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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Sep 28. 2021

친구랑 둘이 제주살이 #4

딱 일주일만 제주에서 살아보는거야.







오늘도 흰 닭과 함께하는 자운당의 평화로운 아침. 자유롭게 정원을 활보하면서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닭이 신기해서 집이 따로 있나 찾으면서 정원을 기웃댄다. 그러다 정원 한켠에 닭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문이 열려있다. 외출 닭 혹은 산책 닭이라도 되는 거니. 개나 고양이에게 공격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한참 동안 닭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다. 코시국이 아니었다면 다른 방 손님들과 이곳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도 함께 했으려나.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상황이 막상 또 조금은 아쉬운 개인주의자.




자운당에는 특별히 주문해야 맛볼 수 있는 대표 메뉴가 있다. 이름은 짜이티, 계피와 생강 그리고 마샬라라는 향신료가 들어간 인도식 밀크티(주인 할머니 레시피)다.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할 때 리뷰마다 "짜이티가 환상!", "짜이티를 꼭 드셔보세요"라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어서 서울에서부터 그 맛이 궁금했었다. 주인 할머니가 바쁘거나 우유가 없는 등 돌발 상황이 생기면 주문을 해도 먹지 못하는 귀한 메뉴다. 한 잔에 5000원. 조식과 함께 먹기 위해 주문했다. 주인 할머니는 느린 몸짓으로 짜이티를 준비하면서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평생 교직에 계시다가 은퇴하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자운당에 묵었던 손님 중에도 교사 분들을 유독 많이 기억하고 계신다. 




"우리 집에 묵었던 손님 중에 어떤 사람은 아주 똑똑하고 돈 욕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더라구.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냐고 하니까 교사라는 거야. 내가 보기엔 교사가 영 적성에 안 맞아 보였는데 자기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 도저히 안 맞아서 못하겠다면서 말이야. 사람이 타고난 기질에 맞게 직업도 골라야지 적성에도 안 맞는 일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하면서 옛날에는 교사라는 직업이 인정을 너무 못 받았다고 지금도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멀었다고 하신다. 아이들 대하는 일이 어른 대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든 일이고 교사도 스승이기 전에 사람인지라 감정 노동이 심한 직업이라면서. 그래도 할머니는 평생 교사 일에 만족하며 재미있게 일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젊은 시절 한창 해외로 연수를 다니던 이야기도 해주었다. 어렵게 티켓을 구한 연주회에 입장을 했는데 시차 적응도 안되고 공부하느라 피로도 누적된 상태라 그 좋아하는 음악에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했단다. 그저 '지휘자가 참 멋지네'하는 생각뿐이었다고. 아무리 좋은 것도 내 몸이 편안해야 즐길 수 있는 거라는 교훈. 그렇게 시작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와 신혼 생활, 은퇴 후의 삶, 연애와 사랑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는 71세 할머니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경험도 거의 없는 데다 공감대를 형성하며 즐겁게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었다. 이제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매일 느낀다는 할머니는 주변의 모든 것을 하나씩 정리 중이라고 하셨지만 내가 보기엔 20년은 더 정정하실 것처럼 보였다. 그런 할머니도 나와 같은 작고 큰 고민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니. 어른이 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숙소 근처에서 오일장이 열리는 날. 점심은 시장에서 간단히(라고 말하기 멋쩍은 거창한 계획이었지만) 때우기로 한다. 검색을 해보니 시장 안에서 다양한 간식거리들을 판매하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떡볶이가 제일 먹고 싶었다. 위장이 떡볶이를 받아들일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내게 오일장의 현실은 좌절 그 자체. 너무 뜨거운 여름이라 그런지 시장이 생각보다 휑했고 다 돌아봐도 떡볶이집이 없다. 시간은 정오를 지나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기온에 벌써 온몸은 땀범벅이다. 앉아서 먹을 만한 자리가 있는 곳을 찾다가 민치가 녹두전이 먹고 싶다고 해서 전집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마침 녹두가 다 떨어져 녹두전 계획마저 실패한 상황. 완전히 김이 새서는 해물파전과 도토리묵사발을 먹기로 한다. 원래 계획에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생뚱맞은 메뉴다. 제주도까지 와서 냉동 해물 믹스로 만든 해물파전과 중국산 도토리묵을 먹는 상황이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으나 음식은 죄가 없다. 두 접시를 완전히 깨끗하게 비운다. 살얼음이 동동 뜬 묵사발을 국물까지 비우고 나니 몸이 서늘해진다. 역시 여름 별미야.












민치가 치워버리고 싶어 했던 주차금지 팻말. 포토샵으로 지워주기로 약속했는데..




