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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Sep 29. 2021

친구랑 둘이 제주살이 #5

딱 일주일만 제주에서 살아보는거야.






자운당에서의 마지막 조식. 새벽부터 마당이 소란스러워 잠에서 깼다. 정원에 약을 치러 온 아저씨가 못마땅했는지 내내 옆에 붙어서 잔소리하는 주인 할머니. '할머니는 잔소리도 우아하게 하시네' 생각하며 다시 잠이 들었지만 곧 다시 깬다. 방 안에 창이 2개나 있어 8시쯤 되면 주위가 훤해지기 때문에 도저히 늦잠을 잘 수 없는 환경이다. 전날 밤, 민치와 별것 아닌 주제로 깊은 고민을 했다. 이상형 월드컵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긴 수다를 떨다 새벽에 잠이 든 탓에 몽롱했지만 조식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향한다. 웬일인지 식당이 북적인다. 약 치러 온 아저씨와 다른 방 손님 한 분이 식사 중이다. 조식은 감자와 단호박, 당근, 가지를 쪄서 올리브유와 소금을 뿌려 나왔다. 채소를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 맞는 메뉴다. 할머니는 "오늘은 그냥 이것저것 쪄봤어요."라고 무심하게 말씀하셨지만 꽤 화려한 맛이 난다. 직접 기른 채소라고 하셨던가. 어떻게 하면 찐 채소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나 감탄하며 순식간에 접시를 비운다. 주문한 짜이티가 나오기도 전에 접시를 다 비워 괜히 멋쩍어지려는데 마침 민치가 옆방 손님에게 말을 건다. 우리가 추천받은 곳, 다녀온 곳 몇 군데를 소개해 주며 나름 경험자 흉내를 내본다.






신발 신고 있는데

유유히 지나가는 가출닭 발견

사진 찍으려고 다가가니

쏜살같이 도망간다











제주에 도착한 날을 제외하고는 민치의 날씨 요정이 열심히 일해준 덕에 이동 중에도 눈이 즐겁다. 전방 시야가 탁 트인 레이는 제주도를 만끽하기에 최적의 모델인 것 같다. 물론 뚜껑 열리는 차가 제일이겠지만. 오후에는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중인 친구 집에 놀러 가기로 예정돼있다. 3주째 단 한 번도 육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친구를 잠시 탈출시켜 주기 위해 특별히 핫플레이스에 가기로 했다. 나는 아껴둔 화려한 셔츠를 꺼내 입었고, 민치는 자스민 공주 같은 옷을 입었다. 인싸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벗는 게(?) 더 '인싸'스러운 것이었다. 어쨌거나 친구를 픽업하러 가기 전 잠시 들른 곳. 네. 또 여기에요. 









제주 은갈치 색 레이 0256과 민치




친구들 사이에서 똥손으로 유명한 나는 사진을 더럽게 못 찍는 담당이다. 응당 그룹이라면 그런 캐릭터 하나쯤은 있어줘야지. 그룹의 다른 친구들은 민치가 나랑 다닐 때마다 민치를 가여워한다. 실제로 내가 찍어준 사진을 그룹 카톡 방에 전시해놓고 놀리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내게 전혀 데미지는 없다.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초라해졌다. 민치는 언젠가부터 삼각대를 세워두고 스스로 독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름대로 <인물사진 잘 찍는 방법>에 대해 몇 번 족집게 강의도 들었는데 내가 삼각대보다도 못한 것인가 조금 절망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민치는 내게 자꾸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랬다고 한다. 참 아름다운 우정이지 않은가.





용머리해안은 높은 파고로 인해 입장이 불가했다. 산방산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언젠가 자운당 할머니에게 산방산도 오를 수 있는 산이냐고 물었더니 예전에는 암벽을 타고 올랐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이 오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저렇게 높고 가파른 절벽을 줄 하나에 의지해서 오를 수가 있는 거냐고 서로에게 계속 묻고 다시 묻는 민치와 나. 답을 해줄 사람은 없는데. 





대충 찍어. 은치 배고프단 말이야. 분노의 주먹.


점심은 숙소 근처 산방식당에서 제주식 밀면을 먹었다. 숙소에서 가까운 몇 안 되는 맛집이니 자운당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먹자고 며칠을 벼르고 있었다. 평소 물냉면을 선호하는 나지만 최근 어느 비빔 예찬론자의 외침이 떠올라서 비빔밀면을 주문했다. 




