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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ny LEE Jul 21. 2021

Ep #01. 아, 닿지 않는 그들의 대화

이해를 바라는 막내, 인정받고 싶은 남자, 그저 평온하고 싶었던 중재자

가끔 그런 일이 있다. 의도치 않게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갑자기 꽂혀 나도 모르게 엿듣게 된다. 묘한 죄책감과 호기심이 동시에 일며 그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는 순간. 


그날도 그랬다. 책 한권 읽으며 나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가 "오빤 내가 잘못했다는거야?"라는 말 한마디에 현실로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테이블엔 두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첫 주문한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기도 전이었는데 언성이 높이며 다투고 있었다. 


추측컨데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동료 사이인 것 같았다. 막내로 추정이 되는 여자는 자세한 내막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남자에게 속상함을 여과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남자는 끝까지 막내에게 '그런 일을 겪게된 상황적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평행선과 같이 접점이 없는 대화는 점점 감정적으로 바뀌었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자 다른 한 사람이 중재를 하기 시작했다. 막내의 서운함을 달래면서 동시에 남자가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한다며 그들을 달랬다. 하지만 잘 들어보면 '그러니 둘 다 그만하라'는 말을 꽤 능숙하게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해당 이미지는 본문과 관련이 전혀 없습니다 :) 

하지만 술이 좀 들어가면,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법. 와인을 추가로 두 병이나 더 주문한 그들에게 합리적인 논쟁이 오가기는 글러 보였다. 중재자가 어렵게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옮겼는데, 외려 막내와 남자는 요즘 뜨거운 감자인 '부부의 가사 분담'으로 격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막내는 자기 언니의 결혼담을 예로 들며 '여자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남자는 자신이 기혼자이자 남편이라는 경험담을 증거로 반박하기 시작했다. 


남의 이야기라 미주알고주알 하긴 어렵지만 두 사람의 논쟁은 "여자로 사는 게 더 힘든가, 남자로 사는 게 더 힘든가"로 불붙어 절대 맞닿지 않는 평행선 같은 감정 싸움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초반에 합리적인 이야기를 해주던 남자는 이제 감정이 격해져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한숨을 섞어가며 격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혀가 꼬이기 시작한 막내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손가락질로 오해 받을 수 있는 제스처를 취하며 "오빠가 뭘 알겠어"를 반복했고 중재자는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와인 한 모금에 한 번씩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분명 기분을 풀려고 와인바를 찾았을텐데, 무엇이 그들을 기분 상하게 했을까. 


막내는 '너를 이해해'라는 말이 듣고 싶었을 수 있다. 남자는 막내가 상황을 이해함으로서 받고 있던 스트레스를 날리길 바랐을수도 있고, 누군가 뒷담화하는게 불편해서 얼른 그 대화가 넘어가길 바랐을 수도 있다. 중재자는 그저 하하호호 웃으며 와인 한 잔 하길 바랐을 수도 있다. 


묘하게도 '바람'은 답정너식 대화로 이끈다. 남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내 '바람'과 '욕망'에 적합한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이끌어 가려고 한다. 나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답정너식 대화를 하게 된다. 공감보다는 내가 아는 것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 하고. 저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았던 것도, 나도 늘 저런 상황을 겪곤 했기 때문 아니겠는가. 


흥미롭게 지켜 보던 나는 곧 피로감을 느꼈다. 정말 말그대로 '똑.같.은.대.화'가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논쟁을 지켜  보며 문득 '내일 저 사람들은 웃으며 마주칠 수 있으려나?' 생각이 들었다. 중재자는 비장한 표정으로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자, 자! 집에 가자!" 


이제 마무리가 되는구나 싶던 순간, 길고긴 싸움의 승자가 정해졌다. 카드 결제를 하는 남자에게 막내가 언제 싸웠냐는듯 깜찍한 목소리로 "꺄! 이거 오빠가 쏘는 거구나!" 라고 외쳤다. 남자는 가장 불쾌한 표정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하. 뭐 저딴게 다 있어." 진정한 고수는 막내였다. 


조용히 중재자가 다가와 '있다가 n빵 해줄게'라고 속삭였고, 남자는 잠시 어설픈 미소를 보이긴 했지만 쉽사리 굳어진 표정을 피진 못했다. 언제 싸웠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나가는 막내와 부글부글 거리는 속을 애써 누르며 뒤따라 나가는 남자를 보내고 나니 명언(?) 하나가 생각났다. "마지막에 웃는자가 진정한 승자"라고 했던가. 


똑같은 라벨링이 된 빈 와인 세 병을 치우며, 분명 막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와인바에 온 거 같은데, 오히려 싸우며 나갔어야 했던 그들에게 와인은 독이었을까를 생각해봤다. 다들 저마다 사연이 있을텐데, 그 날 바를 방문한 세 명에게 와인은 그렇게 좋은 윤활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 '바람'과 '욕망'을 한번쯤 뒤로 하고,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에 온전히 귀기울여 주는 것. 아무리 좋은 와인도 이 태도만큼 우리를 따뜻하게 데워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조금은 아쉽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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