연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바쁜 하루를 보내다 오랜만에 여유를 갖기로 했다. 돌고래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수애기 카페에서 돌고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수애기는 돌고래를 부르는 제주도 방언이라고 자운당 할머니가 이야기해 줬다. "돌고래가 수애기~ 수애기~ 하고 헤엄쳐서 수애기"라고 말하며 웃었는데 사실인지는 모른다. 바람에 물결이 일 때마다 돌고래 등줄기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시작한다. 방금 그거 돌고래 같은데, 아닌가. 딴짓을 하다가도 '아차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돌고래가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데!' 하고 다시 바다를 좌우로 천천히 훑는다. 사막에서 바늘 찾는 사람처럼 꼼꼼하게. 돌고래를 핑계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애써보기로 한다. 딱히 이렇다 할 성과도 없으면서 또 막상 가만히 있지는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고 있던 요즘이었다. 돌고래를 볼 것이라는 목적마저 없었더라면 이렇게 오래 바다만 보고 앉아 있지도 못할 것이 분명하다.



"은치. 나 돌고래가 너무 보고 싶나 봐. 자꾸 돌고래가 보이는 것 같아." 


"그치. 나도 그래. 그런데 진짜 돌고래라면 훨씬 높게 물 위로 올라올걸."


"그렇겠지?"



그렇게 두 시간이 넘도록 기다렸지만 결국 돌고래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 노루와 멧돼지를 만나느라 운을 다 써버렸나 보다.








우리는 금세 무료해져서 또 놀 거리를 찾아 나섰다. 어제 못한 바다 수영을 오늘은 마음껏 해보기로 하고 산방산 근처를 지날 때 눈여겨봤던 해변으로 갔다. 주차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물놀이 위험 지역>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현수막의 내용과는 달리 해변에는 아이들도 물놀이를 하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고 해변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경고문이 이유 없이 붙었을 리가 없다. 어쩐지 해수욕장이라기엔 검고 거친 모래사장부터 음산한 기운이 돌았던 것 같다. 코시국이니 최대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서 놀자는 마음으로 유난히 텅 비어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곧장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닷물이 무릎 위까지 올라왔을 즈음이었나 눈높이 보다 높은 파도가 다가온다. 신이 나서 파도가 내 몸을 지나는 순간에 맞춰 뛰어올랐는데 그대로 몸이 붕 뜨더니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모래바닥에 찧은 곳이 너무 아파서 수영복을 재껴보니 큰 상처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바다에 왔는데 상처가 문제랴. 아픔도 잊고 물에서 노는데 파도가 심해서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모래는 너무 거칠고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그 거친 모래가 소용돌이치면서 피부를 할퀴었다. 




"민치. 이건 물놀이가 아니라 재난 영화 같아! 엇 저기 또 쓰나미가 몰려온다!"


"RRRRun~~~~!!!!!!!!!!!!"


외국 영화에서 보면 꼭 뭔가 들이닥칠 때 일행에게 이렇게 외치곤 하지. 파도와 모래와 돌에 그렇게 얻어터지면서도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하여튼 둘이서 시끌벅적하게 놀았다. 수영복 아랫도리에 모래가 잔뜩 뭉쳐서 엉덩이가 비대해졌길래 "민치 이거 봐. 내 엉덩이 완전 섹시하지?" 하고 엉덩이를 쭉 내밀고 보여주니 엄청 좋아하는 민치. 역시 내 주접에 그렇게 웃어주는 건 너랑 내 동생 딱 둘뿐이라니까.









친절한 경고를 대차게 무시해버린 데 대한 대가를 호되게 치르고 결국 우리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버렸다. 모래로 성을 쌓고 찜질을 하기도 하며 한참을 해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아까 전보다 바다가 가까워졌다. 제주 바다에도 밀물 썰물이 있나 보네. 어쨌거나 자연 앞에서 인간의 몸뚱이가 얼마나 나약한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하드웨어의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다른 종에 비해 소프트웨어가 많이 진화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머리를 쓰자 머리를. 혹은 도구를.








물놀이 후 밀려오는 허기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단순히 배고픈 것과는 차원이 다른 뱃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 빨리 뭔가 채워 넣지 않으면 장기가 다 없어져 버리지 않을까 싶은 정도의 허기가 몰려온다. 자운당 바로 맞은편에 있는 순두부집에서 빠르게 배를 채우고 엊그제부터 눈여겨 본 하와이안 식당에 방문했다. 인테리어, 소품, 메뉴까지 모든 것이 하와이식이다. 동네에서 그나마 가장 도시 냄새가 나는 식당이다. 나름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어울릴법한 옷을 골라 입었는데, 식당에서 만난 4명의 하와이안 셔츠 무리에게 완전히 패했다. 손님이 아니라 마치 인테리어의 한 부분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화려한 차림의 무리에게 기세가 꺾인 우리는 조용히 긴 대화를 나눈다. 이 시간을 함께 했으면 좋았을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나열해보고 그 친구들의 말투를 흉내 내며 그리움을 떨쳐낸다.





그리고 그날 밤 드디어 돌고래와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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