"냉면은 비냉이지. 비빔 시키면 육수를 주잖아. 비빔으로 먹다가 육수 부어 먹으면 두 가지 매력을 다 느낄 수 있다고!" -비빔 박 선생




나는 음식을 먹기 위해 수십 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기다려서 들어간 맛집에서 실망한 경험이 많아 유명 맛집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 낮은 기대치를 감안한다 해도 이 집 밀면은 꽤 먹을만하다. 밀면의 식감만으로 이미 그 명성은 충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굵기는 중면 정도인데 식감은 꼭 소면의 식감을 닮았다. 툭툭 끊기지도 쫄깃하지도 않은 딱 그 중간의 식감이 밀가루 면임에도 불구하고 소화가 잘 될 것만 같다. 밀면을 삶은 정도가 딱 알맞고 먹는 내내 불지 않고 끝까지 유지된다. 면의 온도도 적당히 시원해서 양념의 새콤달콤한 맛과 조화가 좋다. 국수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합니다.




협재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카페에서 회포를 풀고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제주에서 가장 신선한 돼지고기를 저렴하게 먹고 싶다면 한림농협 하나로마트에 가면 된다. 제주에 살고 있는 분께 들은 믿을 만한 정보다. 한림에 양돈장이 있고, 제주에 유통되는 모든 돼지고기가 한림농협 하나로마트를 통한다고 했던가. 아무튼. 친구가 한 달 살기 중인 집 마당에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친구 신랑은 집에서부터 캠핑 용품을 잔뜩 챙겨왔는데 날이 더워 한 번도 마당에서 상을 펼치고 먹어보지는 못했단다. 민치와 나의 방문으로 이른바 '접대캠'을 하게 된 친구 신랑의 노고 덕에 손님 대접을 극진히 받았다. 날은 더웠지만 그늘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시원했고, 멀리 석양이 지고 있었다. 









자운당에 두고 온 짐을 가지러 가는 길. 타오르는 선셋 아래를 달리며 민치와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쿨, 김건모 노래를 따라 부르며 몸을 흔드는 그 순간에 걱정, 고민, 불안, 나를 흔드는 그 모든 것을 잊었다. 우리는 크게 노래하고, 적당히 배가 부르고,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섬을 달리는 중이었다.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친구 집 바로 뒤편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마침 예약이 비어 있어서 안채 전체를 민치와 둘이 쓰라고 싼값에 내어주신 인심 좋은 주인장. 그 덕분에 오랜만에 민치와 각방을 쓰게 됐다. 둘이 한 방을 쓸 때도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는데 막상 나만의 공간이 생기니 편안하고 좋다. 잠들기가 아쉬워 책장에 꽂힌 책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꼼꼼하게 제목을 읽어나간다. 내용이 궁금한 몇 권의 책은 펼쳐 읽어 보기도 하면서.



안채에 들어설 때부터 한증막 냄새가 났는데 바닥에 깔린 매트 때문인 것 같다. 짚을 엮어 만든 두꺼운 매트는 찜질방에서나 보던 것이다. 옛날에 엄마와 자주 다니던 찜질방 생각이 난다. 가정의 불화가 심했던 시절에 엄마의 유일한 안식처는 찜질방이었다. 그마저도 어린 딸들을 데리고 가 챙겨야 했지만 그래도 엄마는 매주 찜질방에 갔다. 동생과 함께 2층짜리 넓은 찜질방을 돌아다니고 운동기구와 안마의자를 체험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엄마는 오랫동안 한증막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울방울 흐르는 땀에 고단한 삶까지 모두 덜어낼 것처럼 한참을 뜨거운 한증막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 힘든 시절을 기어이 이겨냈구나.' 아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마른 지푸라기 냄새가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아늑한 공간이다.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를 만나서 반가웠던 것도 잠시, 바닥으로 내려가 딱딱한 매트 위에 몸을 반으로 접고 눕는다. 은은하게 마른 풀 냄새가 올라오고 편안한 조명 빛이 감도는 제주 가옥의 작은방이 그 시절까지 위로해 주는 기분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먼저 호의를 베푼다고 해도 돌아오는 것이 꼭 그에 대한 보답이란 법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적힌 사려 깊은 메시지들을 보면서 주인장은 분명 호의적인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자주 이용하는 공간에서 마주하는 메시지들은 주로 경고성이거나 배려와 양심을 요구하는 뉘앙스로 쓰여있다. 오죽하면 그렇게까지 써 붙여 놓을까 싶다가도 양심을 지키며 사는 나로서는 애꿎은 잔소리처럼 느껴져서 피로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처음 여기저기 붙은 종이를 봤을 때는 '지켜야 할 것들이 뭐 이렇게 많은 거야?'하는 날 선 감정이 일기도 했다. 민치가 씻는 동안 구석구석 붙은 종이를 천천히 읽어보니 예상한 그것과는 다른 정중하고 사려 깊게 설명한 '이용 설명서'같은 것이다. 조심하라든지, 주의하라든지, 자제하라든지 하는 '이래라저래라' 식의 내용이 아니라 <오늘 당신에게 주어진 이 시공간을 200% 만끽하는 방법> 정도로 해석하는 게 더 어울린다. 실제로 이곳에는 머무르면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힌 '사용설명서'가 있다. 100% 경험을 통해 느낀 지극히 사적인 추천사가 손글씨로 적혀있는 설명서를 보고 있으니 점점 주인장에 대해 궁금해진다. 


























