터였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이러한 공식적인 계획과 사람들 각각에 의해 살아진 시간의 실제(the reality of lived time) 사이에는 굉장한 거리가 발생했고, 벨라 타르의 세 번째 영화이자 공산주의 헝가리에서 제작되고 촬영된 <불안한 관계 The Prefab People>(1982)는 이미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지시하고 있다. 


벨라 타르의 작품은 보통 두 시기로 나뉜다. 먼저 공산주의 헝가리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분노한 젊은 감독의 시기이다. 그는 이 시기에 관료주의적 관행을 깨고자 하고 과거부터 이어져왔던 보수주의,  이기주의, 남성지배, 소수자 배제와 같은 행동들을 의문에 부치고자 했다. 그 다음으로 성숙기의 영화가 있다. 이 시기는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그리고 그것의 자본주의적 결과들과 동반되었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정치가 어떤 술수로, 사회적 약속이 사기 또는 협잡으로, 공동의 집단이 야만적인 무리로 축소되는 어둡고 어두운 영화들이다.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감에 따라 벨라 타르의 미장센은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분노한 젊은 감독의 시기는 핸드-헬드 카메라의 무미건조한 움직임으로 대표될 수 있다. 카메라는 정밀하게 정해진 장소에 위치한 하나의 육체에서 또다른 육체로 움직이면서, 얼굴들의 모든 표현들을 엄밀히 조사하기 위해 최대한 그들 가까이로 다가간다. 반면 성숙한 감독의 비관주의는 롱 시퀀스 쇼트로 표현된다. 여기서 롱 시퀀스 쇼트는 고독과 외로움에 갇힌 개개인들 주변의 텅 빈 깊이(the empty depth of field)를 발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Social Films의 시기와 형이상학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시기로 나눌 수 없다. 그가 만든 것은 항상 같은 영화였으며, 그가 말하는 현실은 항상 같은 것이었다. 단지 그는 매 순간 조금씩 더 깊게 시간 속으로 파고 들었을 뿐이다. 그의 영화는 첫 작품부터 마지막까지, 항상 깨진 약속에 관한 이야기였으며,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의 작품은 절대적으로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에 관한 것이다. 그 세계는 순수한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제거된 세계이며 그것은 오직 영화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벨라 타르는 환상의 끝, 더 나아가 세계의 종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 역시 아니다. 이미지의 아름다움은 목적이 아니라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일 뿐이다. 그는 사람들이 사는 현실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표현을 전달하고자 고심했으며, 또한 동시에 그의 예술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영화는 단순히 볼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것의 예술이다. 1989년부터 그의 영화는 흑백이었고, 그의 작품들에서 침묵(고요함)이 매우 큰 역할을 했기 때문 에, 사람들은 벨라 타르가 영화를 그것의 무성적인 기원으로 돌리고 싶어한다고 오해해왔다. 그러나 무성영화는 침묵의 예술이 아니다. 침묵은 오직 유성 영화에서만 유형(有形)의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처음부터 벨라 타르의 이미지는 사운드에 밀접하게 관련되었었다.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시간에 대한 예술이며(Cinema is the art of  the time of images and sounds), 어떤 공간에서 육체들이 서로에게 관련되는 움직임을 발전시키는 예술(an art  developing the movements that set bodies in relation to one another in a space)이다. 영화는 말 없는 예술은 아 니지만 묘사하고 서술하는 말들의 예술도 아니다. 그것은 육체를 보여주는 예술이다. 영화에서 육체들은 말하는 행위를 통해(through the act of speaking), 그리고 말(word)이 그들에게 효과(혹은 영향)를 미치는 방식을 통해 그들 스스로를 다른 육체들 사이에서 표현한다.

 

어떤 상황의 실제, 개개인에 의해 살아진 시간의 실제는 먼저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에 의해) 약속되었던 미래에 반하는 현실을 기록하는 대서사시의 한 챕터를 구성한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곧 그것 자체로 고려된다. (전자를 스토리의 차원으로 후자를 리얼리즘의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두 차원의 연결은 항상 영화를 동원 한다. 스토리는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개요에 삽입될 수 있는 요소들을 유지하길 원한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그 상황 자체의 내부에 더 깊이 들어가길 요청한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동물로 하여금 약속들을 하고 그것을 믿거나 또는 믿기를 멈추게 만드는 감각, 지각 그리고 감정의 연쇄를 좀 더 멀리까지 팽창시키길 요청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상황들과 직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시간의 공식적인 배치가 아니라, 그 상황들에 내재해 있는 한계이다. 그 한계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아진 시간은 순수한 반복과 연결되며, 또한 그 한계에서 인간의 발화와 제스처는 동물들의 그것으로 나아간다. 


위에서 설명한 한계는 1987년 <파멸 Damnation>로부터 시작해서 2011년 <토리노의 말>로 끝나는 시기를 효과적으로 특징짓는다.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벨라 타르를 공산주의의 재앙 이후 따라오는 시간의 끝(소멸, 종말)을 다루는 감독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이후의 시간(The time after)은 더 이상 그 무엇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단조롭고 단일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의 시간이며 물질적인 사건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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