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콘 스타트업인 배달앱 B사의 사훈 중 하나로 "문화는 수평적으로, 업무는 수직적으로"라는 구절이 있다.
대부분 스타트업에서도 이 회사와 마찬가지로 '수평적 문화'를 내세우며 회사 비전과 가치로 내세우는 트렌드에 있다. 내가 재직했던 회사도 수평 문화를 강조하는 곳이었는데, 이 '수평적 문화와 수직적 업무'라는 구절에 내재된 뜻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실장님, 저는 이러한 이유로 A안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수평적 문화를 강조하는 회사에는 대부분 직급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책'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셀, 티슈, 팀, 파트, 실, 부문 등 업무를 구분하는 하나의 조직과 그 상위 조직은 존재하며 그 조직을 관리하는 조직장이 있다.
문화가 수평적이라는 뜻은 이런 직급이나 연차에 막론하고 누구나 '타당한' 근거와 함께 자신의 의견을 개시할 수 있다면 언제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찍혀 내려오는 업무만 하는 게 아닌, bottom-up 형식으로 실무자 단에서 일을 먼저 찾아내 기획하고 상위 보고자에게 내용을 보고함으로써 실행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말하는 모든 게 이루어지는 문화'라거나, '위에서도 내 의견을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수평적 문화는 '문화'에 한정할 뿐, 업무에도 적용되는 게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팀장님, 왜 저한테 공유 안 해주셨어요?
팀장을 맡고 있는 친구가 속이 답답하다며 전화를 했다. 대기업 과장을 하고 경력직으로 스타트업에 팀장으로 이직한 친구였다. 그는 당신이 팀원들에게 '공유'를 하고 있는 건지, '보고'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했다. 팀원 대부분이 스타트업을 첫 회사로 선택한 1~2년 차 주니어인데, 이 '수평적 문화'에서 '수평'이란 단어에 제대로 꽂힌 건지, 자신의 직책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했다.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팀원의 R&R을 정리했고, 해당 내용을 상위 조직장에게 보고하여 일을 정리했더니 돌아온 답은 팀원의 꾸중에 가까운 불만이었다.
"팀장님, 왜 저한테 미리 공유 안 해주셨어요?"
그는 배경에 대해 충분히 공유하지 않았다면 미안하다 하면서도 본인은 그에게 보고해야 할 사람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했다 했다. 그랬더니 "우리는 원래 그런 회사가 아니다"라는 불만 섞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고 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수평'이란 말인가? 마치 회사가 동아리처럼 느껴진다 했다.
수평적 문화에서 팀장이 요구받는 수준이 높게 느껴진다며, 그렇다고 일까지 수평적으로 진행하면 분명 일이 늦어지거나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갈 것 같아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대부분 회사는 여기에 '업무는 수직적으로'라는 아이러니 하면서도 당연한 수식어를 따라 붙인다.
업무는 수직적으로, 몰라요?
반대로 뒤에 따라붙은 '수직'적인 업무에 조직장이 꽂히면 탑다운 지옥이 펼쳐진다. 수평적으로 의견은 모두 들었으니, 할 일은 다 했고, 이제 내리꽂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평적 문화와 수직적 업무라는 틀을 가졌던 전 회사에 탑다운이 익숙한 조직장이 들어왔다. 그때부터 우리의 의견은 오로지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한 방향으로 맞춰졌다. 어차피 의견을 말해도 먹히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의견도 반영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으레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 회사 업무는 수직적으로. 모르세요?"였다.
평등하면서도 수직적이라니! 조직장에게 이보다 더 어려운 미션이 있을까?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팀장이 되거나 폭군이 된다.
수평적 문화는 업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함이다
소통과 속도는 함께 가기 어렵다. 모든 걸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빠르게 일이 진행된다는 건 모순적이다. 결국 많은 소통을 함께하되 이 중에서 효율적이거나 옳은 방향이 있다면 모든 의견을 반영할 수도,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직급은 없지만 직책은 존재하는 사회, 그러니 능력 있거나 결단력 있는 조직장이 있다면 때로는 그 의견에 맞출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수평적 문화는 업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함이며, 수직적 업무 진행은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모두 한 방향 - 회사의 성장이라는 목적성을 띤다.
팀원으로서도, 중간관리자로서도 스타트업에서 근무해보니 이 저울을 잘 재는 게 참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