우리를 위해 갈아 놓았다는 수박주스는 냉장고에 몇 통이나 가득 차 있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성이다. 미리 예약해둔 숙소가 있어서 하루 밖에 머물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언젠가 서울살이에 지칠 때 일주일쯤 혹은 한 달쯤 배낭 하나 메고 와서 처박히고 싶은 곳이다.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신 탓으로 약간의 숙취로 깨어난 아침. 어제 친구 신랑이 '이 동네는 해안가 따라 러닝 하기 딱 좋다'고 했는데 마침 해도 없고 선선한 바람도 불어 러닝 하기 좋은 날씨다. "러닝을 한다면 바로 지금이야!" 웬일인지 적극적인 민치를 따라 러닝에 도전하기로 한다. 민치는 평소에도 습관처럼 러닝을 한다. 거의 매일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나는 달리기에는 영 젬병이다. 학생 때도 달리기가 제일 싫었다. 도무지 빠르게 달리는 방법을 모르겠고, 소닉처럼 빠르게 달리는 친구들을 보면 아무리 애써도 느려터진 내가 한없이 못나게 느껴졌다. 특히 이어달리기를 할 때면 기절이라도 해서 내 순서를 피하고 싶었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달리기로 경주를 해야 된다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달리기 전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달리고 나서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상심했다. (늘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러나 두려움은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끝까지 두려움으로 남는다. 이제는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한 것도 아니니까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두려움을 즐거움으로 극복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나섰다. 5분쯤 걸어나가면 바로 나오는 해안 도로는 자전거 전용 도로까지 마련되어 있다. 6분 20초 정도의 페이스로 달리면 된다는 민치의 조언에 따라 달리기를 시작한다. 1킬로쯤 달렸을까. 벌써 심장이 튀어 오를 것만 같다. 초행길이라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 잠시 멈춰야 하는 순간을 쉼표 삼아 2.5km 구간까지 무사히 도착. 



"은치 잘 달리네~"



민치의 격려로 힘을 내고 다시 2.5km를 달려 총 5km의 목표를 달성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몇 번이고 멈추고 싶을 만큼 숨이 차올랐지만 죽을힘을 다해 민치를 쫓아갔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느라 죽겠는데, 어쩐지 민치의 뒷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서로의 숨소리에 가려졌을 뿐 민치 또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고 한다) 폐가 콩알만 해진 것처럼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목표를 달성한 나는 곧장 신발을 벗어던지고 해안가 난간에 걸터 앉는다.




숨을 가다듬고 나서 이제 좀 살겠다 싶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무렇게나 던져진 내 운동화와 가지런히 놓인 민치의 운동화였다. 이런 것만 봐도 성격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다 다르니까 얼마나 재미있어. 바닷바람에 땀이 다 식을 때까지 앉아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숙소로 돌아오니 안채에 주인장과 손님 한 분이 차를 마시고 있다. 주인장은 향 좋은 커피를 내려주었고 진짜 제주도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조잘조잘 일러주었다. 작고 정이 많은 강아지와 친구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편안할 때가 있다. 제주도라는 주제 하나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주인장이 한 얘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내용.



"안되는 법은 없잖아요. 아무도 안된다고 하는 사람 없는데요.


뭐 어때요. 그냥 하는 거죠."



나는 나 자신도 잘 챙길 줄 모르면서 남 눈치는 어지간히 보는 스타일이라 어딜 가서 뭘 하든 '이래도 되나?'부터 생각한다. 주인장과 대화를 나눌 때도 아무 데나 텐트 치고 잔다거나 아무 데서나 수영한다는 말에 "그래도 돼요?"라고 물었다가 "왜 안돼요?" 하는 되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안될 건 없지. 괜한 걱정으로 주저하는 것보다 일단 하고 보는 것이 더 이로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문 닫은 카페에서 일광욕 중인 고양이. 제주의 길고양이가 평온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니 서울에서 본 아픈 고양이들이 떠오른다. 녹록지 않은 거리의 삶이 온몸에서, 표정에서 드러나는 불쌍한 고양이들은 이 여름을 또 어떻게 견디고 있으려나. 잠시 생각하다 눈앞의 치명적인 귀여움에 다시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장한철 거리. 거리에 이름이 붙을 정도의 인물은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서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읽어본다. '한양에 과거시험을 보러 나섰다가 풍랑에 표류되어 오키나와에 갇힌 제주 사람'이 장한철이다. 기껏해야 쪽배를 타고 제주에서 한양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그 길을 오직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 나서다니 무모한 건지 용감한 건지. 그래도 조상의 긍지가 참 대단하지 않느냐고 민치와 이야기하며 '장한철'거리를 걸었다. 




음침한 분위기에 딱 맞는 착장. 사진의 제목은 <어둠의 자식>



















제주도에 여행을 와서 비 오거나 흐린 날씨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비 오는 날에 더 운치 있고 멋진 곳들이 있으니. 비자림이나 곶자왈 같은 숲은 비 오고 흐린 날에 더 몽환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들이다. 특히 비에 젖은 흙과 나무에서 올라오는 상쾌한 피톤치드 내음은 오염에 찌든 몸을 정화하기에 충분하다. 제주살이 중 처음으로 우중충해진 날씨였지만 민치는 "오히려 비올 때 만끽하기 딱 좋은 곳이 있지!" 하고 자신감을 내비치며 비밀의 숲에 가자고 했다. 안돌오름에 위치한 비밀의 숲은 2천 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 사유지다. 나는 "무슨 오름에 입장료까지 내고 들어가야 하냐"며 불편함을 드러냈지만 막상 들어서고 나서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할 수 있었다. LTE도 잘 안 터지는 깊은 숲속. 구역마다 다르게 꾸며진 비밀의 숲은 말 그대로 비밀을 간직한 듯한 신비로움으로 흡사 <나니아 연대기>를 연상케 한다. 마침 잠옷 같은 원피스를 입고 온 민치에게 옷장 문 열고 들어왔냐는 농담을 건네본다. 연인들이 많이 보이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키가 큰 나무들에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꽃밭에서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연인들의 모습 또한 비밀의 숲 관람 키포인트. 





비밀의 숲 입구까지 가는 길은 완전한 비포장도로다. 비에 젖은 흙길은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겨 도저히 속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바퀴가 작고 몸집이 큰 레이는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좌우로 심하게 흔들린다. 차가 꿀렁거릴 때마다 "어이쿠" 소리를 내는 나 때문에 웃음이 터진 민치. 핸들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잔뜩 긴장하면서도 어쩐지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진 둘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놀이기구를 타는 어린아이들처럼 깔깔 웃어대면서 끝나지 않는 비포장도로를 겨우겨우 기어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꿀렁거리며 다가오는 흰색 승용차 한 대. 차가 잔뜩 기울어져서는 살금살금거리는 그 모습이 안타깝게 귀여워서 더 깔깔댔다.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는데 상대편 차에 타고 있는 운전자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우리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웃는 건지,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웃음이 터진 건지 모르겠지만 의도야 어찌 됐건 서로에게 웃음을 준 것은 확실하다. 배꼽이 대장에 달라붙을 것처럼 한참을 웃어댄다. 






















해안 도로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 한동리. 제주살이의 마지막 숙소는 골목의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 풍성한 잔디와 돌담으로 만든 길을 따라 들어서면 아담하고 예쁜 안거리, 밖거리가 마주하고 서있다. 제주의 집들은 두 채의 집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로 침실이 있는 휴식공간을 안거리, 식당이 있는 휴게공간을 밖거리라고 한다. 체크인을 하고 간단한 소개를 받고 나니 마침 일몰 시간이다. 루프탑에서 보는 일몰이 멋지다는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짐도 풀지 않은 채로 루프탑에 오른다. 제주살이 내내 한 번도 일몰 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곳에서 모두 날려 버린다. 바다에서부터 불어오는 짠 기운 가득한 바람이 여행의 피로도 데려가는 듯했다. 태양이 서쪽으로 지는데 동쪽까지 붉은빛으로 물들이는 것이 신기했다. 인생이든 사람이든 자연이든 하이라이트만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보다.



서쪽 하늘







동쪽 하늘




제주에 올 때부터 '제주도처럼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까' 궁금했었다. 제주살이 일주일 동안의 관찰 결과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 정도. 어디에 살더라도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결론이다. 




언젠가는 꼭 제주에서 살아야지.

그리고 그때는 이곳에 딱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할 거야. 파이팅.














밤에는 근처 농협마트에서 산 해산물과 컵라면 그리고 제주 막걸리를 밖거리에 앉아 먹었다. 밖거리의 한 벽면에는 오래된 CD와 LP, 테이프 등의 음반과 책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주인장 컬렉션이라 할 수 있는 서재에서 그 사람의 윤곽을 그려본다. 조용히 흐르는 음악 속에서 즐기는 만찬이 숨 고르기 시간처럼 여유롭다.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고,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실내 온도와 적당한 조명 아래 사랑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그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 6일째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자주, 다양하게 즐기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목넘김이 좋고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며 속이 편안한 막걸리를 가장 좋아한다. 다양한 막걸리를 마셔봐도 서울 장수 막걸리가 가장 내 입맛에 잘 맞았다.(제주 막걸리를 맛보기 전까지는 ) 장수 막걸리는 가장 저렴하고 탄산의 정도와 당도, 맛이 내 취향에 딱 맞다. 제주 막걸리와 장수 막걸리를 비교하자면 탄산 정도를 제외하고는 차이가 있다. 두 제품 다 첫 모금에 강하게 탁 치고 들어오는 기분 좋은 자극이 있지만 장수 막걸리는 향이나 맛이 단조롭고 마신 후에 입안에 남는 털터름한 잡맛이 있는 반면 제주 막걸리는 전반적인 밸런스가 좋다. 시큼하고 달달한 맛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며 콤콤한 향이 코를 맴돈다. 입에 머금었을 때부터 삼킨 후까지 입안이 개운하다. 장수 막걸리가 어설프고 통통 튀는 20대라면 제주 막걸리는 점잖게 무르익은 40대 같은 느낌이다. 제주살이의 가장 큰 수확을 꼽는다면 단연 제주 막걸리다.







집 안에서 맨발로 돌을 밟는 느낌이 좋아서.











안거리 출입이 가능한 시간은 오후 10시 50분. 10시 40분까지 밖거리에서 놀다 남은 10분은 마당의 해먹에서 별을 구경하고 들어왔다. 게스트하우스 내부는 까다로운 주인장을 그대로 반영한 듯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조용하다. 이용자의 편의를 챙긴 세심함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엄격함이 공존하는 분위기. 여성전용이기도 해서 그런지 왠지 더 예민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샤워실과 화장실이 각각 2개씩 분리되어 있어서 처음으로 기다리지 않고 민치와 동시에 씻을 수 있었다. 화장실이 건식이라 맨발이나 양말을 신고도 이용할 수 있어서 편리했다. 



제주살이 내내 어쩐지 시간에 쫓겨 사는 기분은 떨칠 수가 없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대학 새내기 시절이 떠올랐다. 사사건건 싫은 소리를 하는 기숙사 사감이 정말 싫었는데, 어쩐지 비슷한 인상의 주인장 때문인가. 괜히 숨이 막혀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밖거리에서 뽑아온 책을 몇 페이지 읽는다. 이미 충분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1,2층으로 침대가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치와는 각자 시간을 보낸다. 체크인을 할 때 옆방에서 선명한 대화 소리가 들려와서 방음이 거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만 방안에 맴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기 딱 좋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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